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11월 12일 남북 적십자 채널의 단절을 일방 선언하고 군사분계선 통과에 대한 엄격 제한 및 차단 조치를 밝힌 것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전반에 대한 불만을 행동으로 표출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북한의 ‘돌발행동’은 대북 직접 대화에 적극적인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남한 정부에 대하여 대북정책 전환과 남북관계 전면차단 중 양자택일을 강하게 압박한 것이나, 우리 정부가 북한의 이런 요구에 쉽사리 ‘원칙’을 바꾸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지난 9개월 간 경색국면에 갇혔던 남북관계가 본격적인 대립국면으로 한 단계 더 악화될 전망이다.
남북 당국의 궤적을 보면 북한이 경고하는 ‘남북관계의 전면차단’이라는 막다른 골목을 피하기 어려운 것 아니냐는 우려가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오지만, 앞으로 그 골목에서 빠져 나오는 길을 남북이 스스로 찾을 수 있을지 아니면 국제정세 등 외부 상황의 충격이 있어야만 가능할지 아직 자신 있는 전망은 나오지 않고 있다.
출범 9개월 만에 남북관계에서 최대 위기를 맞은 정부는 13일 첫 대응책으로, 그동안 북한 군부가 요구해 온 군 통신선 자재·장비를 조건 없이 줄 테니 시간·장소를 알려 달라고 통보하는 등 ‘북한 군부 달래기’ 카드를 사용했다.
정부의 이 조치에는 우선 현재 남한 때리기의 선봉 역할을 맡고 있는 북한 군부의 요구를 들어줘 상황 악화를 막고 대화의 계기를 마련해보자는 뜻 외에도, 공개적으론 얘기하기는 꺼리지만 10·4 선언을 존중한다는 정신에 따라 실무 약속을 이행한다는 대북 메시지도 담겨 있다는 게 대북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 3통(통행·통신·통관) 문제 전향적 입장 발표
당시, “통행·통신·통관 문제를 비롯한 제반 제도적 보장 조치들을 조속히 완비한다”는 선언 5항에 따라 2007년 12월 남북 군 당국 간 ‘통신 현대화를 위한 자재·장비 제공’이 합의된 것으로서, 군 통신선 자재 제공은 연원을 따지면 지난해 10·4 선언이 근거가 되는 셈이다.
유명환 외교부 장관이 11월 13일 국회에서 대북 전통문을 놓고 “그간 남북 간에 보류됐던 3통(통행·통신·통관) 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입장을 발표할 것”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 같은 배경이 깔려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날 정부가 북한 군부에 제공한다고 발표한 대북 장비·자재는 원래 31억 원어치였으나, 북한의 요구에 따라 액수를 더 늘릴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리고 정부는 북한을 극도로 자극한 대북 ‘삐라’살포도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 자제시킬 방침으로 알려졌지만, 북한이 전면에 내세운 6·15 선언, 10·4 선언의 이행에 대한 확답을 준 게 아니기 때문에 북한이 이를 성의 있는 조치로 받아들일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그러나 정부의 대응이 북한에 대한 백기 선언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 그룹의 설명이다.
수년 간 이 대통령의 자문을 맡아 온 이들 전문가 그룹은 “현재 상황이 북한의 정부 길들이기 시도라는 점을 대통령이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특히 이 대통령의 ‘대북정책 브레인’들은 이날 “대통령이 이번 사태와 관련해 앞으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이 대통령은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이나 북한 매체의 극렬한 대통령 비방을 ‘비핵·개방 3000’으로 요약되는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무력화하려는 의도적 조치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13일 오후 기자들과 만나 북한 측의 이 같은 강경 대응과 관련해 “미국 민주당의 새 행정부는 확실한 원칙 아래 대북정책을 펼 것이며, 어떤 경우에도 긴밀한 한미 협조체제 위에서 모든 것을 진행할 것”이라며 “북한이 종전에 해 오듯 압박 수위를 높이고 긴장도를 높여서 크게 ‘딜’을 하겠다고 생각했다면 방향착오”라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또 “혹시라도 북한이 ‘통미봉남’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잘못 판단한 것”이라며 “왜냐하면 버락 오바마 당선인은 후보 시절인 지난 10월 북한의 테러지원국 해제 직후 발표한 성명을 통해 ‘만일 북한이 강력한 검증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모든 지원을 중단하고 새로운 제한 조치를 검토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강경하고 분명한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관계자는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강경 대응책을 통해 대결 국면을 조성할 의사가 없다. 대화를 통해 해결하자는 것”이라며 “북한을 돕고 싶어 하는 우리의 진정성을 북이 의심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실천이 따르지 않는 공허한 선언이나 주장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실질적인 대화를 하자는 것”이라며 “이명박 대통령도 첫 미국 방문 때 <워싱턴포스트>지와의 인터뷰에서 남북 상주 연락사무소 설치를 제안하지 않았느냐. 우리 측은 계속해서 대화와 상생공영 방침을 밝혔지만 북한에서 응답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 남경필 “우리 또한 냉정히 돌아볼 때”
정부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인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은 13일 보도자료를 통해 “대통령이나 당국자들은 남북대화의 필요성을 선언적으로 말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며 “북한은 공식적인 회담을 한 번 제의했으나 우리 정부는 공식적으로 남북회담을 제의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주장하며 이 대통령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남 의원은 “북한이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 개성공단을 위협하고 있는 이면에는 북한을 대하는 우리 자세에도 문제가 있다”며 “"우리는 북측이 일관되게 요구해 온 6.15선언과 10.4공동선언 이행에도 공식적인 답을 주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남 의원은 또 “정부가 개성공단 기숙사 및 통신 기자재 제공, 대북 식량지원 등 가시적인 행동도 전혀 취한 바 없다”며 “남북관계가 어려울수록 공식적인 회담 제의와 구체적인 행동을 보임으로써 지금의 난국을 헤쳐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 의원은 “지금 필요한 것은 북측을 굴복시키겠다는 강경 자세도 아니고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선언도 아니다”라며 “우리 또한 그간 남북관계 경색에 문제가 없었는지 냉정히 돌아볼 때”라고 강조했다.
민주당은 11월 12일 김유정 대변인의 논평에서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된 것은 정부의 대북 강경기조가 그 원인을 제공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며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 변화를 촉구했다.
김 대변인은 이어 “개성공단 입주업체들은 공장철수와 같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걱정하고 있다. 실제로 공장폐쇄까지 이어진다면 공단 입주업체들의 줄도산은 명약관화할 것”이라고 정부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남북관계 개선은 한반도 평화뿐만 아니라 우리 경제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기 전에 남북 화해협력을 위한 정부 여당의 전향적인 자세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인 민주당 이미경 의원은 11월 11일 통일부 예산안 심사에 앞서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방안으로 “정부는 남북 간에 실추된 신뢰를 회복하고 향후 남북관계 발전을 안정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전직 대통령 혹은 유력 정치인을 대표로 하는 특사 파견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의원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가 당선됨으로써 한반도 냉전구도의 해빙이 시작되고 있고, 북핵 불능화 2단계 조치가 마무리됨에 따른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과정이 이미 시작되고 있으나 한반도 당사자 간 엄중한 대결 국면이 지속되고 있다”며 “남북경색이 지속되고 있는 근본 원인으로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과 그 이행계획인 5대 핵심 프로젝트는 아직도 구체적 계획이 없는 식물정책으로 ‘무계획 정책’에 기인했다”고 진단했다.
또한, 대북 사업에 대하여 어떠한 성과도 내지 못하는 ‘무능력 정책’, 여전히 불투명한 통일부 예산안에 기인한 ‘불투명 정책’, 남북협력기금의 정부 주도 예산은 증액된 반면 민간·국제기구 예산은 삭감되는 ‘정부 독점 정책’, 대북 강경 발언을 쏟아내면서 남북관계의 신뢰를 추락시킨 ‘남북 불신 정책’ 때문이라고 거듭 지적했다.
장성민 세계와 동북아 평화포럼 대표는 북한의 강경 발언이 나오기 직전인 11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