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0-331호 이진우⁄ 2013.06.17 11:50:08
싯다르타(석가모니불)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얻어 세계 최초로 부처가 됐다. 싯다르타에 따르면 부처란 ‘천상천하유아독존’, 즉 하늘 위에서도 하늘 아래서도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는 의미다. 비로소 내가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누구나 부처가 되지는 못한다. 일반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엄청 힘든 과정이기 때문이다. 강 박사는 “화두는 묘한 매력이 있다. 이를 뚫기 위해서는 많은 지식이나 학식이 필요 없다. 또 평생을 걸려도 뚫지 못할 수 있고 어느 순간 갑자기 뚫을 수도 있다. 그 순간 깨달음을 얻어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이다”면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난로를 직접 만지면서 뜨거움을 경험한 뒤에는 두 가지 형태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이 난로라는 놈은 모양을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사람들 앞에 다시 나선다. 이것을 제대로 분별해서 난로를 피해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살짝 모양이 바뀌어 있는 난로를 분별하지 못하고 또다시 뜨거운 경험을 반복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자의 경우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남전화상이 고양이 목을 자르다…“집착을 버려라” 남전화상(748~834)은 불쌍한 고양이 목을 왜 베었을까? 어느 날 선원의 동당과 서당의 선승들이 고양이 한 마리를 가지고 다투는 것을 보고, 남전은 고양이를 번쩍 들고 외쳤다. “너희 중에 누군가 한마디(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궁극적인 말) 말을 할 수만 있다면 이 고양이를 살려주고, 말하지 못한다면 죽이리라”
선승들 가운데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자, 남전은 칼을 들고 그 고양이의 목을 잘라 버렸다. 저녁 때 제자인 조주(778~897)가 외출했다가 돌아오자, 남전은 그를 불러 낮에 선원에서 일어났던 일과 고양이를 죽인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러자 조주는 곧장 신발을 벗어 머리에 얹고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남전이 그러한 조주의 뒷모습을 보면서 “만약 낮에 그대가 있었더라면 그 고양이를 죽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라고 혼자 말했다. 조주가 신발을 머리에 얹은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여기서 고양이는 의심과 집착을 의미한다. 따라서 남전이 고양이 목을 자른 것은 집착을 끊으라는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동당과 서당의 선승들이 논쟁했던 그 핵심을 절단한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분별 망상에서 벗어나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주가 신발을 머리에 얹고 밖으로 나가버린 행동은 그가 집착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즉 깨달음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스승 앞에서 신발을 머리에 얹고 밖으로 나가버리는 행동이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이겠는가. 강 박사는 “불가에서 말하는 ‘은산철벽’이란 제자에게 화두를 내린 스승의 높은 벽을 의미하기도 한다. 스승은 태산과 같은 존재로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그 화두를 뚫었다는 것은 이미 스승의 벽을 뛰어 넘고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상태를 상징한다”면서 “조주가 신발을 머리에 얹자 그것은 모자나 다름없는 것이 됐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버린 행동을 통해 스승이 내린 규칙에서 벗어나 스스로 새로운 규칙을 만든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비로소 주인이 되었을 때만 가능한 행동으로, 주인이라면 결코 타인의 기준에 연연해하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칸트의 판단력…규정적 vs 반성적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인 칸트는 판단력의 범주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고, 이의 분별을 통해 직관력을 얻는 방법을 제시했다. ‘규정적 판단력(bestimmende Urteil kraft)’이란 이미 정해진 규칙을 분별하고 해석해 적용시키는 것을 말한다. ‘반성적 판단력(reflektierende Urteilkraft)’이란 놀라운 임기응변으로 새로운 규칙을 만들며 타인의 눈치를 안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반성적 판단력’의 최고의 덕목은 ‘용기’라고 말한다. 용기가 있어야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반성적 판단력’은 주로 예술가들이나 창작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곤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아 오면서 사회에서 상식으로 통하는 규칙의 노예가 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어머니로부터 테이블은 가족들이 모여 앉아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물건이라고 배웠다고 치자. 그렇다면 여기에 매몰된 아이는 테이블에서는 언제나 밥을 먹거나 가족과 대화하는 것으로만 판단해 행동하게 된다. 한데 어떤 한 아이가 테이블위에 올라가 누워서 잠을 자고 있다. 그 순간 그 아이에게는 테이블이 침대에 불과한 것이 됐다.
강 박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은 집에서 자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밖에 나가서 침낭을 깔고 자게 되면 천하가 내 집이 된다. 이때 자유가 얻어지는 것이다”면서 “이러한 자유는 마치 맥가이버가 손에 잡히는 것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상황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창조는 테이블에서 자면서 그것을 침대로 만드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규칙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은 결코 자유를 느낄 수도, 창조를 해낼 수도 없다”고 언급했다. 자유와 창조의 직관력으로 새로운 규칙 만들어야 리더는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규칙의 가장 한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리더들은 이미 정해진 규칙들을 분별하고 해석하면서 조직원들에게 규칙을 지키라고 강요하고, 본인 역시도 규칙을 지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행동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리더와 조직을 바라보는 당신에게는 어떠한 생각이 드는가. 답답해야 한다. 마치 은산철벽 앞에 있는 것처럼. 만약 답답하지 않다면 이는 당신이 여전히 주인이 되지 못한 채 타인이 만든 규칙 속에서 헤매다가 갑작스레 난로라도 만나게 된다면 그 뜨거움을 온 몸으로 겪으면서 고통 속에서 허우적댈 것이다. 이것은 이상하리만치 잊을만하면 반복되는 것이 또한 인생이기도 하다. 강 박사는 “고통을 피하지 말자. 난로는 자주 만질수록 좋다”고 강변한다. 그러면서 그는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은 사실상 강자이다. 또한 진짜 강자만이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타인을 의식해 눈치를 보면서도 이를 ‘타인을 배려하는 행위’라며 위안을 삼는다”면서 “하지만 눈치와 배려는 전혀 다른 말이다. 눈치를 본다는 것은 시쳇말로 ‘쫀 것’과 같은 것이다. 배려란 약자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쥔 강자가 약자에게 진정으로 자비를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조직의 리더라면 규칙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내는데 집중해야 한다. 내 앞에 컵이 놓여 있는데 누군가가 그것을 가리키며 화두를 던진다. “이것을 컵이라 해도 맞고, 컵이 아니라고 해도 맞는다. 또한 침묵해도 맞을 것이다”라고 한다면 눈앞이 깜깜해질 것이다.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가? 이것에 대한 답은 아마도 수천가지가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가 만든 규칙에서 벗어나는 노력과 함께 자유와 창조 안에서 직관력을 얻어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불확실성과 변화무쌍한 세상을 살아가는 리더에게는 조직을 제대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또 여기에 실행하고자 하는 용기가 최고의 덕목으로 자리 잡아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 박사는 지혜로운 직관력을 얻는 독서 방법으로 “책을 읽을 때는 마치 난로를 만지듯이 읽도록 하자”면서 책이 던져주는 화두(은산철벽)를 뚫겠다는 각오로 진지하게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우리가 책을 읽으면서 단지 그 안에 있는 지식만을 머릿속에 담는다면, 이는 작가가 펼쳐 놓은 규칙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이는 결국 작가의 벽을 뛰어 넘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면서 강 박사는 “독서할 때 좀 더 나아가서 책이 던져주는 화두를 통해 자유로움 속에서 창조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나만의 규칙을 찾아내는 것이, 좋은 책을 통해 화두를 제대로 뚫는 베스트 독서가가 되는 지름길”이라고 조언했다. - 이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