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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서 탄생한 흑인혼혈 소년, 미국 대통령 되다

탄생에서 대권까지 ‘오바마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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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91호 박성훈⁄ 2008.11.04 17:59:23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 미국 대선 후보가 존 메케인 공화당 후보를 누르고 44대 대통령에 등극했다. 미 전역은 8년 만의 정권교체를 몰고 온 첫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탄생에 열광했다. 공화당 정부의 무능에 지쳐 있던 미국인들은 오바마 당선자가 던진 통합과 희망의 메시지에 기대를 걸고 미 대선 결전의 날인 11월 4일 그에게 과감히 지지를 던졌다. 오바마가 가진 ‘최초의 흑인 대통령’,‘최초의 하와이 태생 대통령’,‘최초의 기부자 100만 명 돌파’ 등의 타이틀은 그의 당선을 더욱 빛내고 있다. 인종차별이 잔존해 있던 시대에 흑인으로 태어나 어렵게 성장했다. 케냐 출신 아버지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버락 오바마라는 이름부터 아랍계 이미지를 주는 탓에 역경을 겪기도 했다. 대선 당시 공화당 측의 보수언론에서는 ‘사담 후세인’을 연상시켜 부정적 이미지를 입히기 위해 그의 이름에 꼭 후세인을 붙여 쓰기도 했다. 9.11 테러 이후 아랍계에 대한 적대감이 한창 높아졌을 때 주변 지인들이 그에게 개명할 것을 권유할 정도였다. 그러나 오바마는 물러서지 않고 자기 정체성을 그대로 지켜 나갔다. 모든 어려움을 딛고 미국의 주류사회에서 구김살 없이 성장해 대통령까지 오른 젊은 흑인 정치인 오바마의 삶을 돌아본다. ■ 방황하던 흑인 소년, 미 주류사회의 중심 되다 버락 오바마 후보는 1961년 8월 4일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케냐 출신의 흑인으로, 결혼 당시 케네디 재단의 지원을 받아 미국 유학 중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미국 캔자스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2살 때 부모가 이혼을 해 친척들 손에 자라기도 했고, 어머니가 인도네시아인과 재혼하면서 6살부터 10살까지는 인도네시아에서 살기도 했다. 그가 30대 초반에 쓴 회고록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을 보면, 고교시절 마리화나와 코카인 등 마약을 했던 과거가 있기도 하다. 인종문제에 따른 정체성의 갈등으로 힘든 나날을 보낸 경험도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어려움들은 역설적으로 그가 다문화 가정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연민을 품게 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오바마는 대학공부를 옥시덴탈 칼리지에서 시작해 교환학생으로 컬럼비아대에서 수학,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85년에는 시카고의 비영리 빈민조직 사업에 투신해 빈민가에서 맹활약했다. 이후 탁월한 학업으로 1990년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는 사상 처음 하버드대 법과대학 학술지 ‘하버드 로 리뷰’의 편집장을 맡았다. 이 학술지의 편집장이 된 것은 곧 미국 사회에서 주류집단에 속하는 동시에 사회적 존경을 받을 위치에 오른 것을 의미한다. 이후 법학박사 학위 취득과 함께 수석 졸업한 오바마는 시카고로 돌아와 시카고대 로스쿨 강사에 종사함과 동시에 시카고 내 지역 기독교계 자선봉사단체 및 시민 법률상담 활동을 했다. 90년대에는 지역 인권변호사로 명성을 높이기도 했다. ■ 2004년 전당대회 연설, ‘오바마 시대’ 예고 1996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오바마는 활발한 입법활동을 벌였다. 열악한 보험제도 개선을 위한 입법, 정치 관련 윤리법, 빈민을 위한 세금 혜택 법안, 육아 재정 확대, 사회보장제도의 개선, 인종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범죄자 취조 과정의 비디오 녹화 필수화 입법 등이 그가 발의했던 법안들이다. 일리노이 주에서 미 역사상 두 번째 흑인 상원의원으로 선출되고, 그해 대선 때 보스턴의 민주당 전당대회에 찬조연설자로 나서기 전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가 8년 전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할 때만 해도 전당대회를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는 플로어 티켓을 구하지 못해 홀 방청석에서 TV를 통해 대회를 지켜봐야 했고, 신용카드의 잔고가 다 떨어져 곤란한 경험까지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러나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연설에서 보인 그의 웅변력은 스스로를 일약 스타 정치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전당대회에서 “미국인은 모두 하나”라는 17분짜리 기조연설을 통해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으며 한순간에 미국의 정치 중심무대로 뛰어 올랐다. 그의 연설은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을 연상시키고,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분위기를 담고 있어, 지지자들을 열광시킨다는 평가를 받았다. 3개월 뒤인 2004년 11월 미국연방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 일리노이 주 대표로 출마해 70%의 압도적인 득표로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다. 그는 연방 상원의원 당선 이후에도 이민자 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민법 개정 작업에 힘을 쏟고, 대인지뢰를 포함한 재래식 무기통제 입법에도 전력하고 있다. ■ 힐러리·매케인에 지지우세 견지 미국 중앙정치무대에서 이라크전에 강력하게 반대한 유일한 개혁적 아프리카계 정치인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2004년 8월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국전당대회 기조연설, 2004년·2006년 선거전 등에서 보여준 천재적인 대중연설 능력과 열성 지지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2007년 2월 제44대 미국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후보경선에 출마를 선언, 같은 당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과 경쟁했다. 그가 나서는 유세장마다 “Yes, We Can”(예, 우리는 할 수 있어요), “Change We can believe in”(변화, 우리는 믿을 수 있어요) 등의 진취적인 구호가 터져 나오고, 오바마가 떠나도 공연이 끝난 후처럼 유세장을 메운 열기가 가시지 않을 정도였다. 텍사스와 오하이오·펜실베이니아의 프라이머리(예비선거)에서 힐러리 의원에게 패해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마지막 경선까지 지지세를 유지해 대선 출마의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결국 오바마는 지난 6월 3일 몬태나와 사우스 다코타 주를 끝으로 막을 내린 5개월 간의 경선 레이스에서 승리, 사상 첫 흑인 대통령 도전권을 따냈다. 그리고 지난 8월 27일 덴버 펩시센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깜짝 등장한 힐러리의 제안으로 대선 후보로 공식 지명됐다. 이후 공화당의 존 메케인을 맞아 본격적인 대선행보에 이르러서도 그는 계속된 공화당의 실책으로 우세한 지지를 유지해 갔다. 그러다 지난 9월 페일린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후 1주일 만에 백인 여성의 20%가 매케인 지지로 이동하면서 오바마와 매케인에 대한 백인 여성의 지지율이 50대42에서 41대53으로 역전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페일린 효과’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주도권을 되찾은 오바마는 각종 언론사와 조사기관들의 여론조사에서 공화당의 존 매케인 후보보다 우위를 점하면서 승리를 굳혀 갔고, 미국 국민들은 끝까지 오바마를 등지지 않았다. ■ 이라크 파병 철회, 건강보험 개편 등 정책변화 가져올 것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면서 그가 내세워 온 정책들이 힘을 받을 전망이다.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으로 있을 때부터 이라크 전쟁에 거듭 반대해 온 그는 이라크에 파병된 자국 군인들의 완전한 철수를 핵심 공약으로 제시한 바 있다. 또, 임기 말까지 전 국민 건강보험 혜택과 대학 교육 비용 절감,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세금제도 개편 등 적극적인 복지정책들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지구 온난화 문제 해결을 위한 교토 의정서의 조속한 비준과 더불어 에탄올 등의 대체 에너지 개발을 촉진한다. 초고속통신망의 조기 구축을 통한 지식정보화 강국 건설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아울러, 기성 정치권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제도 개혁을 약속하기도 했다. 국제 관계에서 버락 오바마 당선자는 한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연합(ASEAN)과의 유대를 새롭게 확대할 계획이다. 그는 대선 전 아시아 담당 보좌관을 통해 부시 정부가 멀리한 ‘우호 및 협력조약’(Treaty of Amity and Cooperation : TAC)에 가입할 의사를 밝힌 바 있다. 부시 정부는 TAC을 기피해 한국 등 16개 ASEAN 가입국가들이 참여한 정상회담에 초대되지 않았다. 가입도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와의 최대 쟁점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반대입장을 편 바 있으나, 자동차와 쇠고기 부문 등 한·미 FTA의 일부를 보완해 내년 초에 처리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언급이 보좌진에서 나오기도 했다. 국내 증시에도 유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공황 이후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권교체 사례를 분석한 결과, 장단기에 걸쳐 민주당의 주가반응이 공화당을 압도했다는 증권가의 분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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