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연출가 겸 프로듀서 마이클 베넷의 대표작 <코러스라인>이 세상을 본 지 35년 만에 한국에 처음 소개됐다. <코러스라인>은 1975년에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돼 토니상 최우수 뮤지컬상 등 9개 부문, 드라마데스크상 5개 부문을 수상한 작품. 브로드웨이 최장 공연 기록을 세운 뮤지컬이기도 하다. <코러스라인>은 8명의 댄서를 뽑는 최종 오디션에 참여한 후보 17명의 인생과 도전을 이야기한다.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후보들은 성장 과정을 비롯해 배우가 된 과정, 배우 일을 하면서 느낀 좌절과 행복 등을 담아낸다. 6월 27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아티움에서 첫선을 보인 한국 초연은 2006년에 리바이벌된 최신 버전으로, 뮤지컬 <코러스라인>의 ‘코니’ 역으로 출연하기도 한 연출 겸 안무가 바이옥 리가 직접 연출을 맡아 브로드웨이 작품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퀄리티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오디션을 소재로 한 작품인 만큼 <코러스라인>의 한국 오디션은 치열했다. 초연에 서는 배우들은 1000명의 지원자들 중 선택된 17명뿐이다. 이들 중에는 6차 오디션을 거친 배우도 있다. 중서부 출신의 미국 남자 ‘돈’ 역에 캐스팅된 뮤지컬 배우 윤길(본명 윤덕선·35)도 선택된 17명 중 한 사람이다. ‘윤길’이라는 이름은 낯설어도 ‘알몸연극’으로 알려진 연극 <논쟁>을 들어본 사람은 있을 것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 ‘누’ 역할로 공연계에 이름을 알렸다. 또한 SBS 예능 프로그램 <일요일이 좋다-골드미스가 간다>(이하 골미다)에서 배우 예지원의 맞선남으로 출연해 유명세를 탔다. 배우로 산 지 10년이 넘는 윤길에게 <코러스라인>은 꿈의 뮤지컬이다. 그동안 <시카고> <미스 사이공> <아가씨와 건달들> <명성황후>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컨택트> 등 많은 작품에서 앙상블로 차근차근 배우의 길을 밟아온 윤길이 꿈꿔왔던 단 하나의 뮤지컬이 바로 <코러스라인>이다. “30대에 들어서면서 배우 일을 계속할 것인가 방황할 때 <코러스라인>의 리바이벌 버전을 처음 접했어요. 그때 OST를 사서 들었는데, 첫 곡(I Hope I Get It : 난 이 일을 원해)을 듣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저의 마음이 그랬으니까요. <코러스라인>은 그렇게 방황하던 저를 다잡아준 작품이죠.” <코러스라인>과 사랑에 빠진 윤길을 만나 작품과 연기와 삶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눈빛은 오디션을 보는 후보처럼 진지하고 뜨거웠다. -<코러스라인>의 오디션이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대단했어요. 7시간 동안 춤을 가르쳐주고 오디션을 치를 줄은 몰랐거든요. 동작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을 줄 몰랐죠. 오디션 때부터 의미를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잖아요. <코러스라인>은 달랐답니다.” -<코러스라인>의 매력은 뭡니까? “먼저, 안무의 동작 하나하나에 의미가 실려 있다는 점이에요. <코러스라인>의 안무가는 뮤지컬 <시카고>의 안무가 밥 포시의 라이벌인 마이클 베넷인데요, 밥 포시의 안무 특징이 삼각 구도인 반면, 마이클은 사각 구도의 안무를 합니다. 저는 밥 포시의 스타일에 익숙하기 때문에 처음에 베넷의 사각 구도에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었어요. 그래서 열심히 연습하고 있죠. 그리고 또 하나, 구성이 굉장히 독특합니다. 오디션을 보는 17명이 차례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4개의 몽타주가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공연이 아주 입체적이에요. 대사도 교묘하게 연결되고요. 각자 이야기를 하는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사는 정말 신기해요. 오프닝부터 어느 하나 버릴 신이 없는 작품이죠.”
-처음부터 ‘돈’ 역할에 지원했습니까?
“오디션에 지원할 때는 보통 1, 2, 3 순위를 정해서 배역을 적어 냅니다. 저는 1순위로 잭, 그리고 폴과 알을 적어 냈어요. 하지만 연출님이 배우에게 이것저것 시키면서 역할은 바뀌죠. 그런데 배우들과 연습하면서 배우와 역할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연출님은 배우들이 연기하기를 원하지 않아요. 그 인물이 되기를 원하죠. 표현하려 하지 말라며 자연스러움을 강조합니다.”
-윤길 씨는 사활을 건 오디션에서 떨어진 적이 있나요?
“음…. 솔직히 별로 떨어져보지 않았어요. 저는 그동안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에만 지원했거든요. 하지만 배우 일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30대 초반 때였죠. 이 일을 먹고살기 위해서만 하는 건 아닌지, 비전이 있는지에 대해서요. 누구나 30대 초반에는 이런 고민을 한다더군요.”
-연기를 그만두면 무얼 할 생각이었어요?
“그 질문은 이번 작품에도 나와요. 연출자가 ‘만약 당장 춤을 출 수 없게 된다면, 연기할 수 없게 된다면, 뭘 할 수 있겠어요? 어떤 느낌이 들까요?’라고 묻는 장면이죠. 그런데 실제로 연습을 시작하기 전에 배우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를 논의했어요. <코러스라인> 대본처럼 다양한 반응이 나오더군요. 어떤 친구는 울고, 어떤 친구는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런데 저는 대답을 못했어요. 서울예전 연극영화과에 들어가 배우가 되겠다는 목표를 정한 뒤 지금까지 계속 이 일을 하고 있지만, 지금도 ‘이 일을 해야 하나’하는 갈등을 하곤 해요.”
-돈은 어떤 매력이 있는 인물인가요?
“주로 농사를 짓는 캔자스 출신이라 별로 세련되지 못한 남자예요. 그리고 아내와 두 아이를 키우는 가장이어서 굉장히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춤과 연기를 너무너무 사랑하지만, 세금도 내야 하고 아이들의 교육도 마쳐야 한다’는 돈의 대사에서도 알 수 있죠. 사실 처음에 ‘돈’은 제가 하고자 한 역할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 대사를 보고 제가 잘할 수 있는 역할임을 알았어요. 저 역시 그와 같은 고민을 많이 했기 때문이죠. 20대 때는 무작정 열심히 하면 될 거라 생각하고 현실적인 면은 생각하지 않았는데요, 점점 돈이 삶을 영위해야 하는 기초 수단이 되어가니까 힘들더라고요.”
-<코러스라인>의 주인공은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코러스라인>에는 주인공이 없어요. 잭과 캐시의 분량이 많아서 그들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잭 역시 피날레 때는 금색 의상을 입고 배우들 틈에 섞여 춤을 추죠. 그리고 저는 앙상블과 주인공의 경계를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무대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거든요.”
-‘예지원 맞선남’으로 유명세를 탔는데요, 이런 질문을 자주 받죠?
“꼭 물어봐요. 벌써 1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말이죠(웃음).”
-<골미다>에 출연하게 된 계기는 뭐였나요? 정말로 결혼을 생각하고 출연한 건가요?
“<골미다> 제작진 중 한 분이 저의 공연을 보고 출연 제의를 해서 나가게 됐어요. 그런데 <골미다>가 작가가 있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하려고 해도 시청자가 재미있어 할 만한 상황을 수시로 요구해서 그럴 수가 없었어요.”
-‘알몸연극’인 <논쟁>으로도 많은 화제를 낳았는데요, 또다시 출연 제의가 온다면 수락할 건가요?
“<논쟁>을 작년에 이어 올해도 했는데요, 사실 제 나이에 할 역할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19~20살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배우가 해야 해요. 저는 때가 많이 묻어서 하기 힘들죠.”
-실험적인 작품에 도전하는 일을 좋아하나요?
“저는 <논쟁>이 실험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자연스러운 연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실험한다는 경험은 배우로 발전하기 위해 꼭 필요해요. 도전 정신과 결부되니까요.”
-<코러스라인>에는 아이돌 가수(유키스 멤버 수현)가 출연하는데요, 배우 외길만을 달려온 사람으로서 이에 대한 거부감은 없나요?
“그것도 그들의 도전이라고 생각해요. 시작은 미약할 수 있어요. 저 역시 처음 하는 일에는 서투니까요. 저는 그런 도전 의식들을 좋게 평가합니다.”
-뮤지컬 배우 1세대 남경읍 씨(잭 역)에게 어떤 점을 배우고 있죠?
“남경읍 선배님과는 제가 21살이던 1995년에 <7인의 신부>라는 작품에서 처음 만났어요. 당시 저는 열정이 많은 새내기였고, 선생님은 이미 뮤지컬계에서 자리를 잡은 유명인이었어요. 스무 살 때 마흔을 바라보는 느낌은 아저씨 혹은 선생님이잖아요. 그런 분과 극 중 춤 대결을 하는 장면이 나와요. 싸움을 춤으로 표현한 장면이죠. 그런데 저보다 체력이 더 좋아서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선생님은 연습 시간 한 시간 전에 와서 피아노를 치곤 했는데, 연주가 아니라 기초인 바이엘을 치셨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늦었다고 생각할 때도 시작하는 사람이 있구나’ 생각했는데요, 나중에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선생님이 직접 피아노 연주를 하고, 학교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학생들 노래 공부를 시키는 모습을 봤어요. 선생님을 보면서 ‘절대 배움은 늦은 게 아니고, 늦었을 때가 가장 빠른 것이다’라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무대가 아닌 다른 분야에 진출할 생각이 있습니까?
“다른 분야도 같이 하고 싶어요. 좋게 말하면 연기의 폭을 넓히기 위함이지만, 현실적으로도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스타가 되고 싶다는 말은 아니에요.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어야 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죠.”
-연기생활의 목표는 뭐죠?
“죽을 때까지 꾸준히 연기하는 겁니다. 연기가 고통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 고통이 행복해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배우가 아닌 다른 직업은 제게 돈 버는 수단에 지나지 않아요.”
-마지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