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만 해도 대출 더 받으라고 지점장이 직접 돈다발을 들고 찾아왔는데, 이제는 창구에서조차 냉대받는 거 같네요. 필요 없을 때는 선심 쓰는 척하더니, 정작 필요할 때는 내쫓는 은행들이 얄미워요. 비오는 날 우산 빼앗는 격 아닌가요?”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A 중소기업 사장의 하소연이다. 요즘 중소기업 사장들 중 은행에 서운함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나마 경기가 좋을 때 시중은행들이 앞다퉈 대출영업에 나섰지만, 최근 부실자산이 늘어나면서 중소기업 대출을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가 직접 나서 유동성을 지원하고 중소기업 대출을 활성화하라고 압박했지만,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반면, 재무구조가 튼튼한 대기업들은 사정이 다르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시작된 국내 경기 침체가 대부분 중소기업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돈 되는 기업들은 은행들끼리 과당경쟁에 나서면서, 돈 안 되는 곳은 나몰라라 외면하는 은행들의 이중적 잣대를 알아봤다. 지난 11월 5일 오전 7시 서울 팔래스호텔의 한 회의장에 전광우 금융위원장과 김종창 금융감독원장, 임승태 금융위 사무처장, 주재성 금감원 부원장보 등 금융당국 쪽 인사들과 강정원 국민은행장, 이종휘 우리은행장, 신상훈 신한은행장 등 7대 시중은행장들이 마주앉았다. 전 위원장은 “정부로서는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 은행에 대해 과감하고 선제적 조처를 모두 해줬다. 중소기업 지원에 적극 나서달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은행들은 여전히 소극적”이라며 은행들을 질타했다. 바통을 이어받은 김종창 원장은 “은행들이 중소기업 지원실적은 저조한 반면, 예금 유치를 위해 다른 은행에 대해 루머까지 퍼뜨리는 사례가 있다”며 “앞으로 철저히 점검해 은행장에게 분명하게 책임을 묻겠다”고 강조했다. 참석한 은행장들은 “그런 측면이 있다. 돌아가서 챙겨보겠다”고 대답했다. 이는 지난 11월 4일 이명박 대통령이 “은행은 돈이 필요 없을 때 갖다 쓰라고 하는데 정작 필요할 때 안면을 바꾸는 경우를 많이 봤다”며 은행을 정면으로 비난하고 나선 지 하루 뒤 풍경이다. 금융위 고위 관계자는 “우리가 은행 좋으라고 돈을 쏟아 부은 줄 아느냐”며 “은행들은 이렇게 경제가 안 좋을 때는 속성상 현금을 움켜쥐고 있으려고 한다”며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지급보증을 해주면서 은행과 맺기로 한 양해각서(MOU)에 ‘실물경제 유동성 지원’ 항목이 들어간 것도 이런 맥락이다. 금감원 고위 관계자 역시 “한 기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는 누군가 욕을 먹어야 한다”며 “금감원이 적극 나서겠다. ‘수단’은 많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관치금융 아니냐는 지적도 흘러나오고 있지만, 어려울 때는 정부 지원을 받는 은행들이 중소기업과 서민들이 어려울 때는 외면하고 있어 관치금융 목소리는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금융당국 역시 ‘관치’라는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은행들이 왜 정부의 질타를 계속 받고 있을까? 먼저, 한국은행이 11월 6일 발표한 ‘10월 중 금융시장 동향’을 살펴보면, 지난달 은행권의 중기대출은 2조6000억 원 늘어나는데 그쳤다. 은행권의 중기대출 증가액은 지난 4월 7조4000억 원에서 5월 5조8000억 원으로 줄어든 뒤 6월과 7월에도 5조∼6조 원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후 8월 1조8000억 원으로 급감한 뒤 9월에도 1조9000억 원 수준에 머물렀다. 한국은행도 10월 23일 총액한도대출 규모를 기존의 6조5000억 원에서 9조 원으로 2조5000억 원 증액했다. 총액한도대출은 한은이 총액한도를 정해놓고 은행별로 중소기업 지원 실적에 연계해 시장 금리보다 훨씬 낮은 금리로 자금을 배정해주는 것으로, 현재 연 3.25%의 금리가 적용된다. 이 자금을 지원받은 은행들은 저리로 자금을 조달해 중소기업 대출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각종 조치에도 은행들이 중기대출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점이다. 이유는 경기둔화로 연체율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중기대출을 늘리면 결국 은행의 재무 건전성 악화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현재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하락을 막으려고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은 대출·보증 등 위험이 있는 자산에 비해 자기자본을 얼마나 쌓아놓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건전성 지표로, 현재 감독당국이 정한 의무비율은 8% 선이지만 통상 10%를 넘어야 우량은행으로 평가된다. 최근 3분기 실적 발표에서 국민은행의 BIS 비율이 9.76%로 2분기의 12.45%에 비해 큰 폭으로 떨어졌고, 신한은행도 12.50%에서 11.90%로 주저앉는 등 BSI 비율이 하락하자 비상이 걸렸다. BIS 비율이 8% 밑으로 하락하면 감독당국으로부터 부실여신에 대한 강제상각이나 외화자산 매각, 신규 여신 제한 등의 제재를 받을 수 있고, 대외적으로는 은행의 신뢰도가 낮아지면서 조달 비용이 커질 수 있다. 사정을 알고 있는 정부는 두 달여 동안 달러가 부족하다고 아우성을 치는 은행들에게 외채 지급보증을 해줬고, 한국은행은 외환 스와프 시장에서 달러를 사실상 무제한 공급해주기로 했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1%포인트나 내리고, 그래도 대출금리가 안 내려가자 은행채를 사주기로 했다. 규제가 너무 빡빡하다고 해 원화유동성 비율을 완화했다. 또 새 BIS 비율 협약인 ‘바젤Ⅱ’ 의무 도입 시기를 내년 1월에서 1년 연기하기로 했다. 결국, 모든 지원이 국민 혈세로 이뤄진 셈이다. 하지만, 은행들은 이번 조치로 어느 정도 한숨을 돌리게 됐다는 분위기지만,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여전히 중기대출을 과거처럼 적극 늘리기 어렵다는 분위기다.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수출기업의 수출환어음 매입을 중단해버리고, 중소기업 대출비중은 줄였다. 국민 혈세가 은행까지만 가고 기업과 가계로는 흘러가지 않고 있는 셈이다. 반면, 대기업 대출은 훈풍이다. 지난 6월과 견주어 보면 이들 두 기업군의 격차는 확연히 드러난다. 지난 6월 은행권의 중기대출 증가액은 6조1000억 원인데 비해, 대기업 대출은 1조4000억 원이었다. 지난달과 비교해 대기업 대출은 4배 가까이 늘어난 데 반해 중소기업은 절반 이하로 준 것이다. ■ 서글픈 서민들, “예금금리 ‘왕창’, 대출금리 찔끔” 은행들의 이중적 잣대에 서민들도 피해를 입고 있다. 지난 10월 27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0.75%로 사상 최대폭의 금리인하 정책은 단행했음에도 대출금리 인하율은 저조하다. 하지만, 높은 금액을 6개월에서 1년 이상 예치하는 예금금리는 연일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금통위 정책이 시장에 반영되지 않은 셈이다.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와 은행채 등 시장금리는 주택담보대출을 비롯해 전세대출·신용대출 등의 기준값이다. 여기에 은행별 마진(스프레드)이 붙어 최종금리가 결정된다. 대출금리가 하락하려면 은행채 등의 금리가 내려가거나 스프레드가 조정돼야 한다. 그러나 시중은행 관계자는 “스프레드는 더 이상 내릴 수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 동안 은행들이 대출경쟁을 벌여오면서 이미 스프레드가 바닥까지 내려왔다는 설명이다. 주택담보대출의 95% 이상을 차지하는 변동금리형 상품의 경우 국민·신한·우리·하나 등 4개 은행은 전일이나 직전 3영업일의 CD(91일물) 평균금리에 은행별 마진을 붙인다. 스프레드는 지난주(11월 5일) 현재 평균 0.89∼2.24%다. 여기에 고객 사정에 맞게 각종 우대금리가 적용되면 보통 1%포인트 내외의 가산금리만 적용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스프레드는 업무비용이나 예상손실률 등이 반영된 것”이라며 “실제 1%포인트 내외만 적용된다면 마진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은행이 인위적으로 대출금리를 조절할 길은 없고 기준값인 은행채나 CD 금리가 하락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증권업협회에 따르면, 이날 CD 금리는 정부의 전방위 유동성 공급으로 연 5.93%로 마감, 지난달 말 한은 기준금리 인하 이후 0.11%포인트 내렸다. 이에 연동해 국민 등 4개 은행의 3개월 변동형 주택담보대출 최고금리는 이날 현재 연 8.06∼8.34%를 기록, 10월 27일 대비 0.10∼0.24%포인트만 내려간 상태다. 지난 11월 3일부터 대표적인 정기예금 금리들을 최고 0.75%포인트 내린 것과 극명히 대조된다. CD 금리가 오르면 힘들어지는 사람은 결국 주택 대출자들이다. 집값이 고공행진을 이어 올 때 빚을 주고 내집마련의 꿈을 실현한 서민들이 이제는 팔리지도 않는 집에 턱없이 높은 이자만 은행에 바치고 있는 꼴이다. 서울 동작구에 거주하는 한 주부(35세)는 “3억 원의 빚을 얹고 2년 전에 집을 구입했는데, 대출금리가 이처럼 높아진 경우는 처음”이라며 “정부가 콜 금리를 인하하고, 한미 통화 스와프도 체결해 금리도 좀 내려갈 것으로 생각했는데, 전혀 반영이 안된 것 같다”고 호소했다. 서울 구로구에 거주하는 직장인 이 모(38세) 씨 역시 “매달 월급을 받아도 생활비와 세금, 대출이자를 빼면 쓸 게 없다”면서 “펀드와 주식이 반토막 나고 빚만 잔뜩 쌓여있어 가족들과 외식을 언제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가장으로서 이렇게 힘든 경우는 처음이다”라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