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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살리려 건물이 한 발 물러서니 이리 좋네

북촌의 새 명물 ‘나무 모던 앤 컨템포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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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76호 왕진오⁄ 2012.05.29 11:08:50

삶의 질이 향상되며 나타나는 현상중의 하나는 문화의 향유다. 미술품을 관람하고 구매를 하는 것도 그 중의 하나다. 특정 계층에만 한정되었던 문화 소비가 이제 사회 전반으로 확산돼 가는 현상이다. 그림을 보고 작품을 구매하는 것이 이제 비단 부유층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젊은 직장인, 주부 등으로 확산되는 것 역시 우리나라의 문화의식 자체가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전통과 현대가 아름답게 공존하는 서울 북촌 지역의 미술 전시공간에도 그런 새 바람은 불고 있다. 북촌은 서울 중심부의 오래된 한옥촌으로서 특유의 고즈넉함과 아기자기함을 갖춰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휴일뿐 아니라 평일에도 근처의 직장인, 동네 주민들이 잠깐의 휴식을 위해 북촌의 갤러리를 찾고 있으며, 이로 인해 차와 담소를 나누는 공간도 다양하게 늘어나고 있다. 이 덕분에 북촌 지역의 많은 갤러리들은 전시장이라는 기본 기능 이외에 카페, 레스토랑, 뮤지엄 등의 기능을 겸비해 갤러리의 문턱을 낮추고 있는 것도 최근 추세이다. 이런 가운데 북촌의 상징물 같은 헌법재판소와 담벼락을 나란히 하는 새 건물이 들어서 눈길을 끈다. 현대식 건물이지만 주위의 한옥촌과 어울리도록 디자인됐고, 또한 400년 넘은 향나무를 현지에 있는 그대로 손대지 않고 디자인 요소로 살린 곳이기도 하다.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담장을 돌아 50m 정도 들어가면 울창한 향나무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향나무를 호위하듯 현대적 미학의 서양식 건축물이 양팔을 벌리고 있다. '나무 모던 앤 컨템포러리'다. 이 건물은 연면적 1000평방미터로, 겉으로 보면 지상 2층 양식이다. 그러나 실내로 들어가면 어느덧 건물은 지상 3층짜리가 된다. 북촌 지역의 건축물 최고 고도 제한(16m 이하)을 맞추면서도 내부적으로는 기능을 살리기 위해 3층으로 설계한 아이디어다.

지하층은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 기능하며, 지상 1, 2층은 레스토랑, 3층은 미술 작가들의 거주-작업 공간인 레지던스다. 한 건물에서 문화의 생산과 향유가 동시에 이뤄진다. 건물 디자인은 갤러리 대표이기도 한 최은주 디자이너의 작품이다. 그는 2008년 나무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고택을 사들여 자신의 구상을 현실화했다. 왜 북촌? 최 디자이너는 유럽의 파리, 비엔나, 마드리드 등 올드 타운에서 유학 시절을 보냈다. 어려서는 왜 올드 타운이 좋은지, 올드 타운의 문화적, 디자인적 가치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지만,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눈으로, 몸으로 느낀 올드 타운의 문화적인 설득력이 그의 몸에 체화돼 있다. 작은 구도심이지만 유럽 사람들이 구도심으로 향하는 걸 본 그녀는 자신이 왜 구 도심에 끌렸는지를 서울에 돌아온 뒤에야 더욱 절실하게 느낀다. 서울에서 낯설고 어설픈 시간을 보냈던 그녀는 좀 더 편하고 익숙한 냄새들과 풍경들을 찾다보니 어느덧 마음은 북촌에 들어와 있었다. 서울 출신이 아니면서도 거의 본능적으로 서울의 올드 타운인 북촌을 주목하게 된 것이었다.

10년 전부터 자신의 미래 공간으로 북촌을 새겨왔던 그녀는 4년 전 필요한 공간을 장만하고 이곳에 자신의 상상력으로 새 공간을 탄생시켰다. “10년 전 북촌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도도한 기운과 여유로움이 가득했고 지금처럼 북적거리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간 북촌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북촌이 본질을 잃지 않고 본래 지녔던 도도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데 조금이라도 내 힘을 더하고 싶었습니다.” 올드타운 북촌에서 수백 년 자리를 지킨 향나무와 이웃 한옥들. 이들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사람과 건물이 조화를 이루는 새 공간을 만들어내 최 디자이너에게 공간은, 그 공간 안에서 보는 측면만 중요하지 않았다. 내부의 공간만큼 중요한 것은 올드 타운 북촌과 그 자리에 이미 자리잡고 있던 향나무처럼 수백 년 묵은 환경-자연과의 조화였다. 이웃의 한옥들을 관찰하며 그 디자인 콘셉트를 살려나가기 위한 아이디어, 설득, 실행이 반복되면서 '나무 모던 앤 컨템포러리'는 탄생했다.

향나무의 안전한 서식을 위해 건물은 그 주변에서 멀찍이 물러나 앉았다. 부지의 4분의 1 정도는 건축행위를 하지 않고 비워낸 이유다. 고목이 도로와 접한 부지 도입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건축물은 나무에 우선권을 주고 뒤로 물러났으며, 나무를 품고 양쪽 날개를 펼치는 형태를 취했다. 한 뼘이라도 더 땅을 활용하기 위해, 각박하게 도로에 바짝 어깨를 들이댄 보통 건물들과는 달리 나무 모던 앤 컨템포러리가 바로보기에 편한 모습이 됐다. 이러한 디자인 콘셉트에 힘입어 건축물이 실제 부지보다 더 커 보이는 착시 현상도 일어난다. 또한 나무 주변에 있던 담들을 자연스럽게 걷어냄으로써 부지 내의 나무 주변 공간들과 도로면이 하나로 연결됐고, 늙은 향나무는 편안하게 바람과 햇빛을 맞고 있다.

건축 외벽의 소재는 깊은 회색 톤의 석회석으로 했다. 주변 한옥 기와의 색과 질감을 거스르지 않고 함께 묻어가기 위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지붕의 검은 아연 판도 일렬로 앉히지 않고 좁게 쪼개 입체감 있게 배치한 이유도, 한옥의 기와와 물성은 다르지만 어울리는 패턴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북촌에서 건축 행위를 하려면 문화재 심의, 한옥 심의, 건축 심의를 차례로 거치고 승인을 받아야 한다. 신축 행위를 할 수 있는지, 각각의 법 규정에 맞는지, 지역에 맞는 건축물 콘셉트인지를 검토받는 과정이다. 최 디자이너는 이런 절차에 대해 “매번 요구되는 규범과 상황에 맞추다 보니 오히려 더욱 독특한 디자인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여러 제약 조건들은 한계로서가 아니라 디자이너의 새로운 해석을 탄생시킬 수 있는 토대로 살려낸 경우다. “별난, 별종 같은 디자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것을 배려하고 배치하면 그 건축물만의 유니크한 디자인이 탄생합니다.” 그녀는 또한 “갤러리 운영자인 최은주 개인의 시점으로 디자인된 공간이 아니고 개인적인 공간개념과 사회적인 책임감이 결합돼 완성됐다”며 “전시 공간이라면 갖춰야 할 사회적인 책임, 즉 북촌이라는 지역과 환경을 바라볼 제3의 관찰자 시선까지 설득할 수 있는 관념과 에너지를 연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나무 모던 앤 컨템포러리’는 열린 공간을 지향한다. “누구나 부담 없이 들어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문을 항상 열어 놓는다”는 최 디자이너는 “벌써 하루 평균 관람객이 150명을 넘었다”고 자랑했다. 기존의 정형화된 일방향성 전시공간이 아니라 관람자를 배려한 소통 중심의 공간을 만든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지하의 전시장은 복층의 원형 구조로 돼 있다. “관람자가 작품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작품 속의 일부가 돼 전시 전체와 소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무 모던 앤 컨템포러리는 디자이너 최은주의 디자인 쇼케이스

건물 외벽에 설치된 DPG 유리벽도 눈에 띈다. DPG(Dot Point Glazing) 공법은 두 장의 강화유리 사이에 필름을 넣는 방식으로, 건물 밖에서도 전시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해 준다. 최 디자이너는 “전시 기간 중 작가의 다양한 퍼포먼스 영상이나 미디어 아트는 물론 독립 영화와 작품 슬라이드 쇼 등을 펼치고, 이를 건물 밖에서도 관람할 수 있게 한 것”이라며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실험적 전시 공간”이라고 소개했다. 이곳 전시장에는 그룹전 ‘NAS 2012(Namu Jeune Artist SHOW 2012)’가 5월 31일까지 진행된다. 김성수, 김선태, 박찬길, 사타, 윤현선, 이자연, 임진세, 조현익 등 8명이 참여했다. 최 디자이너는 “나무 모던 앤 컨템포러리는 유명세를 타지 않은 젊은 작가들, 소속과 출신에 상관없이 작품성만으로 선별된 작가들 위주로 전시를 기획할 것”이라며 “이곳을 방문하면 미술 전시는 물론 음악회, 퍼포먼스, 교육프로그램 등 다양한 예술 문화 콘텐츠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현재의 전시 이후에는 한국 고가구인 반닫이와 함께 젊은 작가들의 작품으로 공간을 채워 전통과 현대(컨템포러리)가 조화된 분위기를 만들 것이라는 게 그녀의 귀띔이다. - 왕진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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