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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아티스트 - 최익진]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이방인, 스스로를 부정하고 극복한다

부정(否定)하여 부정(不整)한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것에 익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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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92호 조현정 미학자⁄ 2014.08.21 09:14:50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이방인이란 낯선 곳에 속한 사람, 이곳의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 단어에는 태생적으로 쓸쓸함과 외로움, 그리고 배타성이 담겨 있다. 스스로 지어낸 감정이 아니라 상대가 지어낸 것이라 하더라도 떨쳐내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방의 기억은 참혹하다.

낯선 땅, 낯선 바람, 익숙하지 않은 관습과 친밀하지 않은 사람들. 무엇 하나 쉽고 만만한 것 없이 모든 것이 새롭고 놀랍고 힘들기만 하다. 해서 온 몸의 신경은 곤두서고 아주 작은 일에도 동물적인 감각을 발휘해야만 한다. 아니 저절로 그렇게 되고 만다. 생존은 그토록 간절한 법이고 그게 또 이방인의 당위니 말이다. 그런 이방의 법칙이 느껴지는 작업이다.

최익진의 작품은 기법이 남다르거나 다루는 주제가 사회비판적이라서가 아니다. 이는 익숙한 풍경이 아니고, 이는 행복한 모습이 아니고, 이는 동물적 감각이 끌어낸 모색과 열정의 흔적이라는 것을.

초기의 ‘이두(吏讀)작업’, 아크릴 액자로 만들어낸 보행자 모습, 미법산수화를 연상시키는 ‘낙원도 시리즈’와 유리를 오래된 나무에 잇대어 만든 ‘벽의 눈 작업’까지 그의 작업 중 현실을 수도적으로 반영한 작품은 없다.

▲The Eyes of Walls in, 폐목 콜라주, 유리에 채색, 170x212cm, 2005


게다가 그러한 현실에 대해 수긍하고 있는 것 역시 단 하나도 발견하기 어렵다. 늘 부정(否定)하여 부정(不整)한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것에 익숙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늘 이곳에 있지만 늘 이곳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는 마치 이방인인 것 같다. 늘 이곳을 주시하지만 저 너머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풀어 놓기 때문에 그는 결코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

최익진의 이방의 습성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일반적 상식으로 그는 이방을 경험할 일이 없었다. 물론 들여다보면 밀쳐지고 배제된 기억이 없기야 하겠냐만 겉으로 드러난 것만 살핀다면 그는 철저한 내국인이다. 게다가 전통의 필법을 배운 바 있다. 그런데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중략)

▲어긋난 시선, 나무와 석분에 채색, 거울에 스크래치, 60x60cm, 2012


흔히 가치관이 다른 사람이나 행동이 유별한 사람에게도 이방인이란 의미는 확장되어 적용된다. 지역이 다름이 아니라 내적 혹은 외적 조건이 다름을 뜻하는 것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띤다.

최익진의 작업은 분명 이질적이다. 전통적인 방식의 회화와는 매번 다른 양태를 띤다. 얇은 아크릴 막대 작업이나, 이두 작업, 가느다란 고무줄로 만든 설치 등 흥미로운 변모를 이어나간다. 이는 타인과의 작업과 비교되어 이질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스스로의 작업이 또 다른 자신의 작업과 연계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요컨대 그의 작업을 총체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모든 작업이 개별적이고 모든 작업이 스스로를 단절하고 있다. 그의 의도에 따르면 늘 앞선 자신을 부정(否定)하는 방식으로 부정(不整)해 갔던 것이다. 분명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동시에 스스로를 부단히 자극하는 모험이었을 성 싶다.

▲메트로폴리스, 아크릴수지에 사진콜라주, 60x120cm, 2002


그 부정(不整)이 매번 자신의 작업을 바꿔 나가는 힘이 되었다. 그 어떤 틀도 소소한 부분에까지 바꾸고야 만다. 사실, 그에게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다고 한다. 매번 바꿔가야 할 이유가 없음을, 오히려 스스로의 기법과 양식을 만들 때까지 지속해 나가는 게 옳았을 수도 있음을 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것이 어쩌면 최익진의 진정인지도 모른다. 순수한 열정, 매번 다르게 살아내고야 말겠다는 고집. 그리고 그 진정이 그를 다르게 만든 지점이면서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만든 이유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의 작업이 요령부득이라거나 지나친 자기만족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매번 다른 양식과 매번 다른 기법에 대한 천착이 그를 이곳에서 낯선 사람으로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생긴다는 것이다.

▲두상, 나무와 석분에 채색, 90X90cm, 2012


최익진은 비판적이다. 이는 부정(不整)하고 부정(不定)하는 입장에서라면 당연한 속성이다. 그리고 부정성은 작품 속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고속버스 터미널 앞에서’라는 작품에서도 그렇고 이두작업을 변형시킨 일련의 시리즈에서도 그는 기존의 질서를 조롱하거나, 계급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에 대해 지적하고 분개한다.

인간으로 지켜야 하는 도리, 마땅히 존중해야 할 기본권에 대한 놓칠 수 없는 신념이 그를 작업하게 만든다. 가장 기본적인 것, 어찌 보면 당위에 가까운 것들이 현실적으로 부정되고 차치되고 외면당한다. 세상은 팍팍해지고, 사람들은 날마다 절망에 맞닥뜨린다. 그런 세상에 작가가 내릴 수 있는 결단이란 혹은 작가가 할 수 결정이란 무엇일까?

▲쇼핑, 아크릴수지에 아크릴릭, 60x60cm, 2002


그가 영원한 청년인 이유

최익진은 서슴지 않는다. 누군가의 눈치도 보지 않고 보란 듯이 비판하고 드러낸다. 그런 모습을 쫓다 보면 알게 된다. 그가 아직도 청춘임을. 하고 싶은 말, 표현하고 싶은 것이 많아 아직은 어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어른들의 삶에서 이뤄지는 그 많은 모순들을 끌어안고 가기는 하지만 본격적인 어른이 되는 일에는 주춤거린다.

▲허무 꾸미기(Empty-terior), 유리 흑경, LED전구, 41x41x27cm, 2007


해결의 의지가 있지만 앞으로 나가는 데에는 서툰 청춘의 비틀거림처럼 최익진의 행보도 아직은 덜 세련됐다. 그러나 충분히 기대할 부분은 보인다. 그가 보인 일련의 작업의 진정과 깊은 사유, 그리고 지치지 않고 나아갈 뚝심이 그 이유이다.

부정하고, 비판하고, 여전히 청년인 이유는 해내야 할 것이 남았고, 가야 할 길이 아직 멀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에 새로운 변곡점이 생기고, 새로운 자극이 넘쳐 또 다른 풍경을 빚어내길 바라고 또 바란다.

- 조현정 미학자 (정리 = 왕진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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