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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대한민국 민주주의 대부, 민초들의 영원한 ‘인동초’

영욕으로 점철된 여든 다섯 역정을 회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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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32호 심원섭⁄ 2009.08.25 10:33:32

평생을 한국의 민주주의와 남북관계에 매달려왔던 후광(後光) 김대중 전 대통령이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향년 만 85세의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정치일생을 마감하고 서거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7월 13일 폐렴으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고 증세가 호전되어 7월 22일 일반병실로 옮겼으나, 불과 하루 만에 폐색전증이 발병하면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치료를 받아왔으며,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영면한 것이다. 1925년 전남 신안군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 하의도에서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 김운식 선생과 어머니 장수금 여사의 4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목포 북교초등학교와 5년제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목포일보 사장을 지냈으며, 민주당 대변인이던 63년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뒤 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리고 김 전 대통령은 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나섰으나 당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석패한 뒤, 87년·92년 대선에서 연거푸 낙선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으나, 97년 당시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돼 영욕이 함께 어우러진 삶을 살아왔다. 병고와 끊임없이 싸워온 말년의 DJ 특히 김 전 대통령은 수차례 사선을 넘나들면서 육체적으로도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 김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육신의 고통을 짊어지게 된 사건은 1971년 5월 24일 목포와 광주 사이에서 벌어진 의문의 교통사고이다. 8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전남 무안에서 지원유세를 하고 광주로 가던 중 대형 덤프트럭이 덮친 사고였다. 박정희 정권의 살해 기도 의혹이 강하게 일어났던 이 사고에서 그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왼쪽 다리에 고관절 장애를 입고 평생을 불편한 다리로 지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유신 이래 5년 반의 투옥, 3년여의 망명, 6년 반의 가택연금으로 신체의 자유마저 온전히 누릴 수 없었던 김 전 대통령은 80년 5.17사태를 주도한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까지 받기에 이른다. 이처럼 수차례 생사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김 전 대통령은 고문 후유증 탓인지 찬바람을 극도로 싫어해 한여름에도 경호원들이 에어컨의 찬바람을 막아야 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네 번째 도전 만에 대선에 승리하여 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한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02년 4월 과로와 위장장애 등으로 국군 서울지구병원에 입원해 국민을 놀라게 한 적도 있으며,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2003년엔 관상동맥 확장시술을 받았고, 이후 주기적으로 매주 세 차례씩 신장 혈액투석을 받고 입원을 반복하는 등 고통을 겪었지만, 꾸준히 대외 활동을 벌이는 등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강한 ‘인동초’였다. 또 국정원 도청사건으로 떠들썩하던 2005년에는 폐에 물이 차는 폐부종 증세로 2차례 입원하는 등 건강 상태가 극도로 나빠지기도 했으나, 이후 잦은 병원 신세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외부 활동을 통해 여전히 자신의 건재를 알려왔던 것이다. 그러다 지난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따른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돼 영결식장에는 휠체어를 탄 채 등장했으며, 당시 주변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구급차가 대기하고 있었다는 후문이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6월 11일 63빌딩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특별강연회에서 현 정부를 비판하며 건강에 대한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듯했으나, 최근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결국 반평생을 괴롭혀온 육신의 고통을 조용히 내려놓고 영면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민주주의 및 인권신장의 산 증인이었고, 한국의 민주화는 그와 함께 독재와 맞서 전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후 계속 독재정권과 맞서 싸워왔으며,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끊임없는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다. 대통령 당선 직후 전두환·노태우 사면 김 전 대통령은 1961년 5월 14일 강원도 인제에서 치러진 재선거에서 승리해 민의원으로 금배지를 달게 됐으나, 이틀 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으킨 5·16 쿠데타에 의한 국회 해산으로 의원선서도 하지 못한 채 첫 임기를 마쳤다. 하지만 5·16 쿠데타는 80년대 군사 독재정권에 맞서 90년대 민주화 시대를 연 소위 ‘양김 시대(김영삼·김대중)’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이후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박 전 대통령에게 패배하여 민주주의 회복은 이뤄지지 않았다. 특히 박 전 대통령이 1972년에 유신을 선포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일본으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김 전 대통령은 망명 중에도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등을 결성, 언론과 교포사회를 통해 유신반대 민주화운동을 진행했으나,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납치돼 미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해의 고비를 넘기고 자택인 동교동에 버려졌으며, 국내에 돌아와서는 가택연금을 당하는 등 핍박을 받았지만 민주화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이어, 1979년 12·12 군부 쿠데타와 1980년 5월 5·18 광주민주항쟁 무력진압 등 총칼을 앞세워 군과 정보기관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 세력에 의해 김영삼 등 야당 지도자와 함께 체포 구금되기에 이른다. 더욱이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역시 미국의 도움으로 감형돼 미국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으며, 미국에서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을 펼치다가 귀국했지만,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가택에 연금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전 대통령은 1985년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에 취임하는 등 민주화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이후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면서 대규모 반독재 투쟁 시위가 발생하고, 같은 해 6월 연세대생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 등으로 6·10 항쟁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87년 6월 항쟁은 독재정권을 종식시키고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6월 항쟁 이후 사회 민주화는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는 것이 국민적인 평가이다. 물론 6월 항쟁의 결과로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높았지만, 김 전 대통령이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갈등을 빚다가 야당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여 결과적으로 신군부의 중심축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어부지리로 당선되기도 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해 한국의 민주주의와 남북 관계 개선 등의 일관된 정책을 펴왔다. 그는 또 대통령에 당선된 지 하루만인 97년 12월 19일 자신을 사형으로까지 몰아넣고 핍박했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군사독재 정부의 지도자들을 용서하고 사면해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삶은 남북통일을 향한 기나긴 여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71년 대선 당시 자신이 주창했던 3단계 통일론 때문에 줄곧 ‘빨갱이’로 몰려 적지 않은 고초를 겪었으나, 3단계 통일론과 대북 포용정책의 확고한 신념을 꺾지 않고 마침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정상회담을 갖는 등 진정한 남북 화해협력 시대를 여는 통일운동에 평생을 투신했다. 3단계 통일론으로 평생 동안 ‘용공’ 딱지 따라다녀 김 전 대통령이 남북문제와 인연을 맺은 것은 해방정국 당시 몽양 여운형이 좌·우익을 망라해 구성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하면서부터였으며, 이후 남로당 간부와의 비밀자금 거래와 관련돼 투옥되기도 했으나, 나중에 수사 결과 단순한 채무관계로 드러나 용공혐의가 벗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6.25 전쟁 직후 북한군에 잡혀가서는 오히려 활발한 경제활동을 했다는 우익 반동이라고 투옥돼 끌려가다가 총살 직전에 탈옥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1년 신민당 대선후보로 나서 박 전 대통령과 맞붙어 석패하지만 3단계 통일론으로 인해 이때부터 그의 정치역정은 가시밭길이었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색깔론과 사상논쟁에 휩싸이게 된다. 특히 대선에서 혼쭐이 난 박 전 대통령 수하들이 김 전 대통령을 최대 정적으로 지목해 정치적 탄압을 본격화했고, 그 중심에는 바로 용공 시비가 항상 뒤따라 다녔던 것이다. 1972년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 전 대통령은 이듬해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반체제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하는 등 반유신 활동을 전개하다 납치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으며 바로 이 한민통 활동이 사회주의에 공조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그를 좌익으로 몰려는 세력에게는 좋은 소재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이 줄기차게 주창해온 3단계 통일론이란 ‘남북연합→연방제→통일국가’를 골자로 한 것이다. 즉, 남북 정상회의를 최고 의사결정기구로 하는 남북연합을 첫 단계로 하여 한반도에 평화 분위기가 성숙하면 연방제를 만든 뒤 통일국가를 이룬다는 내용이다. 김 전 대통령이 주창한 이 3단계 통일론은 노태우 전 대통령도 일부를 도입하여 동구권과의 수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졌을 뿐만 아니라, 이 통일론이 빛을 발한 것은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한 1998년 이후로서, 당선 직후 북한의 도발불용 등 대북 3원칙을 천명하면서 햇볕정책을 과감하게 실천으로 옮긴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통일정책은 재임 기간에도 북한 잠수정 침투와 금강산 관광객 억류, 제1연평해전 등으로 난관에 봉착했지만, 대북포용정책의 기조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2000년 3월 남북 간 협력 수준을 민간에서 정부로 진전시키겠다는 베를린 선언을 하고, 그해 6월 분단 반세기 만에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으며, 꿈에나 그리던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도 실현됐다. 이 공로로 한국인으로선 처음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의 햇볕정책은 2003년 참여정부 출범 후에도 계승 발전되면서 2007년 10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제2차 남북 정상회담으로 이어지기에 이른다. 하지만 퇴임 후, 제1차 남북 정상회담 직전에 현대가 4억 달러, 정부가 1억 달러를 북측에 몰래 건넨 사실이 밝혀진데 이어, 2006년 북한의 핵실험이 뒤따르면서 그의 햇볕정책과 통일론은 빛이 바랜 채 미완의 숙제로 남게 됐다고 할 수 있다. 김대중과 호남과 5.18의 함수관계 한편, ‘김대중’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호남’과 ‘5.18’이라고 할 수 있다. 김 전 대통령의 기나긴 인생역정은 호남민들과 호흡해온 여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전 대통령의 탯줄이면서 정치적 고비 때마다 함께해온 동반자가 광주·전남지역이고 호남민이기 때문에 호남을 빼고 ‘김대중’을 말할 수 없고, ‘김대중’을 뺀 호남지역 정치도 성립될 수 없다. 특히 정치적 고비마다 함께해온 이들이 바로 호남민들로서, 김 전 대통령이 평소에 즐겨 사용한 이순신 장군의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문구도 바로 그 연유에서 비롯됐다. 더구나 박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적들로부터 ‘영호남 지역갈등’의 장본인으로 몰렸지만, 김 전 대통령은 호남을 사랑했고, 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영호남 지역갈등을 해소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평가이다. 더구나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비 때마다 함께했던 국립 5.18 민주묘지와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는 김 전 대통령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6.29 선언으로 사면된 뒤 당시 망월동 5.18 묘역을 첫 참배하여 통한의 눈물을 흘렸고, 이후 야당 총재와 전현직 대통령 자격으로 5.18 묘역을 꾸준히 참배했으며, 1996년 대선후보 때에는 5.18 묘역 준공식에 참석해 방명록에 ‘영원한 승리’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98년 8월 27일 현직 대통령 자격으로 국립 5.18 민주묘지를 처음 참배했으며, 당시 굳은 표정으로 제단에 향을 피우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5.18 희생자 영정이 있는 유영봉안소에서 헌혈을 하다, 총탄에 맞고 숨을 거둔 고 박금희 양(당시 전남여상 3년), 엄마와 함께 걸어가다 숨진 김완봉 군(당시 무등중 3년)의 영정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서 5.18 묘지를 참배한 뒤 용서와 화해의 완결 그리고 사회통합을 강조하는 등, 국립 5.18 민주묘지의 전신인 광주 망월동 5.18 묘역은 김 전 대통령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다. 퇴임 후에는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며 2005년 9월 ‘추모 5.18 민주영령’, 2006년 6월 ‘민주주의는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입니다’, 2007년 10월 ‘불멸의 위업 영혼불망’이라는 글들을 방명록에 남겼으며, 이 밖에 대선후보 당시나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과 함께 국립 5.18 민주묘지 내에 기념식수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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