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농업협동조합 조직과 농협중앙회는 한국 농협의 최후 보루로 인식되고 있다. 현재 한국 농업은 쌀시장 개방, 한·EU FTA, 한·미 FTA 등 피치 못할 시장개방으로 인해 파산 직전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벼랑 끝에 몰려 있다. 그렇다고 수출 중심의 우리 경제를 감안할 때 농업이 받을 타격을 인지하면서도 시장을 개방하지 않을 수도 없는 현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농협은 한국 농업을 수호해줄 수 있는 적임자로 지목되고 있다. 이 때문에 정치권·농민단체·학계 등은 농협중앙회와 단위 농업협동조합들이 시장개방 후 세계적 농산물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역량 확보를 목표로 강도 높은 개혁을 주문하고 있다. 하지만 개혁을 외면하고 기득권을 그냥 지키고 싶어 하는 농협중앙회의 입장이 만만치 않다. 농협 개혁의 대전제 농협은 개혁돼야 한다. 그리고 개혁을 통해 국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이 점에 정치권은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방법과 속도 면에서는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상대적으로 농협 개혁에 적극성을 띠고 있는 곳은 민주당이다. 국회 농수산식품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민주당 이낙연 의원은 지난달 29일 “농협이 정부의 외과수술(정부·정치권 주도의 강제적 개혁)을 피하려면 스스로 개혁에 나서라”고 경고음을 보냈다. 농협중앙회가 세워진 지 30년이 되는 이날 기념식장에서 던진 화두다. 이 위원장은 “지금 이 상태로 변화가 없을 때 수년 후 과연 농협이 존속할 수 있을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꾸짖었다. 이와 관련, 민주당의 농협 개혁에 힘을 쏟고 있는 김영록 의원의 김명노 보좌관은 “농협은 농민을 위해, 농협중앙회는 지역 단위농협을 위해 존재해야 함에도, 현재의 농협중앙회는 농민을 수익원으로 삼고 단위 농협과 경쟁관계에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 같은 구조를 본래의 취지에 맞게 바로 잡는 것이 농협 개혁”이라고 말했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농협중앙회의 금융사업 부문과 유통사업 부문 분리는 농협 개혁의 첫 번째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 정 보좌관은 농협 개혁은 경제사업 부문 중 단위농협의 생산물 유통 부문이 세계적 경쟁력과 수익성을 갖출 때 완성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 농협중앙회의 가장 큰 문제는 금융사업, 즉 돈놀이 분야가 비대하게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정 보좌관은 “전국 농협중앙회 조직의 사업 부문 중 조합원인 농민들을 직접 도울 수 있는 경제사업의 비중이 10%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편중된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농협중앙회는 “금융 업무를 통해 농업인들에게 타 금융권보다 더 유리한 조건으로 자금을 융자해주는 것도 농업을 돕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농민들에 대한 농협의 대출·보험 등 금융 조건은 타 금융사에 비해 크게 유리하지 않다. 또 정 보좌관은 농협중앙회의 경제사업에 대해서도 문제점을 지적한다. 농협중앙회가 운영하는 대형마트인 하나로마트가 도시뿐 아니라 농촌 지역에도 들어와 단위농협의 시장을 빼앗는 부분도 있다는 설명이다. 정 보좌관은 “현재의 농협중앙회는 금융사업이든 경제사업이든 단위농협의 경쟁 대상으로서 농민에게 수익과 명분을 주는 토대로 삼는 일종의 기업형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과 관련, 농협중앙회 측은 “어느 정도의 비판은 수용하고 자성해야 할 부분도 있다. 개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신·경분리에 대한 마스터플랜도 짜고 있다. 하지만 농협중앙회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며 크게 반발했다. 농협중앙회의 한 관계자는 “농협중앙회는 한국 농업의 보루이자 한국의 순박한 농민들을 위한 조직”이라며 “지금까지 여러 문제들을 많이 노출시키기는 했지만 중앙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기본적으로 이 같은 점을 잊지 않고 있다”고 해명한다. 일부 고위 간부들의 비리, 금융사업 부문의 문제와 경제사업 중 극히 일부분에서 소수의 농민들과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점 등을 지적한다면 반론할 수 없지만, 농협중앙회의 의식과 사업구조 자체가 잘못됐다는 지적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농협중앙회도 개혁의 차원에서 신용사업과 경제사업 분리를 위한 마스터플랜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농협의 신경분리 마스터플랜 농협중앙회에서 제시한 신·경 분리 플랜은, 농협중앙회가 100% 출자하여 농협경제지주회사와 농협금융지주회를 만들어, 농협경제지주회사 산하에 하나로마트를 두고 또 단위농협의 농작물 유통을 위해 전국지회사와 권역단위 지회사를 둔다는 계획이다. 그리고 농협금융지주회사는 지급결제권을 가지고 있는 은행 부문과 기타 보험·증권·선물·자산운용 등 제2금융사업 부문을 분사해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앙회가 아닌 지역 단위농협에서 자체적으로 영위하는 금융사업인 상호금융을 현재 상호금융연합회에서 금융지주회사의 특별계정으로 편입시키자는 주장이 농협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 이 경우 농협금융지주회사로 묶여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의 통제를 받게 되며, 농협경제지주회사는 지식경제부와 공정거래위원회의 지도 감독을 받게 된다. 반면, 지역 단위농협은 여전히 농림수산식품부의 지도 감독하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민주당 김영록 의원의 김명노 보좌관은 “지주회사 체제라는 말은 결국 지역 농협과 농민들을 서포트하기보다는 이들을 상대로 본격적으로 돈벌이를 해보겠다는 발상”이라며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또 전국농민총연맹은 “농협중앙회가 개혁안이라고 제시한 신·경 분리안은 농민을 위한 경제사업은 회피하고 자신들의 돈벌이만 하겠다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농협이 제시한 안이 전체 자본 중에 신용사업에 14조1000억 원, 경제사업 분야에 5조7000억 원을 배분키로 한 점에 대한 지적이다. 이와 관련, 전국농민총연맹 회장은 “농협의 개혁은 농협을 다시 농민들에게 돌려주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한다”며 “농협중앙회 스스로를 살찌우는 방향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주장했다. 국회 농수산식품위원회 이낙연 위원장은 “농협이 동의하지 않는 농협 개혁안은 성립될 수 없지만, (개혁의 방향·시기·속도에 대해) 농협의 주장만 그대로 수용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정부·여당 오락가락 반응 그러면 현 정권과 정부·여당은 어떤 입장일까? 집권당인 한나라당과 당국인 농림수산식품부도 민주당과 농민단체들의 의견에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5월 농림수산식품부 장태평 장관은 “농협중앙회는 수십 년 간 기회가 있었음에도 스스로 변화를 주지 못했다”며 “정부는 (농협중앙회의 내부 반대와 관계없이) 당초 계획대로 사업구조 개편과 관련 농협법 개정안을 연내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또 “농협 개혁은 농협중앙회의 의견도 중요하지만 농협개혁위와의 협의를 통해 이뤄질 것”이라고도 밝힌 바 있다. 농협의 신·경 분리 개혁안과 관련하여 농협중앙회의 자체적 초안과 농협개혁위원회 안이 부딪칠 때도 장 장관은 “2012년부터 단계적으로 분리하자는 주장과 상호금융을 중앙회 특별계정으로 두자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며 “농협개혁위원회 안이 맞다”고 말했다. 어찌 보면 민주당과 농민단체보다 더 급진적이다. 이와 관련,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농협 개혁과 관련해서 정부는 물론 민주당과 농협개혁위·농민단체가 그같이 주장했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이달 들어 급격히 태도를 바꿨다. 장 장관은 “농협 사업구조 개편을 정부가 압박할 필요는 없다”며 농협 자율에 무게 중심을 두는가 하면, 한나라당 관계자도 “농협이 자체적 개혁을 위한 타임 플랜 작성에 들어갔다면 기다려주는 것이 원칙“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이처럼 기조가 바뀌게 된 것은 지난달 8일 농협법 공포안에 대한 공개 서명식 이후부터이다. 이날 서명식 이후 9일 농협법이 관보에 개재되면서 공식 발표됐다. 그런데 이날 농협 개혁과 관련하여 정부·국회·농협중앙회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와대에서 공개 서명을 한 후 갖은 티타임에서 나눈 이 대통령과 최원병 농협중앙회장의 대화가 정부와 여당의 농협 개혁에 대한 입장 변화를 일으키게 했다는 관측이다. 이날 이 대통령은 “이번 농협법 개정이 농협과 농민단체 중심으로 자율적으로 추진됐기 때문에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했다”며 “그것이 제대로 된 방향”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최원병 농협중앙회장은 “2단계 개혁작업도 농협이 중심이 돼서 국회와 정부를 설득하겠다”, “자율적 개혁을 하겠다”고 받았다. 이에 대해 정부와 여당은 농협이 알아서 개혁을 진행하도록 두고보자는 것이 대통령의 의중이라고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농협 개혁의 롤 모델은 선키스트 이와 관련, 전농·한농연 등 농민단체와 민주당·농협개혁위원회 등은 농협법 개정 등을 비롯한 농협 개혁의 성공 여부는 현재의 농협중앙회 사업들과 단위농협의 관계, 농협과 농민의 관계가 바람직하도록 바로잡혔는가를 기준으로 판단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국농민연맹 회장은 “농협중앙회는 농민들의 농산물을 제 값에 사서 유통시키는 경제사업을 중심으로 해야 하며, 금융사업은 이를 지원하기 위한 방편이 돼야 한다”며 “금융시장 개방, 개혁 난맥 등으로 굳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사업성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금융사업을 버리는 것이 농협의 취지에 맞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농협이 금융을 버리거나 축소하고 농민과 시민단체에서 원하는 대로 경제사업 위주로 재편될 경우 사업성 자체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농협중앙회의 한 관계자는 “경제사업만 가지고는 사업성이 없다”며 “지금도 경제사업에서 발생하는 적자를 신용사업의 흑자로 보전하고 있는데, 지역 농협과의 경쟁을 회피하고 또 아무런 대책 없이 경제사업의 비중을 늘릴 경우 적자가 누적될 수밖에 없다”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한·미, 한·EU FTA와 농산물 시장 완전 개방이 닥치게 되면 그때는 국제적 조약 때문에 농협의 적자를 재정에서 메꿔주지도 못한다. 결국 파산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 김명로 의원은 “미국의 썬키스트, 호주의 키위 등이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놨다. 선키스트는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의 오렌지 농장주들이 조합을 결성해서 만든 상호회사이다. 이곳은 지주들의 합의에 따라 캘리포니아산 오렌지에 대한 상표권과 100% 매입권을 가지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 음료수 제조업체에 캘리포니아산 오랜지를 팔기도 하고 오렌지 주스 등 가공식품을 생산하면서 수익을 극대화시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은 연말마다 주주배당 방식을 통해 각 농장주에게 환원된다. 결국 캘리포니아 지역의 오렌지 농장주들은 그냥 열심히 농사를 지어 맛있는 오렌지를 최대한 많이 생산해내면 제 값에 선키스트에 판매하면 된다. 이후 오렌지의 수급조절 및 판매망 확충, 마케팅 등은 선키스트에서 알아서 해결해준다. 또 농장주들은 선키스트가 제값에 오렌지를 구매한 후 더 비싼 값에 팔아서 벌어들인 수익도 나중에 배당 방식으로 받게 되니 나중을 걱정할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