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미국에서 촉발돼 우리나라까지 뒤흔든 경기불황의 충격파가 3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국제적 파생상품·환율·유가파동, 국내 주택시장 미분양, 국가 및 기업의 유동성 위기 등 미국에서 불어온 경제충격은 제법 빠르게 벗어나는가 싶더니, 이제는 북한 핵실험,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등 정치적 이슈들이 한국경제 회복의 발목을 잡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1998년 IMF 사태 당시 전국에 노숙자들을 양산하고 중산층을 무너뜨려 가정의 붕괴를 가져왔던 인적 구조조정의 악몽을 기억하는 정부와 재계는 기업 구조조정의 방법 중 대량 정리해고를 통한 기업 건전화 방안은 자제하고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정부·재계·노동계 등 국민 모두가 다 함께 고통을 분담해야 하며, 결코 10년 전의 대량해고 사태가 재발돼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이명박 대통령의 일자리 나누기를 위한 대국민 호소 및 재계를 향한 고용증대 당부 등도 이 같은 차원이라는 설명이다. 이 같은 정부의 노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잡코리아·잡링크 등 온라인 리크루팅 사이트에는 최근 구인·구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잡코리아의 한 관계자는 자사 사이트에 게재된 구인정보가 3월과 4월 중 폭증한 바 있다고 말했을 정도. 하지만 전체적 관점에서 기업 간부 및 임원급들의 실직 및 해고 노동자들의 숫자가 갈수록 늘고 있다. ■야권 “정부, 고용유연화 정책 추진하나” 실제로 한 통계에 따르면, 리크루팅 업체들에 올라온 구인광고들의 성향을 조사해 본 결과, 삼성·현대·LG·SK·금호·토지공사·주택공사·은행권 등 주요 기업들의 정규직 채용 건수는 점차 줄어든 반면, 학습지 교사, 아웃바운드 영업사원, 건설 잡부 등 일용직이나 비정규직 등의 고용형태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잡코리아의 한 관계자는 “최근 정규직 구인은 줄어들고 비정규직 혹은 특수고용직이 늘어나고 있다”며 “정규직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경력관리 등을 위해서 어느 정도 불리한 고용조건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직업군에 들어가 능력을 키우고 이를 증명해 보이는 것이 현명하다”고 조언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정규직 신입사원을 대량 채용할 경우 현재의 대외적 경영위기 환경에서는 감당하기 힘들다”며 “노조와 경영진 모두 임금삭감 등 고통분담에 나서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와중에 정규직 확대로 새로운 부담을 떠안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경제정의실천연합 등 시민단체 및 민주당·민주노동당 등 정치권을 포함한 재야권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주요 대선공약 중 하나가 바로 노동시장 유연화였다”며 “정부는 고용창출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현재의 고용시장 동향을 살펴보면 정부가 경제위기 및 인적 구조조정을 틈타 노조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노동 유연화 정책을 추진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기업들 임원해고 ‘우수수’ 그러나 어쨌든 현 정권은 과거 IMF 당시처럼 대다수의 중산층 가장이 거리에 노숙자로 쏟아져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일용직 아르바이트일지라도 기업들의 구인활동이 꾸준히 지속되고 있는 것은 사실. 하지만 정부가 아무리 해고 등 고용불안 사태를 막는다 하더라도 한때 국가파산론까지 거론될 정도로 심각한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의 경제위기 속에서 실시되는 인적 구조조정이 지난 IMF 시절의 그것과 다른 점 중 하나가 바로 형평성이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실시된 구조조정을 살펴보면, 정부 차원에서 강제로 이뤄진 빅딜이나 기타 특수한 사정에 의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직위가 낮은 노동자 신분일수록 먼저 쳐냈다. 생산공장 노동자, 사무직 근로자, 간부, 임원 순이었고, 성별로는 여성이 남성보다 먼저 구조조정됐다. 한마디로 사내에서 권력 없는 사람이 먼저 희생됐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금융감독원에 보고되는 분기 보고서 및 연말 보고서 등을 살펴본 결과, 삼성전자·현대자동차·포스코·LG전자·현대중공업 등 국내 빅5 대기업의 임원 중 지난해 3분기 이후 직장을 떠난 임원은 204명 선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빈자리는 고작 153석만 신규 임원으로 채워졌다. 결국 5대 그룹의 총 임원 수가 6개월 새 51명이 줄어든 셈이다. 이 중 삼성전자는 120명의 임원이 퇴사한 빈자리에 60여 명의 신규 임원만이 선임됐다. 그 외 포스코의 임원진은 지난해 3분기에 총 57명이었으나, 지난 1분기에는 54명으로 3명이 줄어들었다. 현대자동차의 지난 1분기 기준 총 임원 수도 지난해 3분기 196명보다 8명 적은 188명을 기록했다. 이들 5대 기업 중 유일하게 임원을 충원한 곳은 LG전자. 동사의 경우 지난해 3분기보다 오히려 20명 늘어났다. 현대중공업은 임원 수에서 변동이 없었다. 특히 삼성전자의 경우 임원들의 연봉을 무려 20% 가량 삭감했다. 현대·기아차그룹과 포스코도 지난달 임원 급여를 무려 10%나 삭감했다.
이와 관련, A사의 한 임원은 “우리가 직원들보다 급여가 많기는 하지만 현재의 경기불황과 사교육 열풍 등을 감안하면 10% 이상씩 삭감당하는 것은 적지 않은 타격”이라고 말했다. B사 임원은 “회사의 진퇴를 결정하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상무급 이상 임원의 위치는 경기불황 및 구조조정의 시기에 느끼는 업무적 중압감과 부담이 직원들에 비할 바 아니다”며 “회사의 생존을 책임지기 위해 더 열심히 더 발벗고 뛸 것을 요구받으면서도 오히려 임금 및 경영여건 등 업무환경은 더욱 안 좋아지고 있다”고 푸념했다. A사의 임원 급여 삭감을 주도했던 한 관계자는 “임원급 급여 삭감으로 내 연봉도 팍 줄어들었다”며 “하지만 어차피 인적 구조조정이나 급여 삭감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경영진의 솔선수범 없이 밀어붙였다가는 노조의 강력한 저항 등으로 더 큰 문제를 야기시킬 수도 있다”고 추진 배경을 밝혔다. ■쌍용차와 대우차 문제, 고용불안요소 국가적 경제위기 속에서 고용시장 불안요소를 꼽으라면 쌍용자동차 사태가 가장 1순위일 것이다. 쌍용자동차는 2005년에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중국의 상하이자동차로 넘어간 이후, 현재는 껍데기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산업은행·우리은행 등 쌍용자동차의 대주주단은 노조와의 접촉을 통해 인적 구조조정을 포함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조건으로 회생을 약속했다. 대주단에서 요구한 인적 구조조정은 대략 2000여 명 선. 그러나 쌍용자동차 노조는 지난 2006년에 인수해 간 상하이자동차의 장난질로 생긴 부실을 노동자들만 떠안을 수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산업은행은 쌍용자동차에게 대규모 구조조정 없이는 지원이 불가함을 통보한 상태여서, 쌍용자동차 파산법인은 이대로 도산하느냐 혹은 대량해고를 통해 금융권의 지원을 얻어 회생을 모색하느냐를 두고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사실상 대량해고를 강요한 상태이다. 이 때문에 쌍용자동차의 노동3권을 위임받은 민주노총 산하 전국금속노조는 5월 22일 대의원급 간부들이 쌍용자동차 평택본부에 집결해 농성을 벌였다. 하지만 쌍용차는 5월 25일까지 희망퇴직 신청을 받아 1000여 명의 명예퇴직자를 확보한 상태이다. ■금융권의 구조조정 시작 이 같은 고용불안 사태는 은행권도 마찬가지다. 은행권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금까지 전국 은행 지점망 중 200여 개 점포가 폐업 혹은 통합 등 구조조정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은행은 지난 4월 기준 점포수가 1193개로 지난해 12월 1245개에 비해 52개가 줄어들었다. 신한은행은 기업금융점포와 소매금융점포가 별도로 운용되던 것을 한 곳으로 통합하는 방식의 구조조정을 시작하여 같은 기간 103개의 점포가 감소해서 923개의 점포만이 남아 있다. 우리은행은 지난 2월 인천국제공항의 지점을 폐쇄하고 수익성이 낮은 300여 곳의 ATM 단말기를 철수하는 등 수익성 위주의 구조조정을 시작하여 같은 기간 896개에서 887개로 9개의 점포가 줄어들었다. 하나은행은 고비용 점포의 폐쇄 방침을 기준으로 구조조정을 벌여 같은 기간 664개에서 644개로 20개 점포를 줄였다. 이에 따라 창구 여직원 및 지점장들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실직하게 됐다. 또 보험업계도 최근 한화그룹 소속 보험사를 중심으로 인적 구조조정을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보험업계의 인적 구조조정은 회사의 중장기 발전전략의 일환으로 행해지는 일종의 패키지 형식을 띠고 있다. 최근 한화손해보험과 제일화재가 권고사직을 통한 인적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보험업게에 따르면, 이 두 회사는 오는 7월 경 대등한 관계의 합병을 통해 한화그룹 계열사로 안착될 예정이다. 이와 관련, 한화손보의 한 관계자는 “양사의 합병은 한쪽이 흡수하는 형태가 아닌 양사 모두가 사라지고 새로운 한화손해보험이 탄생하는 셈”이라며 “대등한 관계에서의 합병 이후 출신 간 헤게모니 다툼 등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미리 해고자 신청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사실 아르바이트·일당잡부·비정규직이나마 꾸준히 구인이 유지되고 최근의 대량해고 공포에서 무사히 지나간 것도 이명박 대통령이 일자리 나누기를 강조하면서 노숙자 양산을 정부 차원에서 줄인데 따른 결과이다. 하지만 최근 소식통에 따르면, 정부가 내부적으로 잡셰어링에 대한 의지를 접은 것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됐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너무 열심히 쫓아다닐 필요는 없다”는 당부의 말을 하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