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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모으는 남자, 아트컬렉터 피정환

“그림으로 돈벌 생각 버려야 그림보는 재미 쏠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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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72호 왕진오⁄ 2012.05.02 09:35:01

지난 4월 초 한 슈퍼컬렉터의 한국 방문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최대 부호이자 미술애호가로 유명한 카를로스 슬림 멕시코 텔맥스 텔레콤 회장이 삼성미술관 플라토(구 로댕갤러리)를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슬림 회장은 로댕의 열렬한 애호가였던 작고한 부인과 함께 380여 점의 청동조각과 예술작품을 수집한 세계 최대의 로댕 작품 개인 소장자다. 그는 “나도 소장 못한 로댕의 ‘지옥의 문’이 서울 시내에 상설 전시된다는 점이 아주 인상적”이라며 “로댕의 후기작 ‘대성당’을 모티브로 한 플라토의 건축공간이 ‘지옥의 문’과 ‘깔레의 시민’ 두 명작과 잘 어울린다”고 감탄했다. 국내 컬렉터로는 아라리오 갤러리의 김창일 회장이 2009년 미국의 미술잡지 아트뉴스가 뽑은 세계 200대 컬렉터에 선정돼 미술계의 큰손임을 확인시켰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상위 10위의 컬렉터로는 영국 축구 프리미어리그 첼시의 구단주인 러시아 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 화장품 회사 에스티로더의 창업자 아들인 로널드 S 로더, 미술품 경매회사 크리스티와 PPR그룹을 이끄는 프랑수와 피노 회장 등이 있다. 이들이 미술계와 세간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부를 토대로 자신의 컬렉션을 완성하고, 때로는 사회나 국가에 환원하는 차원에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이들이 특정 작가나 작품에 대해 발언하면 관련 가격이 달라질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도 하다. “작품 매매가 최고가 경신”이라는 타이틀 등과 함께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는 인물들이다.

미술품 수집은 ‘부자들의 마지막 취미’라 불리기도 한다. 돈으로 살 수 있는 마지막 가치를 사들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역사 속의 권력과 부의 끝에는 항상 미술품이 있었으며, 그와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전해져온다. 컬렉터란 물품의 수집자, 특히 미술품의 수집가나 수장자를 지칭하는 단어다. 미술품의 사적 수집은 태고시대부터 시작됐겠지만 특히 컬렉터들이 예술의 페이트런(patron, 예술가를 지원하는 애호가)으로서 미술관 성립의 기초가 된 것은 중세 말에 시작된 것으로 해석된다. 근대에 들어서는 미술관이나 연구소의 기초를 만든 카몬도 컬렉션, 앙리 체르누스티 미술관, 가리에라, 모로조프, 시추킨 등이 유명한 컬렉터다. 동양에서 제왕의 미술품 수집은 고대 중국으로 올라간다. 송대 이후에는 문인 취미의 발흥에 이어 지식인으로서 서화나 골동의 감식과 소장을 겸하는 자가 많이 나타나 ‘감식가’라고 불렸다. 부의 상징보다 개인정서를 살찌우는 컬렉션 오랜 세월 오로지 ‘좋다’는 이유로 공들여 모으기 시작한 작품들이 어느덧 일정 수준의 컬렉션을 이룬 국내 컬렉터가 있다. 지금까지 400여 점의 미술 작품을 모은 피정환 컬렉터다. 그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것은 4월 초 시내 중심가 전시공간에서 한국이 낳은 걸출한 세 대가, 즉 김기창, 박생광, 이응노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 전시하면서부터였다.

“소장의 폭이든 깊이든 아직 세상에 내놓을 수준이 못 된다”며 그는 “이렇게 전시를 통해 알리는 것이 무슨 자랑거리라도 되는 듯 우쭐거리는 모습으로 비칠까 조심스러웠다”고 말했다. 화랑가와 미술시장에서 미술품 애호가로 알려진 피정환 컬렉터의 고민섞인 일성이다. 피 컬렉터가 미술품을 처음 접한 것은 지금부터 29년 전이다. 당시 동양화의 매력에 빠져서 꾸준히 작품을 소장하게 됐다는 것이다. 돈이 많아서도 아니고, 투자 목적으로 그림을 산 것도 아니다. “그림을 접하기 전에는 영화 등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너무 비용이 많이 들고 내가 하기에는 너무 투기성이 강하기에 멀리했고, 지금도 후회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그림 사랑에 대한 일화도 많다. 아내가 여섯 살 딸의 피아노 구입을 위해 마련해 둔 돈으로 그림을 사버린 적이 있고, 차 사려고 들어둔 적금을 그림 사는 데 써버려 아내에게 경제권을 넘겨줘야 했던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지금은 차도 내 나이에 맞는 것으로 바꾸었는데, 아직 차나 옷보다는 그림이 더 좋고, 아내도 지금은 함께 그림을 고를 정도로 애착을 갖게 됐다”고 전했다. 그림을 축재의 수단으로 여기는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 때문에 ‘그림 소장’이 부정적인 의미를 띠기도 하는 현실에서 자신의 이름을 가리지 않고 소신 있게 알리는 그의 자세는, 그림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자신감의 증거이기도 하다.

“수십억 벌수있는 작품 놓쳤지만” “그림 사려면 잘 알아야”…모은 책만 5천권 다음은 미술 컬렉션에 대해 피정환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 미술품을 모으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그림을 처음부터 수집한 것은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것, 패션과 영화 쪽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당시에 그림을 산다는 것은 저의 생활관으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미술작품이 수록된 팸플릿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수십만 원짜리 동양화 작품을 구입한 것이 계기가 되었죠. 몇 달간 용돈을 모아 그림을 샀습니다. 한동안 동양화만 구입하다가 해외 작품에 눈이 가게 되었고, 판화 작품도 한 동안 모았습니다. 이후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를 통해 서양 미술 작품을 접하게 됐고, 카로나 마리노 마리니 등을 구매하면서부터 해외 조각품을 전문적으로 수집해보자는 의욕이 생겼습니다. 이어 한국에 실내 조각품 전문 전시장을 만들려는 목표도 갖게 됐습니다. 현재 파주 헤이리 일대에 전시공간 부지를 확보한 상태로, 건물보다는 무엇으로 채울지를 고민하는 중입니다. 아마도 특색 있는 작품들로 구성된 전시공간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 컬렉션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 시기가 있었는지요? “지금까지 400여 점의 미술품을 모은 것 같습니다. 다양한 미술 장르를 다 섭렵했고, 미술품을 모으면서 지적 수준도 높아진 것 같아요. 마음의 여유가 커진 것이 수집을 하면서 만들어진 작은 성과가 아닌가 합니다. 제가 그림을 모은 이유 중에 투자 목적은 없습니다. 1989년 당시 소더비 경매에 자코메티의 작품이 25만 달러(미화) 상당에 나와 목동 소재 집을 팔려고 했는데, 집사람이 반대해 구입하지 못했죠. 지금은 100억 원대를 호가하는 작품인데 아쉬움도 남지만, 돈을 벌기 위해 작품을 모으지 않겠다고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도 그때로 기억합니다.” - 미술품을 소장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언젠가 표구점에서 운보의 작품을 구입한 적이 있어요. 제 안목을 믿고 주저 없이 구입한 작품이었는데, 어느 날 운보의 아들을 만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니, 제가 구입한 작품이 수년 전에 도난당한 작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운보의 아들은 저에게 ‘법정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작품을 돌려주거나 증거물로 내놓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부터 그림의 출처까지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일로 기억하는데, 청담동에 있던 서미갤러리를 통해 백남준의 작품을 구입했어요. 당시 작품 가격이 1300만 원이라고 했고, 저로서는 부담되는 가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던 판화 작품을 주고 물물교환 형식으로 작품을 구입했죠. 이 작품은 우리가 흔히 아는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와 달리 회화 작품입니다. 제가 소장한 작품들 중에서 특히 애착을 갖고 간직하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 미술품을 소장하려는 분들에게 조언을 하신다면? “허허, 제가 누구에게 미술품 컬렉션에 대해 조언을 드릴 입장은 아닙니다. 저는 자수성가형 컬렉터입니다. 제 주변에는 미술 관계자나 전문적으로 미술을 공부한 사람이 없습니다. 초기에 어려움이 많았죠. 그래서 작품을 고를 때 먼저 그 작품에 대한 서적을 모두 모아 공부를 했답니다. 한 5, 6년 이론적인 공부를 하다 보니 그간 모은 미술 관련 서적도 5천여 권이 넘더라고요. 공부를 안 하면 작품을 구매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책마다 작품들이 다 좋다고 나와 있어서 이것저것 구입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컬렉션은 하나의 장르를 완벽하게 모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화랑에 대해서도 정확히 파악해야 됩니다. 판매를 목적으로 수집하면 안 된다고 강조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나라 미술시장은 가격지수가 널뛰기처럼 안정적이지 못하고, 판로마다 가격이 다릅니다. 따라서 투자라기보다는 수십 년 동안 모으면서 마음의 여유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만족했으면 합니다. 그러다가 정말로 작품을 시장에 내놓았을 때 구매가격보다 오르면 즐거움이 더해지겠지만, 이것을 목적으로 삼으면 좋은 작품을 고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제가 미술품 컬렉션을 하면서 고수하는 원칙은, 자신의 자산을 분할하거나 외부 자금을 가져다가 그림을 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번에 많은 작품을 사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1년에 한두 번 돈을 모아 구입하면 작품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해집니다. 정신적으로 얻는 문화적 감성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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