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 재계에서 핫 이슈를 선택하라면 단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퇴진을 꼽을 수 있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리 양심선언을 시작으로, 이건희 회장이 삼성과 관련된 모든 경영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지난 4월 22일 경영쇄신안 발표와 함께 7월 1일까지 이뤄진 일이다. 이와 함께, 삼성의 핵심인물인 이학수 전략기획실장과 김인주 전략기획실 사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삼성전자를 10년 간 이끌었던 윤종용 부회장도 상임고문으로 물러나는 등 대대적인 쇄신을 단행하고 사장단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독립경영체제에 돌입했다. 독립경영체제 돌입 첫날 이건희 전 회장의 1심 결심공판이 진행됐고, 이 자리에서 이 전 회장은 삼성전자와 같은 세계 1등 기업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호소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세계 최고의 기업인 삼성이 국민에게 무릎을 꿇은 날이다. 이때부터 삼성은 ‘세계적인 그룹’의 이미지 훼손은 물론, 은행진출 등 향후 사업계획을 전면 중단하기에 이른다. 물론, 후유증은 여전하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내년도 미래성장 동력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내년 사업계획은 아직까지 발표할 내용이 하나도 없다. 앞으로 추진해야 할 많은 분야도 전면 정지돼 있는 상태다.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 뒤 “매년 12월 초에는 모든 사업계획이 나오고 공식적인 발표를 해왔지만, 올해는 우리에게 너무나 큰 사건이 있었다. 일단 이 부분을 해결하고 난 뒤 계획안을 공식화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삼성이 모든 분야에서 손을 놓은 것일까? 물론 아니다. 다만, 이건희 전 회장의 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핵심 분야를 공식화하기는 이르다는 평가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또, 현재 추락할 만큼 추락한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분석도 힘을 얻고 있다. 11월 26일, 서울 강남 서초동 삼성타운에는 삼성그룹 각 계열사 사장들이 모두 모였다. 전략적 브랜드 관리에 관한 박찬수 고려대 경역학과 교수의 특강을 듣고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서다. 그 동안 남대문에 있는 삼성 본관 건물에서 매주 수요일에 열렸던 사장단회의는 이날 처음으로 서초동 사옥 39층에서 개최됐다. 이날 회의는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 사회로 진행했으며, 총 3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강의는 ‘전략적 브랜드 관리’의 목표나 방법 등에 관한 내용이었다. 브랜드 연구 분야의 전문가인 박 교수는 스리니바산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와 공동으로 개발한 브랜드 자산가치 측정 방법을 동원해 최근에는 삼성 휴대폰인 애니콜의 브랜드 가치가 5조7000억 원에 달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박 교수는 “브랜드 가치는 시장점유율과 상품단위당 기여수익성 등을 기준으로 평가하는데, 삼성 휴대폰이 국내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배경에는 애니콜의 브랜드 파워가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애니콜은 올해 들어서도 사용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햅틱 1·2를 잇달아 출시해 국내 휴대폰 시장에 터치스크린폰 돌풍을 일으켰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한 임원은 “참석자들이 브랜드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으며, 각사의 브랜드를 보다 더 전략적으로 관리하자는 얘기가 나왔다”고 전했다. 이건희 전 회장이 빠진 그들의 첫 번째 모임인 셈이다. ■ 포스트 교토 시대, 북한의 변화를 읽어라 삼성전자는 미래 성장동력과 글로벌 브랜드 전략의 틀을 다시 짜기 위해 마케팅 석학으로 꼽히는 케빈 켈러 미국 다트머스대 교수와 컨설팅 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 동안 스포츠 마케팅과 프리미엄 이미지 구축을 통해 브랜드 가치를 성공적으로 높여왔지만, 제품군과 수출지역이 다양하다 보니 마케팅 에너지가 분산돼왔다는 지적을 받았다. 삼성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한국 경제는 내년부터 2~3년 간 세 가지 큰 변화의 물결을 맞게 될 것”이라며 “첫 번째는 금융위기에 따른 세계 경제구조의 재편이고, 두 번째가 신재생에너지 개발과 기후변화 규제가 시행되는 ‘포스트 교토 시대’, 그리고 마지막은 바로 북한의 변화”라고 강조했다. 북한의 개성관광 중단 통보로 남북 경제협력 사업이 최악의 국면을 맞고 있는 가운데, 삼성그룹이 북한의 정세 변화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특히, 각 계열사 사장단협의회는 얼마 전에 한국국방연구원 백승주 북한연구실장을 초빙, ‘오바마 이후의 대북정책 변화와 북한 정세’ 주제의 강의를 ‘열공’하기도 했다. 사장단은 북한 동향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김정일 국방위원장 이후의 정세변화 시나리오를 경청하고, 개성공단 전망에 대해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등 깊은 관심을 보였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경제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한반도 안보지수(KPSI)’가 2006년 10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후 가장 낮은 46.38을 기록하며 안보환경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30명의 삼성 CEO들이 북한의 정세변화를 주제로 토의를 벌인 것은 관심이 가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 친환경 소재 개발로 ‘녹색삼성’ 만들자 삼성이 미래 성장동력으로 주력하는 또 다른 분야는 ‘녹색삼성’이다. 바로 고갈되지 않는 친환경 소재, 즉 바이오 플라스틱을 개발하겠다는 의지다. 바이오 플라스틱은 가공이나 폐기 때 일반 플라스틱보다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35% 이상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땅에 묻으면 자연분해가 되는 대표적인 친환경 소재다. 삼성전자는 이를 위해 기존 플라스틱 공급사인 제일모직에 가능성 여부를 전달했고, 결국 지난 7월 삼성전자는 마침내 일명 ‘옥수수폰’으로 알려진 친환경 휴대전화 ‘에코’(SCH-W510)를 세상에 내놓았다. 에코는 국내 휴대전화로는 처음으로 환경부 산하기관인 친환경상품진흥원의 환경마크를 획득했다. 또, 최근에는 전 계열사가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태양광 사업도 본궤도에 진입했다. 삼성물산이 운영하는 3MW급 태양광발전소인 ‘솔루채 진도’가 지난 7월부터 상업발전을 시작한데 이어, 삼성에버랜드와 삼성생명이 합작한 18.4MW급 김천 태양광발전소가 지난 9월 말부터 가동을 시작했다. 삼성은 태양광 사업이 삼성전자를 비롯해 삼성SDI·삼성석유화학·삼성정밀화학·삼성물산·삼성에버랜드 등 각 계열사가 보유한 전문역량을 바탕으로 유기적인 협력체제를 구축할 경우 단기간에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고 최근에는 해외시장 진출도 적극 타진하고 있다. 삼성은 계열사별로 다양한 친환경 제품을 개발하는데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국내 최초로 발광 다이오드(LED) 광원을 채택한 모니터를 출시했다. 최근 내놓은 지펠 냉장고에는 초진공 단열재를 사용해 월간 소비전력량을 기존 제품보다 14% 낮췄다. 중대형 빌딩에 쓰이는 시스템 에어컨에는 오존 파괴지수가 ‘0’인 친환경 냉매를 사용했다. 삼성SDI는 향후 폭발적인 성장이 예상되는 하이브리드카(HEV)용 2차전지 개발에 몰두하는 등 향후 친환경·차세대 종합에너지 전문기업으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지난 6월 독일의 보쉬와 손을 잡고 HEV용 배터리 팩 시스템의 개발과 생산, 그리고 판매를 위한 합작사 ‘SB리모티브’를 설립했다. 최근에는 카이스트와 함께 유리나 필름에 소재를 인쇄, 건물의 유리창이 태양광 발전을 할 수 있는 염료감응형 태양전지를 개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