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은 수사 중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이라는 사상 초유의 전직 대통령 서거 소식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지만, 그 동안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표적수사’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명박 대통령의 5년지기 친구로서 ‘살아 있는 권력’ 세중나모 천신일 회장 등에 대한 수사에 더욱 박차를 가할 전망이다. 5월 23일 검찰의 주장에 따르면, 올 초부터 정·관가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검사장 이인규)의 ‘박연차 리스트’ 수사는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정관계 및 법조계와 경찰 간부 등의 불법자금 수수의혹, 노무현 전 대통령 가족 및 측근의 불법자금 수수의혹, ‘박연차 구명 로비’로 일컫는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 등이 그것이다. 수사 초기에는 태광실업 박연차 전 회장의 10년차 여비서가 박 전 회장의 일정 등을 꼼꼼히 기록한 ‘다이어리’가 위력을 발휘한 덕분에 불법자금을 받은 정관계 인사에 대한 수사가 주류를 이루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 4월 초에 홍콩 사법당국이 수사팀의 요청에 따라 박 전 회장의 홍콩 법인 APC의 비자금 계좌내역을 보내오면서 수사 방향은 노 전 대통령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고, 결국 같은 달 11일에 영부인 중에선 두 번째로 권양숙 여사가 검찰에 비공개로 소환돼 조사를 받았으며, 30일에는 노 전 대통령이 세인의 관심 속에 대검찰청 청사에 발을 들여놓기에 이른다. 그로부터 23일이 지나 노 전 대통령의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자신하던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긴급 검사장급 회의를 개최하고 김경한 법무장관의 입을 빌어 사실상 ‘수사종료’를 선언하는 등 역풍을 차단하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전직 대통령의 개인비리를 밝히기 위해 아내·아들·딸·사위 등 온 가족의 흠을 들춰낸 검찰의 무리한 수사가 노 전 대통령을 자살로 내몰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천신일 등 ‘살아 있는 권력’ 수사 박차 가할 듯 따라서 검찰은 노 전 대통령 소환 후 재개한 정관계 및 법조계, 경찰 간부 등의 불법자금 수수의혹과 새롭게 제기된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에 대해 고삐를 당길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현 정권 실세로 불리는 천 회장에 대해 증여세 등 세금 85억여 원을 포탈한 혐의, 지난해 7∼11월 세무조사를 받던 박 전 회장을 위해 ‘구명 로비’에 나선 대가로 7억 원을 받은 혐의, 세중나모인터렉티브 등을 합병하여 세중나모여행사를 만드는 과정과 13개 계열사를 거느리는 과정에서 주가를 조작한 혐의 등 조세포탈 및 알선수재,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를 입증하고 재판과정에서 공소를 유지하는데 공을 들일 전망이다. 아울러 박 전 회장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난 민유태 고검장, 이택순 전 경찰청장 등 이미 조사를 받은 인사를 포함, 추가로 소환될 정관계 및 법조계 인사와 검찰 간부에 대한 수사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검찰은 박 전 회장에게서 불법자금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경남 진해 지역구의 한나라당 김학송 의원 등 정관계 인사 2∼3명에 대한 조사를 곧 시작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검찰 수사에서 박 전 회장의 진술이 강력한 증거가 돼 왔지만,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박 전 회장이 상당한 심리적 충격을 받아 향후 수사와 재판에서 돌연 입을 닫아버릴 개연성이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어 박 전 회장의 입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박 전 회장은 세종증권 인수 비리로 지난해 12월 구속기소된 이후 대검 중수부의 ‘박연차 게이트’ 수사를 떠받치는 주요 축이 돼 왔기 때문이다. 박 전 회장은 먼저 나서서 누구에게 돈을 줬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검찰이 정황증거를 수집해 들이밀 때는 비교적 상세하게 돈을 건넨 시점과 액수 등을 진술해 왔으며, 상대방이 부인해 대질 조사가 이뤄질 때도 돈을 전달한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억해내 ‘박 검사’라는 별칭마저 얻기도 했다.
특히 박 전 회장은 한 번 입 밖에, 낸 말은 번복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검찰도 박 전 회장의 진술에 꽤 신빙성이 있음을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따라서 ‘박연차 로비 의혹’과 관련된 모든 재판에 박 전 회장이 나서야 하기 때문에 검찰은 그의 건강과 함께 정확한 기억력을 기대해야 하는 형편이지만, 노 전 대통령이 신병처리를 앞두고 투신자살을 선택함에 따라, 박 전 회장이 심적 충격의 여파로 심경 변화를 일으켜 입에 자물쇠를 채울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점에서 수사와 공소유지를 겸하는 수사팀을 긴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검찰, 박연차 ‘입 닫을까’ 전전긍긍 실제로 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박 전 회장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여론이 악화된 상황에서 ‘편파수사’에 대한 의혹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천 회장 수사와 함께 정관계 및 법조계, 경찰 간부 등의 불법자금 수수의혹 수사를 중단할 수 없는 상황이라 시기만 장례 이후로 조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검찰 고위 관계자들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한 여론 역풍으로 인해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가운데, 특히 서거 당일부터 꾸준히 제기됐던 ‘검찰 책임론’이 하루가 다르게 확산되고 있으며, 심지어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사퇴론으로까지 확장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친박연대는 “검찰의 무리한 수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서거에 이르게 했다”며 임채진 검찰총장의 퇴진을 요구했으며, 대검찰청 홈페이지에도 임 총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글이 연이어 올라오고 있다. 심지어 법조계 안팎에서도 법무부나 검찰 지휘부가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여기에 용산참사 당시 사퇴를 통해 여론 역풍을 막으려 시도했던 김석기 전 경찰청장의 예를 들며 임 총장의 사퇴로 검찰 신뢰의 돌파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추가되고 있지만, 그 시기에 대해서는 노 전 대통령 서거 파문이 가라앉고 나머지 수사가 모두 마무리된 뒤가 적당할 것이라는 의견과 지금 즉시 수사팀이 교체돼야 한다는 의견이 상충하고 있다. 그러나 검찰은 지난 몇 달 동안 박 전 회장의 로비 의혹 수사와 노 전 대통령 수사와 관련하여 휴일에도 기자 브리핑을 빼지 않고 열어 왔던 것에 비해, 서거 이후 간단한 입장을 표명한 뒤로 공식적인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더구나 참여정부 시절 노 전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마지막 총장이었던 임채진 검찰총장은 노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접한 직후 즉시 사표를 제출했으나 김경한 법무부 장관은 사태수습이 우선이라며 반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 총장은 자신의 직할 수사부서인 대검 중수부를 직접 지휘하며 노 전 대통령의 친형 건평 씨를 구속하고 박 전 회장 등 그의 측근 인사들을 줄줄이 구치소로 보냈으며, 계속된 수사는 마침내 자신의 임명권자였던 노 전 대통령을 정조준하는 양상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급기야 중수부는 노 전 대통령을 ‘600만 달러 포괄적 뇌물 수수’ 혐의 피의자로 대검 청사로 공개 소환하여 조사한 것이다. ■임채진 검찰총장, 인간적 고뇌에서 많은 고심 이 같은 인간적 고뇌에 고심하던 임 총장은 25일 오전 11시 20분께 외부에 전혀 알리지 않은 채 서울역사박물관에 마련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전격적으로 찾아 침묵 속에 조문하면서 시종일관 비통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평소 지나칠 정도로 좌고우면한다는 평을 들어 온 임 총장은 두달 넘게 진행된 수사기간 동안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에 목덜미가 흥건해질 정도로 흘린 땀 때문에 수차례 잠에서 깰 정도로 극도의 신경을 썼다는 측근들의 말도 전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노 전 대통령의 급작스런 비보로 인해, 검사생활 27년 동안 ‘절제와 품격’을 입버릇처럼 강조해 온 임 총장으로서는 인간적 고뇌와 번민을 더욱 키웠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평소 그를 잘 아는 지인들의 관측이다. 한편, 임 총장의 지휘를 받으면서 수사를 담당했던 대검 중수부의 ‘운명’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는 가운데, ‘잔인한 4월’을 예고하며 이번 수사를 이끌었던 이인규 중수부장과 홍만표 수사기획관 등 수사팀도 대폭 물갈이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대검 중수부는 전직 대통령이나 대기업 총수 등에 대한 수사 때면 으레 등장하는 검찰의 핵심 부서로서, 검찰총장의 지휘를 직접 받아 권력형 비리 사건을 처리하는 검찰 내 최고의 수사팀으로서, 현재는 이인규 검사장이 이끌고 있다. 이 검사장은 일명 ‘박연차 리스트’에 대한 본격 수사에 착수하면서 ‘잔인한 4월’을 예고했으며, 그달 마지막 날에 노 전 대통령을 전격 소환하면서 빈말이 아니었음을 입증했다. 이 검사장은 SK 비자금 사건, 불법 대선자금 수사 등을 거치면서 ‘기업의 저승사자’로 불렸으며, 꼼꼼하면서도 강단 있는 수사가 정평이 나 있다. 그리고 이 검사장을 도와 수사진을 사실상 지휘한 홍만표 수사기획관도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수사,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현철 씨가 연루됐던 한보 사건 등 대형 사건으로 잔뼈가 굵은 인물로서, 이번에 대언론창구를 맡아 수사 진행 상황을 수시로 브리핑하는 등 이번 수사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또 노 전 대통령을 직접 조사한 우병우 중앙수사1과장 등 중앙수사부를 구성하는 검사·수사관은 모두 일명 ‘특수통’으로 알려진 알짜배기 검사들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직접 돈을 받은 증거도 밝혀지지 않은 노 전 대통령 한 명의 포괄적 뇌물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노 전 대통령의 가족과 측근들의 흠결을 들춰내 ‘먼지떨이식’으로 수사하고 그 수사 내용을 흘리는가 하면, 노 전 대통령을 소환조사한 뒤에도 20여 일간 신병처리를 미뤄 심적인 부담을 키움으로써 결과적으로 고인이 극단의 선택을 하도록 만든 게 아니냐는 오명을 쓰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검찰은 국민적인 애도 분위기에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노 전 대통령 소환조사 때 최대한 예우를했고 사법처리를 미룰 수밖에 없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면서도 책임론에는 ‘침묵 모드’로 일관하고 있어 향후 어떻게 처리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