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우 금융위원장이 11월 중순경 미국에서 열린 한국시장 투자설명회에 참가해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예전에 쓰던 ‘낫과 망치’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 위원장은 또 “(이를 위해)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은행들의 새로운 짝짓기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10년 전 IMF 외환위기 당시 사용했던 위기 극복 방안을 다시 살피고 있다”며 “필요하다면 새로운 짝짓기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외환위기 때 사용한 ‘낫과 망치’라는 날선 표현까지 써가며 정부 주도의 은행 구조조정을 언급한 셈이다. 전 위원장의 이번 발언은 그 동안 은행들의 몸집불리기 경쟁에다 금융위기로 인해 건전성과 각종 지표가 더욱 나빠지면서, 정부 당국이 내놓은 대책으로 보인다. 사실상, 은행들은 지난 수년 간 무리한 대출자산 확장을 통해 자산건전성이 악화되며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하락세를 보였다. 또, 이제는 자본 확충을 위해 후순위채권 발행 등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는 중이다. 설상가상으로, 은행들은 손쉽게 수수료 이익을 거둘 수 있는 펀드 판매에 열중해왔지만, 주식 폭락으로 고객들이 큰 손실을 보자 이제는 민원제기에 시달리고 있다. 이를 두고 전 위원장은 “은행이 대출 재원인 예금이 빠져나가는 것을 간과한 채 펀드 판매에만 열을 올린 것도 잘못”이라고 질타했다. 하지만, 은행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듯하다. 은행들은 위기를 느끼고 일단 공적자금부터 받자는 심산으로 후순위채권 발행에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외화차입에 대한 정부 지급보증을 받기 위해 금융감독원과 ‘연말까지 국제결제은행(BIS) 비율을 11~12%까지 높이겠다’는 내용의 양해각서를 맺은 바 있다. 하지만, 연말 시한은 코앞까지 닥쳤고, 지금처럼 불안한 금융상황에서 방법은 후순위채권을 발행하는 방법밖에 없다. 결국 은행들의 고금리 후순위채 발행이 러시를 이루었고, 이 때문에 시중금리는 또다시 상승했다. 전 위원장이 관치금융이라는 비판을 감안하고라도 ‘낫과 망치’ 발언을 꺼낸 이유는 은행들의 이같은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하지만, 문제는 말만 앞세워 시장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점이다. 전 위원장의 ‘낫과 망치’ 발언은 우선 현재의 정부 기조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서서 “낮은 금리로 중소기업에 대출해주라”고 직접 지시하고, 전광우 위원장도 지난 11월 5일 시중은행장들을 만난 자리에서 중소기업 대출 확대를 주문하면서 “대출실적이 부진한 은행은 제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런 대출 확대는 은행 건전성 확보와는 완전히 대치되는 점이다. 특히, 한국의 은행들은 매우 위험한 수준의 예금대출비율(예대비)을 보이고 있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한국의 은행들은 국제적인 기준으로 130%의 예대비를 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건전한 은행들이 약 90%의 비율을 보이고 있는 데 비해 매우 높은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대출’을 늘리면 은행 건전성은 결코 회복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말 그대로 말과 행동이 전혀 맞지 않는 셈이다. ■ 전 위원장, “인위적 합병 아니다” 뒤늦게 해명 상황에 맞지 않는 ‘낫과 망치’ 발언 논란이 일파만파 확산되면서 전 위원장은 뒤늦게 “인위적인 합병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에 나섰다. 전 위원장은 지난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낫과 망치’라는 표현은 언론에 의해 잘못 인용된 부분이 있으며, 세계경제가 위축되는 상황을 잘 버텨 나가기 위해 스스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면서 “이를 촉진하기 위해서 우리가 과거에 활용했던 구조조정의 ‘연장, 툴’을 재점검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차원의 발언이었다”고 해명했다. 즉, ‘낫과 망치’란 과거 구조조정 당시의 정책적 수단을 의미하는 말이었다는 설명이다. 또 ‘은행 간 짝짓기’ 발언도 결코 인위적인 합병을 뜻하는 발언이 아니라, “시장 안에서의 자연스러운 M&A를 뜻한다”고 해명했다. 진행자가 “은행에 공적자금이 들어갈 가능성”에 대해 질문하자, “그것은 너무 앞서가는 이야기이며, 스스로 충분한 자본력을 가지고 생산적인 대출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라면서 “공적자금 투입이라고 하는 것은 마지막 수단”이라고 말했다. 또, 이명박 대통령의 국제결제은행(BIS) 비율 인하 발언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에서 BIS 자기자본비율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라는 제안 차원의 말이고, 이 시점에서 은행의 건전성을 평가하는 BIS 비율에 대해 우리나라가 단독으로 그런 낮은 기준을 적용하겠다는 차원의 말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 금융·정치권, “금융당국 수장 자질없다” 비난 이같은 오락가락 정책에 시장과 정치권마저 전 위원장을 비판하고 나섰다. 시장에서는 전 위원장의 발언이 오락가락해 시장 참가자들이 경영전략 수립에 혼선을 빚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금융권 일각에서는 민간 출신의 전 위원장이 금융감독당국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리더십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민간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전 위원장이 민간 출신 대변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해 관료조직의 문화와 쉽게 융화되지 못하고 리더십에 한계를 드러내는 가운데 성급한 발언으로 더욱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도 비판론이 확산되고 있다. 국회 정무위 소속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해외발 금융위기 확산에 대비해 금융기관 감독권을 강화했어야 할 금융위가 거꾸로 규제완화와 금융산업 덩치 키우는데만 열중했다”고 질타했다. 그는 금융위기설이 한창 퍼질 당시 금융위가 파산 직전의 리먼 브라더스 인수 협상에만 주목하고 있었다는 점을 대표적인 실책 사례로 꼽았다. 초선 모임인 ‘민본21’ 간사인 김성식 의원도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은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권이 제한돼 있어 은행 부실 등 실태파악이 힘든 측면이 있다”며 “반면, 감독권이 있는 금융위는 예방 기능이나 선제적 대응을 제대로 못한 측면이 크다”고 지적했다. 예방 기능뿐만 아니라, 금융위기가 실물 경기로 전이되는 과정에서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일부 의원들은 은행들에 금융위의 영(令)이 서지 않으니까 대통령이 직접 나서 은행들의 중소기업 대출을 독려하는 것 아니냐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다. 특히,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예전에 쓰던 ‘낫과 망치’를 준비하고 있다”는 전 금융위원장의 최근 발언은 신뢰를 떨어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보고 있다. 이 발언 이후 금융주가 폭락하자 여권 내부에선 전 위원장에 대한 비판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한 의원은 “금융위원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더니, 이제는 말만 하면 사고를 친다”고 꼬집었다. 지도부 일각에서조차 개각 때 경질 1순위가 전 위원장이라고 지목할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