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단에 젊은 피의 수혈이 이루어지고 있다. 소설보다도 시가 그렇다. 소설계에서는 20~30대의 정이현·이기호·박민규·백영옥 등 젊은 작가들이 활발한 작품활동으로 대중과 교감하고 있지만, 필력이 오래된 기성층의 활약이 돋보인다. ‘하악하악’ ‘개밥바라기별’ 등의 작품으로 새파랗게 어린 네티즌들과 공감대를 아우르고 있는 이외수·황석영 등 대중적 스타 작가들이 그러하다. 하지만 한국 시단에는 오랫동안 씨가 마른 듯했던 10대 시인이 눈에 띄기 시작하면서 고무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 노지연·한지이 등 시문학잡지 공모전 당선 시 전문 계간지 <시인세계> 2009년 봄호에는 고등학생의 등단이 돋보였다. <시인세계>가 주관한 제13회 신인작품 공모에 고등학교 2학년에 불과한 노지연 양(17. 고양예고)이 하여진 씨(49)와 어깨를 나란히 당선된 것이다. 등단작은 ‘세상의 모든 저녁’을 포함한 12편의 시이다. “당신의 신전 속에는 구름이 구워지는 상점이 있지/나는 따끈한 달과 바람을 넣고 달콤한 구름을 만들 거야/당신의 신전이 모든 어둠을 어둑어둑 집어먹기 전에”로 시작되는 노 양의 시는 심사위원의 찬사 어린 격려를 받았다. 공모작을 심사한 김종해 시인은 “상상력의 공간이 넓고 언어운용이 활달하다”며 “우주와 천체의 움직임을 사람의 미각과 결합시켜 저녁 식탁 위에 먹음직스럽게 올려놓은 이 시인의 상상력은 믿을 만하다”고 평가했다. 문인수 시인은 특히 “잘 익은 달을 허공에 깨뜨려 맛을 보는 재기 넘치는 발랄함과 무한한 가능성을 샀다”고 평가했다. 노 양이 당선된 지 보름 만인 2월 18일에 또 10대 문학상 당선자가 나타났다. 한지이 양(16·안양예고 문예창작2)이 서울디지털대와 계간 <시작>, 월간 <에세이 플러스>가 공동주최한 제3회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에 당선된 것이다. 한 양의 이번 당선작은 “라린코나다, 바람의 분진 같은 사내 몇몇이/ 하루종일 동굴 천장에 매달려 있다./ 조도를 낮추며 새어들어오는 뙤약볕, 때때로/ 바람은 예고도 없이 굴 속에 침입한다”로 시작하는 ‘골드러시’ 외 4편이다.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문학평론가 유성호 씨는 “시적 언어의 활력과 가능성을 풍부하게 내장하고 있다. 감각적 구체성과 감각적 체험에서 비롯된 시적 실감이 돋보였다”고 한 양의 시를 평가했다. 서울디지털대 오봉옥 교수는 “최종심에는 몇 편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고심하게 마련인데, 이번의 경우는 예외였다”고 전했다. ■ “통상 20대에 작품 시작…10대 등단은 특별” 지난 2006년에는 이혜미 양(21. 건국대 국어국문과)이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등단한 적이 있다. 당시 만 18세였던 이 양은 중앙일보에서 주최한 ‘2006 중앙신인문학상’ 시 부문에 출품한 산문시 ‘침몰하는 저녁’이 당선됐다. 10대가 시인으로 등단하는 사례는 실로 기성 문단에 큰 충격과 기대를 한꺼번에 몰고 왔다. 청소년 시인의 입문은 한국 시사(詩史) 60년 만의 기록이다. 처음으로 10대에 등단한 시인은 진주농림학교에 다니다가 1949년에 17세로 등단한 이형기 시인(2005년 작고)뿐이다. 신춘문예 당선의 최연소 기록 보유자로 1925년 14세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가작 입선했던 아동문학가 윤석중 씨와 18세에 소설가로 데뷔한 황석영 씨와 최인호 씨도 시인은 아니었다. 김종해 시인은 “가장 바람직한 등단시기는 20대 초반이고, 또 대개 그 나이에 등단한다. 윤동주와 김소월 등 명작을 남긴 시인들도 20대에 데뷔하여 현대시사를 발전시켜 왔다”며 “이번에 당선된 고등학생들은 특별한 예외이고, 10대에 등단한 문인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젊은 시인들이 등단해서 우리 문학을 발전시키는 것이 이상적”이라며 10대에 거는 기대를 표현했다. 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인 강은교 시인도 “문학 종사자가 줄고 연령대도 높아지는 추세에서 10대 시인이 배출된 사례는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고무적인 일”이라며 “문학정신의 맥이 이어지는 차원에서 훌륭한 기량을 갖춘 후배가 배출된 것은 선배로서 감사한 일”이라고 말했다. ■ 기교·리듬감에 예민한 감성이 특징 기성 작가들은 10대 작가들의 특징으로 감각적인 기교와 발랄한 리듬감과 언어사용 등을 꼽았다. 먼저, 10대는 시인의 때묻지 않은 예민한 감성을 갖추고 있다. 감성은 시작(詩作) 활동의 아킬레스건과 같다. 강은교 시인은 “젊은 시인들은 고연령층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감수성을 갖고 있다”며 “발랄하면서도 절제된 언어와 세련된 리듬감 등이 어린 시인들의 가능성이라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문인수 시인은 “10대 작가들은 시작의 기교와 능력이 뛰어나다. 사물을 색다르게 보는 관찰과 세밀한 묘사에 능하다”고 설명했다. 문 시인은 노지연 양의 시를 예로 들며 “달과 구름 과자에 대한 묘사는 억지로 갖다 맞춘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구사력을 보인다”고 말했다. 김종해 시인도 “감성이 예민한 시기라 문학을 하기에 적합하다”고 말했다. 10대가 지닌 예민한 감성에 현대의 멀티미디어가 쏟아내는 다양한 이미지와 정보가 결합돼 뛰어난 실력을 배양할 만한 토대가 되고 있다. 각종 책과 잡지 등 기존 매체를 비롯해, 현란한 영상을 내뿜는 텔레비전과 컴퓨터 기반의 멀티미디어, 인터넷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정보를 자유자재로 가공하고 다룰 줄 아는 10대들은 표현 기교 면에서도 뛰어나다. 이처럼 뛰어난 실력의 어린 시인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으로 매체의 발달이 기여한 바가 크다. ■ 과도한 인터넷 환경 노출은 독(毒)일 수도 하지만, 기성 시인들은 발달된 현대 매체가 창작에는 오히려 독이 될 가능성을 충고하기도 한다. 감각에만 치우친 나머지, 본질적인 내용에 대한 성찰과 사상이 결여된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제기됐다. 강은교 시인은 “최근 인터넷을 기반으로 청소년들에 의해 창작되고 있는 통속소설들은 본격문학이 되기에는 문제가 있다”며 “현재의 인터넷 환경은 사고를 감각에만 치중하도록 길들일 수 있다”고 경계했다. 이어 “피상적 감상과 고민에서 나온 문학은 세계화될 수 없다”며 “사상에 기반한 문학이 나와야 세계의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배울 점’이 생긴다. 시문학에는 그런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문인수 시인은 “인터넷이나 대중잡지는 막대사탕과 같아서 무언가를 배우기에는 부적절한 교재”라고 단언했다. 문 시인은 “기교는 훈련으로 비슷하게 따라갈 수 있지만, 정신적 깊이 등 본질적인 요소들은 흉내낼 수 없다”며 젊은 문학인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배우거나 모방하는 풍조에 대해 충고했다. 지학(志學)의 나이에 등단길에 오른 시인들은 전도가 유망하다. 일찍 작품활동을 시작한 만큼 출발점이 앞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성경적 진리는 시작(詩作) 활동에서도 통한다. 문 시인은 “어린 나이에 글을 잘 쓰던 친구들이 20대 중·후반 들어 흐지부지된 사례를 여러 번 접했다”고 말했다. 현재의 영광과 성과에 만족하지 말고 부단한 자기성찰과 공부를 해야 한다고 시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조언한다. 등단은 ‘피니시 테이프’가 아니라 ‘출발 신호탄’이다.
“시 쓰고 사색하는 게 공부…예전처럼 공부하고 싶어요” [토막 인터뷰]<시인세계> 신인작품 공모 당선자, 고양예고 노지연 양 당선 소식을 접했을 때 느낌은 어땠나요? “처음에는 기뻤지만, 이후에는 걱정이 더 커졌어요. 습작을 하던 시절에는 ‘혼자만의 소통’이었다면, 등단 후 제 시를 보는 시선이 많아졌다고 생각하니 부담이 커진 것 같아요. 제 작품이 대중에 공개된다고 생각하면 더 책임이 느껴져요.” 노 양은 배용재 시인에게서 수학하고 있다고 알고 있어요. 배 작가가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네요 “배용재 선생님은 학교에서 문예창작과를 담당하고 있는 선생님이에요. 외부 강사로 가르침을 주시는데, 제게 가장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죠. 선생님은 제가 시를 보는 눈을 키워주셨고, 정신적으로도 많은 지지가 돼주셨어요. 선생님이 하시는 충고와 질책에 많은 가르침을 받고 있어요. 이번 공모전에서 여러 작품 중 12편을 선정하는 데에도 선생님의 조언이 컸어요. 문예창작과이지만 주변에 시를 쓰는 친구들이 많지 않아요. 학급에서 시를 전공하는 친구가 7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소설에 집중하고 있어요.” 왜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어렵잖아요. 시라면 짧은 단어 안에 많은 의미를 응축시켜야 하고, 이질감을 주는 단어들이 많이 쓰이잖아요. 그래도 제 당선소식을 들었을 때 모든 친구들이 축하해주었어요.” 중학교 3학년 시절부터 습작을 시작했다고 알고 있는데,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뭐죠? “나중에 글 쓰는 직업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에 입학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부모님도 제가 어렸을 때부터 결정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셔서 말리거나 간섭하지 않으셨어요.” 10대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여물기 전에 얻은 작가 타이틀로 오히려 자만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는데…. “저 스스로 느끼기에는 아직은 수준에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타이틀을 가질 만한 자격이 있느냐 하는 회의가 항상 있는 거예요. 어린 나이에만 ‘반짝’주목을 받는 데 머물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시인이라는 호칭에 합당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 되도록 열심히 매진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어요. 더 열정을 품어야겠죠.”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예전에 지었던 시보다는 가장 최근에 쓴 작품에 애착이 많이 가요. 매번 작품을 쓸 때마다 하나씩 더 배워 나간다는 생각이 들어서인 듯해요. 처음 ‘세상의 모든 저녁’을 완성했을 때에는 이 작품에 가장 애착이 많이 갔어요. 그러다, 다른 작품도 쓰면서 정이 많이 들었는데, ‘이게 좋았어’할 정도로 마음이 쏠린 작품은 오히려 ‘모던 타임즈’였어요. ‘달의 뒤편’은 30분 만에 썼는데, 완성하고 뿌듯한 마음이 들었어요.” 세상의 모든 저녁이라는 시에 ‘복제’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던데, 무슨 의미죠? “세상의 모든 저녁이 있다면 과연 어떤 그림일까 상상하고 쓴 단어인데요.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저녁이 아닌, 국경도 없고 우주적인 저녁을 표현하고 싶었어요.그 정도로 알아두시면 괜찮겠네요.” 때 아닌 유명세가 오히려 시 공부에 방해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솔직히 말해, (등단 이후) 페이스가 어그러진 게 사실이에요. 아직 제대로 성장한 것도 아닌데, 이른 주목을 받다 보니 공부에 집중하기가 힘든 상황이에요. 예전처럼(시인세계 등단 이전) 치열하게 공부했으면 좋겠어요.” 예전에는 어떻게 공부를 했다는 말인가요? “보통 인문계 학생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개념은 밤새 커피로 졸음을 쫓아가며 문제집을 정리하는 공부잖아요. 하지만 저는 열심히 사색하고, 시를 쓰고, 백일장에도 나가는 등 이런저런 일들이 공부라고 볼 수 있겠죠. 겉으로 보면 노는 것처럼 보이나 봐요. 저는 나름 심오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주변에서는(특히 부모님) ‘쟨 대체 뭐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일 때가 많아요. 그래도 백일장에서 입상을 하면 ‘그래도 뭔가 하긴 하나보다’하는 반응이에요.” 향후 진로에 대해 말해주세요. “일단은 대학에서 더 넓게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인문계열을 지망하고 있어요. 굳이 문예창작학과가 아니어도 상관은 없을 것 같아요. 지식도 많이 필요하고 기교도 중요하잖아요. 무엇보다 다양한 생각을 담아내는 시를 쓰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