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이후 소득은 줄었는데 물가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솟고 있다. 더구나 소득이 늘었다 하더라도 물가 오름세에 못 미쳐 실질소득 증가율은 마이너스이기 때문에 이래저래 서민들은 죽을 맛이다. 밥상 물가는 물론 기름 값, 집세까지 온 천지가 고물가시대이기 때문에 주부들은 어쩔 수 없이 값싼 수입육에 손이 갈 수밖에 없고, 도시락으로 겨우 점심을 때우고 있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은 게 현실이다. 지난 2007년 취임 초 ‘MB물가지수(52개 생필품 물가 관리)’로 시작된 이명박 대통령의 ‘물가와의 전쟁’이 3년 반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은 물론 오히려 올 들어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서도 상위권인 4%대의 고물가 행진이 이어지며 서민경제의 주름살이 더욱 깊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정부가 물가와의 전면전에 나선 지 6개월이 지났지만 결과는 참패다. 성장과 물가 두 마리 토끼를 쫓으려다 선제적인 물가 관리에 실패한 셈이다. 정부와 한국은행이 올해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3%대에서 4.0%로 올려 잡은 것은 결국 물가 압력에 손을 든 것으로 풀이된다. 4% 상승률은 한은의 물가관리 목표 상한선이기도 하다. 그만큼 물가 불안이 심상치 않다는 얘기다. 하지만 고물가에 허리띠를 졸라매는 데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대통령의 강력한 물가안정 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생 현장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연전연패하는 이유는 뭘까. MB, 시도별 주요물가 비교ㆍ공개 지시 물론 청와대와 정부는 구제역과 이상기후, 국제유가 상승 등 ‘불가항력적’ 변수를 주된 원인으로 꼽고 있으나 정치권과 학계에서는 금융위기 극복과 성장 기조를 위해 물가안정에 치명적인 ‘고환율-저금리’ 정책을 지나치게 장기간 유지한 데다, 이 대통령의 빈번한 구두 지시가 실효성 없는 대중요법에 그쳤다는 지적이 설득력 있게 거론되고 있다. 실제로 정부의 고환율-저금리 정책은 수출 호황과 내수 불황의 양극화 확대 외에 수입물가 상승과 유동성 인플레이션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지난 2008년 3월 지식경제부 업무보고에서 지시한 이른바 ‘MB물가지수’도 이미 지난 98년에 발표한 생활물가지수 품목과 큰 차이가 없다. 물가상승 우려가 커진 지난해 10월, 이 대통령이 생필품 물가를 국제 시세와 비교하라고 지시한 것도 “국제시세라는 기준이 어떤 건지 가늠할 수 없고, 나라마다 환경이 다른 상황에서 기준으로 삼을 만한 지표, 통계적 근거도 마땅치 않다”는 정책 실무진들의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다.
더구나 이 대통령이 올 초에 제기한 “주유소 등의 형태가 묘하다”는 발언 역시 기름 값 100원 인하 반짝효과 이후 관치 후유증만 남긴 채 3개월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와 관련 여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물가안정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는 중요하지만, 정부 차원에서는 유통구조 개선 등 중장기 과제를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차분히 대응하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이라며 “청와대가 직접 나서서 이렇다 할 효과를 거두지 못하면 정책 불신만 커진다”고 지적했다. 7월 20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긴급관계장관대책회의는 이 대통령이 7월 18일 “물가를 직접 챙기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이후 처음으로 열린 회의라는 점에서 관심이 집중됐었으나 결과적으로 이날 회의 역시 ‘대책회의’보다는 ‘상황점검회의’ 성격이 짙었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올 들어 물가대책을 꾸준히 추진, 시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추가로 내놓을 ‘특단의 대책’이란 게 현실적으로 마땅치 않기 때문이며 회의 내용이 비공개로 진행된 것도 이런 연유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날 회의에 참석한 한 부처 장관은 장마 후 급등 조짐을 보이는 농산물 가격을 포함해 원가 인상과 수급 불일치 등으로 치솟고 있는 국내 유가와 공공요금, 전셋값, 물류·유통비용 등에 대한 현황보고에 치중했을 뿐 물가를 잡을 묘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 대통령이 직접 물가회의를 주재한 것은 따뜻한 시장경제와 중도실용, 공정사회로 진화해온 친서민 행보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과제가 일자리와 물가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물가를 잡지 못하면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정치적 고려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 대통령 ‘아이디어’ 내고, 장관들은 침묵 지켜 이미 MB물가지수, 국제시세 비교, 주유소의 묘한 형태 등 구두발언을 통해 물가와 관련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 이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도 유일하게 ‘아이디어’를 냈다. 이 대통령은 맹형규 행안부 장관에게 “버스요금, 지하철요금, 채소값 등 주요 생활물가 10가지 정도만 집중적으로 선정해서 16개 시·도별, 대도시를 중심으로 가격비교표를 만들어 매달 공개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제2의 MB물가지수’로 불릴 수 있는 이 대책에 대해 “대도시의 가격 구성요인을 비교해 가장 합리적이고 원가를 절감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물가안정에 기여토록 하라는 취지”라고 청와대 박정하 대변인은 전했다. 한마디로 아이디어는 이 대통령이 내고 장관들은 그 지시에 맞춰 따라만 가는 수동적 행보가 계속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대통령은 “이전에 물가 당국이 했던 것처럼 단속, 점검 등 통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을 해 기본적으로 물가 구조 체계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발굴, 검토하라”면서 “민간의 자율적인 경쟁, 그리고 유통구조상 또는 지금까지 있었던 제도적인 방안에서 개선점은 없는지, 관습과 제도를 바꾸는 방안을 찾아보라”고 지시한 것이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 대통령은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을 중심으로 한 물가 관련 관계 장관들이 매주 물가 상황을 챙기는 회의를 열 것을 지시한 뒤 “이 회의도 가급적이면 현장에 가서 현장 목소리를 기반으로 반영하고 이에 대한 실질적인 대책이 나올 수 있도록 회의를 해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이 같은 당부에도 불구하고 각 부처 차원에서 얼마나 실효성 있는 방안을 발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지적이 대다수다. 그동안 정부는 물가대책을 내놓을 때마다 유통구조나 제도개선 등을 통한 근본적 대책을 마련했다고 밝혔지만, 아직도 구조적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진입규제 완화나 정보공개 확대, 불공정거래 감시 등 구조적 해결방식은 단기간에 효과를 볼 수 있는 대책이 아니기 때문에 최근의 물가 상승세를 진정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도 고물가의 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어 이에 대한 극복여부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