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모를 바닥으로부터 떠오르는 존재의 울림은 작가의 초상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예술은 자전적이다. 진주는 굴의 자서전이다. 내가 비록 신발 깔창을 찍으려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나에 대한 영화가 될 것이다.” 페데리코 펠리니
파트릭 쥐스킨트의 단편 소설 ‘깊이에의 강요’의 주인공은 젊고, 재능 있고, 열정적인 여성 화가이다. 어느 날 파티에서 만난 평론가로부터 그녀의 작업에는 깊이가 결여되어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날부터 그녀는 회화의 깊이를 찾아 절망적으로 방황하고, 끝내 자살에까지 이른다.
모호하기 그지없는 비평의 수사들(rhetoric). 사실 비평이 창작에 대해 무엇을 했던가? 엄밀히 말하자면 미술비평의 본령은 문학에 속한다. 문학의 언어로 미술의 직관을 온전히 번역해 낼 수 있겠는가? 그 막연하고도 무겁기 만한 실재(real)를 어떻게 언어라는 불확실한 도구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실재란 애초부터 불립문자의 세계인 것을…
인상주의에 대해 가했던 프랑스 비평의 수많은 폭언과 폄훼. 미국 미술에 대해 휘두른 그린버그의 독선의 칼. 한국 모노크롬 회화에 대해 한쪽 눈을 질끈 감았던 우리의 미술비평. 미술사 속에서의 비평의 위치는 그 화려한 언사에 비해 별로 보잘 것이 없다.
▲untitled, Acrylic on Canvas, 116x91cm, 2013
과연 비평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비평은 새로운 창조 작업의 선두에 설 수 없다. 다만 앞서 간 실천 행위에 대한 뒷정리를 할 뿐이다.
비평에 대한 이러한 시각을 지닌 필자가 남의 작품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이 우스운 아이러니이다. 허승희의 화화를 가지고 논의함에 있어 왜 먼저 파트릭 쥐스킨트의 소설이 생각났을까?
허승희의 회화 여정을 일별하면 그도 여느 작가들의 습작기처럼 자기양식 수립을 위해 여러 형식실험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작가가 스스로의 양식을 갖는다는 것은 곧 한 사람의 작가로서 홀로 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untitled, Acrylic on Canvas, 32x32cm, 2013
이들 실험의 양상을 대강 분석하자면 1) 비엔나분리파의 장식성 2) 김환기류의 단순성 3) 추상표현주의식 물감 적층 4) 줄리앙 슈나벨식 오브제 부착 5) 임파스토(impasto)와 게르하르트 리히터식 벗겨내기 등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즉 엄격한 형태보다는 풍부한 색감과 거친 마티에르를, 논리보다는 직관을, 관조보다는 몰입을 우선시했던 낭만파의 입장에 더 가까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작을 보면 그가 이전과는 달리, 보다 냉정한 자세로 캔버스 앞에 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주로 한색 계열의 주조색을 메마르게, 두텁지 않게, 채도를 떨어뜨려서 사용하고 있다.
▲untitled, Acrylic on Canvas, 91x116.8cm, 2013
화면의 구도는 정적이고, 질감은 부드러워 졌으며, 형태 또한 매우 단순하다. 다시 말해 바로크적 격정으로부터 고전주의적 정제(purification)로 선회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는 작가가 화가로서 그만큼 성숙했다는 반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살아온 모습이자, 보다 그다워 진 것이 아니가 생각해 본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의 테마는 주로 인물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화면의 중심에 당당히 자리 잡고 관객을 응시하고 있는 여느 인물화와 사뭇 다르다. 이들은 그림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 화면의 일부인 양, 흐릿한 실루엣을 하고 한쪽 구석에 수줍게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뒤돌아 서있거나 옆모습만 조심스레 보여줄 뿐이다.
▲untitled, Acrylic on Canvas, 130x194cm, 2014
생활에서 비롯해 생활로 회귀하는 예술
그것도 희뿌연 새벽안개 속에서. 캔버스 텍스처 속에 깊이 물든 배경의 물감 층 밑에 가라앉아 있던 인물이 아주 은은하게 화면으로 떠오르기 때문에, 어떤 그림에서는 얼핏 인물이 있다는 것조차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이다.
리히터의 인물에서처럼 의도적으로 뒷모습을 그리거나, 다 그려놓은 것을 일부러 지우거나 얼버무림으로써 오히려 거기에 있었던 모델의 실존이 더욱 강하게 부각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허승희의 인물은 마치 동양화에서처럼 배경의 여백과 경계를 나누지 않고, 함께 어울려 있다. 이때 인물이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은 철저한 익명성과 모호성이다. 남성도 여성도 아니고, 소년도 노인도 아닌, 단지 인간일 뿐이다. 보편적 인간의 실존을 이렇듯 보여준 이는 아마도 자코메티였을 것이다.
▲untitled, Acrylic on Canvas, 91x116.8cm, 2013
공간 속에 단지 정체불명의 한 줄기 선으로 표현된 자코메티의 인물상처럼 허승희의 인물도 화면 속에 침잠하여 배경 속으로 숨어들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익명성이 보편자로서의 인간의 실존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역설을 낳는다.
인간의 뒷모습은 거짓말을 하지도, 표정을 꾸미지도 않기 때문이다. 고요한 단순성 속에서 은은히 전해져 오는 소곤거림을 듣는다. 깊이 모를 바닥으로부터 떠오르는 존재의 울림. 이들은 바로 작가 자신의 초상이다.(중략)
아서 단토는 그의 주저 ‘예술의 종말 이후’에서 포스트모던 예술이 미학적 수행으로부터 해방되어 철학과 내러티브의 영역으로 진입한 것을 새로운 자유와 가능성의 확장으로 보고 있지만, 필자는 그것이 정박 점을 잃고 표류해야 하는 정체성 상실의 또 다른 위기는 아닌가 하는 의심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untitled, Acrylic on Canvas, 53x45.5cm, 2013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작가 허승희가 추적하고 있는 소박한 예술, 즉 생활에서 비롯해 생활로 회귀하는 예술, 예술의 효용과 책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하는 예술은 오늘의 포스트모던 예술이 안고 있는 부정적 측면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의 시사점을 지닌다.
허승희의 회화는 아폴론적 관조와 자기억제에 의한 형식의 재정립을 통해서, 다시금 고전적 가치를 되살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가느다란 희망을 갖게 한다.
- 오상일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교수 (정리 = 왕진오 기자)
오상일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