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호 심원섭⁄ 2010.01.11 16:36:11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월 4일 청와대에서 신년 국정연설을 통해 3대 국정운영 기조와 5대 핵심과제를 밝히면서 “남과 북 사이에 상시적인 대화를 위한 기구가 마련돼야 한다. 북한도 진정으로 마음을 열고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서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대통령은 “북한이 조속히 6자회담에 복귀하기를 촉구한다. 그리하여 한반도 비핵화가 진전되고 본격적인 남북 협력의 물꼬가 트이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이 대통령은 “북한과 대화를 통해 북한에 묻혀 있는 국군용사들의 유해발굴 사업을 추진하겠다”며 “남북 사이에 상시적 대화를 위한 기구가 마련돼야 한다”고 밝혀, 2008년 북한에 제의한 ‘서울·평양 연락사무소 상호 설치 방안’을 또다시 공론화시켜 눈길을 끌었다. 이 대통령은 취임 2개월 만인 2008년 4월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여 가진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서울과 평양에 연락사무소를 상호 설치할 것을 북한에 제안하면서 “연락사무소장은 남북한 최고책임자의 말을 직접 전할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 정상의 대리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고위급 채널’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당시 이 대통령이 이같이 제안한 배경은 국가 간에 대사관을 상설 소통 채널로 가동하는 국제사회의 일반적 관행을 남북 관계에도 적용해보자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과거 남북 고위급 대화들이 ‘실질적인 내용’보다는 ‘일회성 이벤트’처럼 변질되었음은 물론, 심지어 북한의 일방적 결정에 따라 중단과 속개를 반복했다는 등의 지적이 있었던 만큼, 대화 채널을 상설화함으로써 언제든 남북한 최고위급 간의 의견 교환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의미도 담겼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 대통령의 ‘비핵·개방 3000’ 구상을 이행하기 위한 ‘인프라’를 만든다는 측면도 감안됐던 것이다. 북한, 남북 관계 개선 등 노골적 평화공세 펼쳐 하지만 당시 북한은 제의가 있은 지 9일 뒤인 4월 26일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을 통해 “북남 관계 악화의 책임을 회피하며 여론의 시선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한 얕은 수”라고 폄하하면서 연락사무소 설치 제안을 공식 거부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통령이 올해 북한과의 상시 대화기구 필요성을 또다시 강조한 것은 올해에는 보다 적극적인 대북 접근을 시도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2년 전에 대남 비난 공세를 퍼붓던 북한이 지난해 8월 이후 유화적 자세로 돌아섰고, 특히 신년 공동사설에서는 남북 관계 개선을 강조하는 등 남북 관계의 새로운 전기 마련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특히 지난해 하반기 이후 미국과의 관계 개선 의지를 분명히 하고 나선 북한은 남쪽을 향해서도 노골적인 평화 공세를 펼치고 있어, 반응을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게다가 남북 간에 정상회담을 염두에 둔 고위급 비밀 접촉이 성사된 것으로 알려지고, 이 과정에서 북한의 적극적 의지가 확인됐다는 게 외교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올해 북한의 정책 기조를 가늠할 수 있는 신년 공동사설의 논조도 과감하고 대담한 ‘남쪽과의 대화’를 희망하는 것으로 요약됐다.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인 <조선신보>가 남북 정상회담 가능성을 우회적으로 언급한 대목도 주목된다. 따라서 달라진 환경 속에서 북한이 이 대통령의 연락사무소 제안에 대해 과거와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기대가 제기되고 있다. 정상회담 ‘연기’, 곳곳에서 솔솔 이와 관련, 이 대통령은 이날 신년 국정 연설 후 춘추관을 방문해 출입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남북이 신년 사설을 통해) 서로 욕을 안 하는 것만 해도 오래간만이다. 긍정적 변화의 일부분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남북 대화 상시기구 제안에 대해서는 “지난 2008년 4월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던 서울과 평양의 상설 고위급 연락사무소 설치와 같은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남북 정상회담이 북한에서 개최될 수도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콘텐츠가 문제이지, 나머지는 협상하기에 따른 것”이라며 “남북 정상회담은 늘 우리 쪽에서 목매여 하던 상황에서 이제는 여건이 바뀌었으니 긍정적”이라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이 대통령은 정상회담 장소에 대해 지난해 12월 “서울이 아니라도 좋다”고 말해, 2000년 6·15 공동선언에서 ‘서울 답방’을 약속하고도 오지 않고 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운신의 폭을 넓혀준 셈이다. 따라서 올해 남북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남북은 이미 지난해 10월 싱가포르에서 비밀 접촉을 가졌다. 민생경제 챙기기와 후계구도 준비에 집중해야 할 김정일 위원장으로서는 남북 관계의 안정적 관리와 남측의 대규모 대북 지원 확보가 필요한 실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대통령의 이러한 구상이 실현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서울·평양 연락사무소 구상은 1982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국정연설에서 상주 연락대표부 설치를 제의한 것이 시작이었지만, 이후 20년 가까이 진전이 없었다. 또한 대북 화해·협력 정책을 편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정상회담 및 장관급 회담을 계기로 여러 차례 타진돼 상당한 기대를 모았었다. 그러나 북한은 남북관계가 진전되는 와중에도 연락사무소 같은 상주대표부 제안은 전혀 수용하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2년 전 이 대통령의 연락사무소 제안을 북한이 거부한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로 여겨졌으며, 북한으로서는 이미 “북남 관계 악화 책임을 회피하려는 얕은 수”라며 거부했기 때문에 일단 일축했던 제안을 다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까지는 국군포로·납북자 문제와 북한 비핵화를 정상회담 의제에 올리겠다는 우리 정부의 입장이 확고해 보이기 때문에 더욱 큰 험로가 예상되고 있다. 북한으로서는 비핵화 문제는 북·미 협상 테이블에서 다뤄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이 대통령이 북한의 조속한 6자회담 복귀를 강조한 것은 비핵화에 대한 김 위원장의 태도 변화 없이는 남북 간 고위 대화가 쉽지 않다는 메시지일 수 있다는 관측이 유력하다. 이 대통령 “공동으로 유해발굴 작업하자” 제의 한편, 이 대통령이 “북한과 대화를 통해 (6·25 전쟁에서 사망한) 국군용사 유해발굴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혀, 앞으로 이 문제를 갖고 남북 군 당국 간 대화가 이뤄질 가능성에 기대를 걸게 만들고 있다. 지난 2000년부터 6.25 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이 추진된 이래 현직 대통령이 북한 지역에 매장된 유해발굴 의지를 천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와 관련, 국방부 관계자는 “이 대통령의 발언은 단순히 북한 지역에 매장된 전사자 유해를 발굴하겠다는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라며 “국가를 위해 어느 지역에서 희생한 장병이든 국가가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다른 관계자는 “남북한이 6.25 전사자 유해를 공동으로 발굴하는 것은 전쟁 발발 60주년을 맞는 현 시점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며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조치로 평가할 만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국방부 통계에 따르면, 6.25 전쟁으로 국군 13만7899명이 전사했고, 3만2838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됐으며, 전사자 가운데 60%인 7만8000여 명이 남한 지역에, 30%인 3만9000여 명은 북한 지역에 묻혀 있을 것으로 각각 추정되고 있다. 나머지 10%인 1만3000여 명의 원혼은 비무장지대(DMZ)에서 떠돌고 있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2000년부터 시작된 유해발굴 사업을 통해 남한 지역의 주요 격전지에서 국군 전사자 유해 3367구와 유엔군 유해 13구를 각각 발굴했다. 북한 지역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3만9000여 구의 발굴을 위해서는 북한과의 합의가 필수적이다. 이 대통령이 연설에서 올해 북한과 대화를 통해 발굴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강조한 것도 이를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올해 남북 합의가 이뤄져 북한 지역의 유해발굴이 시작된다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에 국군·미군과 중공군 간에 격전이 벌어져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한 지약 즉, 평양에서 북쪽으로 약 97km 떨어진 평안북도 운산 지역에서 가장 먼저 작업이 이뤄질 것으로 예측된다. 미국은 1996년부터 발굴 작업이 중단된 2005년 5월까지 함경남도 장진호 인근과 평안북도 운산 지역에서 모두 225구의 유해를 발굴했으며, 이 가운데 60명의 신원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별개로, DMZ에 매장된 전사자 유해발굴 작업도 시급하다. 국방부는 올해 중으로 유엔군 사령부와 DMZ 유해발굴 사업에 대한 협의를 진행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DMZ에는 수많은 지뢰가 매설돼 있어 안전 문제 때문에 발굴 작업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군 관계자들의 설명이어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