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슬로건, 44년간 월드컵 공인구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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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Impossible is Nothing). 리오넬 메시와 데이비드 베컴 등 불가능에 도전했던 스포츠 스타들의 고백을 담은 아디다스의 브랜드 슬로건은 가장 성공적인 브랜드 마케팅으로 남았다. 창업자 아디 다슬러는 아디다스를 스포츠 선수들의 조력자이자 그들과 함께 달리는 브랜드로 만들었다. 90년 이상 스포츠 용품 산업을 선도해온 아디다스의 발자취를 되돌아봤다.』
1948년 독일 바이에른에서 설립된 아디다스의 역사는 19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업자 아돌프 다슬러는 1900년 독일 바이에른주의 헤르초게나우라흐에서 태어났다. 20세가 된 1920년 최초의 훈련화를 만들었고, 1924년 형 루돌프 다슬러와 함께 ‘다슬러 형제 신발공장’을 설립했다.
1925년 직접 손으로 스파이크를 박은 러닝화와 가죽 징을 박은 축구화를 개발해 특허권을 얻었다. 스파이크 러닝화는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리나 라드케 선수가 여자 800m 달리기 세계 최고 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획득하며 유명세를 얻었다. 참가 선수 중 거의 50%의 선수가 다슬러 신발을 착용했다.
1932년 LA 올림픽에 출전한 아서 요나스는 육상 100m에서 동메달을 땄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제시 오웬스가 4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다슬러의 명성은 계속 높아졌다.
1948년 다슬러 형제는 회사를 분리한다. 형 루돌프는 ‘푸마’를, 아돌프는 ‘아디다스’를 설립했다. ‘아디다스(Adidas)’라는 브랜드 명칭은 자신의 애칭인 아디(Adi)와 다슬러(Dassler)를 합친 것이다. 유명한 ‘3선(Three Stripes)’이 트레이드마크로 정해진 것도 이 때다.
1950년 아디다스는 고무바닥에 여러 개의 주조 스파이크가 달린 전설적인 최초의 축구화 ‘삼바’를 생산했다. 1954년 독일 축구 대표팀은 아디다스가 만든 세계 최초의 스파이크 교체형 축구화를 신고 스위스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베른의 기적’을 연출, 2차 대전 패전 후 실의에 빠진 독일 국민들을 위로했다.
1963년 최초로 생산한 축구공 ‘산티아고’는 FIFA 최초의 공인구가 됐다. 1970년 ‘텔스타’ 축구공이 처음으로 멕시코 월드컵에서 공식 공인구로 등장했다. 이후 ‘탱고’ ‘피버노바’ ‘자블라니’ 등 아디다스의 공인구는 월드컵 역사와 함께 하게 된다.
이후로도 월드컵과 올림픽에서 아디다스를 착용하는 선수들은 계속 늘어갔다. 현재 아디다스는 2014 브라질 월드컵, 2012 런던 베이징 올림픽 등 국제적인 대회의 공식 파트너다.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후원하고 국내외 유명 축구 클럽을 후원한다. 이밖에 NBA, 테니스, 육상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적인 스포츠 선수들을 발굴, 후원하는 등 적극적인 스포츠 마케팅 활동을 펼치고 있다.
아디 다슬러의 비전과 원칙
특히 세계 최초의 인공지능 러닝화, 실시간 음성 코칭 개인 트레이닝 시스템인 마이코치 등 혁신적인 제품 개발에 있어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자랑한다.
기능적이면서도 다양한 스포츠 웨어는 물론, 야외 활동을 위한 아웃도어 룩 그리고 아디다스 바이 스텔라 맥카트니, 아디다스 우먼스와 같은 여성만을 위한 라인으로 스포츠 패션 분야도 선도하고 있다.
젊은 시절 아디 다슬러는 언제나 스포츠 선수들을 가까이에서 접하고 중요한 스포츠 이벤트에 직접 참여했고, 그것이 신발을 만드는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 선수들이 신제품을 착용하기 전에 직접 테스트 하는 것을 잊지 않아, 뒷마당이나 복싱대에 직접 설치한 점프대에서 스키 점프를 하기도 했다.
스스로가 매우 열정적인 선수였던 그는 “가장 좋은 신발을 모든 선수에게 제공한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전체 스포츠 용품 산업의 중요한 주춧돌이 됐고, 아디 다슬러 정신의 근간이 됐다.
제품 개발에 세 가지 원칙을 세우고 스포츠와 신발 제작에 자신의 정열을 쏟았다. 선수들이 원하는 최상의 신발을 생산하는 것, 부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 내구성이 뛰어난 제품을 만드는 것이 그의 원칙이었다.
무엇보다 스포츠화 제작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스포츠 경기 자체를 즐겁고 박진감 넘치게 만들고 싶어 했다.
1928년 암스테르담 대회부터 올림픽 공식 후원을 시작했으며,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승마와 요트를 제외한 최다 종목을 지원하는 다국적 스포츠 종합 브랜드로 입지를 굳혔다.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 종목은 축구였다. 독일 10종 경기 선수이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윌리 호돌프에 따르면 아디 다슬러는 즉흥적인 축구 경기를 즐겼으며, 65세가 됐을 때조차도 경기장에서 볼 다툼을 했다.
때문에 그는 아디다스를 월드컵 역사와 함께 해 온 브랜드로 만들었다. 1963년 FIFA가 인증한 최초의 축구공 ‘산티아고’를 개발한 이후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의 ‘텔스타’부터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의 ‘브라주카’까지 각 주최국의 전통과 문화를 토대로 디자인한 당대 최고 기술의 월드컵 공인구들을 제공해 월드컵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 왔다.
3스트라이프와 트레포일 로고
“선수들을 위한 가장 좋은 것(Only the best for the athlete)”, “사용된 제품, 되돌아 온 제품에서 배워라(Learn from worn products and product returns)”, “테스트하고, 테스트하고, 또 테스트하라(test, test, and test again)” 잘 알려진 아디 다슬러의 명언들이다.
유명한 아디다스의 ‘3선(Three Stripes)’은 가죽신발이 늘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신발끈을 3번 둘러 묶은 모습에서 착안한 것이다. 디자인이 아닌 기능적인 요소에서 탄생한 3선은 1949년 상표로 등록됐고, 곧 아디다스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세 장의 잎을 형상화한 트레포일(Trepoil) 로고는 1972년 처음 공개됐다. 트레포일 로고는 현재 아디다스 스포츠 스타일 라인으로 계승돼, 아디다스의 또 다른 3선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1997년 아디다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터 무어는 기존 로고의 중요한 요소들은 지키되 현대적인 디자인에 걸맞게 적용될 수 있는 로고를 새롭게 만들었다. 이렇게 탄생된 ‘산’을 닯은 아디다스 스포츠 퍼포먼스의 로고는 도전과 성취를 의미한다. 3선이 가지는 일정한 방향성은 브랜드 지향점으로의 점진적인 표현이다.
축구는 아디다스의 심장이자, 영혼이다. 아디다스는 FIFA(국제축구연맹)과 UEFA(유럽축구연맹), CAF(아프리카축구연맹)의 공식 파트너이며, 2014년까지 모든 FIFA의 대회, 미국 축구 메이저 리그, UEFA 챔피언스 리그도 공식 지원하고 있다.
공을 찰 때 통증을 느껴야 할 정도로 무거운 갈색의 가죽 축구공을 사용하던 1963년부터 아디다스는 고기능성 경기용 축구공의 개발을 시작했다. FIFA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아디다스의 축구공 ‘텔스타’를 공식구로 채택했고, 이후 수많은 월드컵 공인구를 만들어왔다. 아디다스는 최근 2030년까지 FIFA와의 파트너십을 연장했다.
1970년 멕스코 월드컵에서 처음 등장한 ‘텔스타(Telstar)’는 현대 축구공 디자인의 원형이다. 12개의 검정 오각형과 20개의 하얀 육각형의 패널 32개로 이뤄진 새로운 형태는 완벽에 가까운 구 모양을 실현함으로써 축구사의 혁명으로 남았다. 검정오각형 점박이가 있는 최초의 흰색 축구공 ‘텔스타’는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더욱 눈에 띄었다. 텔스타는 ‘텔레비전 속의 별’이라는 의미로, 멕시코 월드컵은 세계 최초로 위성 생방송됐다.
이후 뛰어난 내구성을 자랑한 ‘탱고(Tango, 1978 아르헨티나)’, 방수 가죽을 사용한 ‘탱고 에스파냐(Tango Espana, 1982 스페인)’, 최초로 인조 가죽을 채택한 ‘아즈테카(Azteca, 1986 멕시코)’, 가장 빠른 속도의 ‘에투르스코 유니코(Etrusco Unico, 1990 이탈리아)’. 강력한 에너지 반발력을 지닌 ‘퀘스트라(Questra, 1994 미국)’, 최초의 원색 월드컵 공식구 ‘트리콜로(Tricolore, 1998 프랑스)’, 혁신적 디자인의 ‘피버노바(Fevernova, 2002 한국·일본)’, 최초로 패널을 14개로 줄인 ‘팀가이스트(Teamgeist, 2006)’, 8개의 3D 입체 패널로 제작된 ‘자블라니(Jabulani, 2010 남아공)’ 등이 월드컵의 역사를 이어갔다.
가장 최근의 2014 브라질 월드컵 공인구인 ‘브라주카(brazuca)’는 역사상 가장 적은 6개의 패널이 혁신적인 바람개비 모양으로 합쳐져 구 모양을 완성, 최고의 그립감과 터치감, 안정성을 제공한다.
아디다스는 “이윤 추구를 넘어 선수들의 조력자가 되겠다”는 창업 철학으로 브랜드 마케팅을 진행해왔다. 그래서 “어떠한 경제 상황에서도 마케팅 비용을 줄이지 않는다”는 경영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수많은 기업들이 아디다스의 뒤를 이어 스포츠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아디다스는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 올림픽과 월드컵을 비롯한 수많은 국제 대회를 공식 후원을 하는 동시에 그들 자신이 경기에 직접 참여하는 ‘또 하나의 선수’라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2004년부터 아디다스는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Impossible is Nothing)’라는 브랜드 캠페인을 펼쳤다.
체조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너무 큰 키로 인해 좌절하다 장대높이뛰기 선수로 전향해 세계신기록만 20개를 남긴 이신바에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치명적인 실수로 영국 국민들에게 지탄받았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화려운 영웅으로 돌아온 데이비드 베컴, 작은 키와 호르몬 장애로 축구선수가 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오히려 신체적 단점을 강점으로 바꿔낸 리오넬 메시 등 불가능에 도전해 이겨낸 스타들의 이야기는 전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2011년 3월, 아디다스는 역대 가장 큰 규모의 브랜드 캠페인 ‘아디다스, 열정으로 하나되다(adidas Is All In)’를 선보였다. 이 캠페인은 나이와 성별, 지역 및 직업을 뛰어넘어 열정(Passion)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2014년 브라질 올림픽에서는 ‘전력을 다하거나 아무것도 아니거나(All In Or Nothing)’라는 슬로건을 내건 광고 캠페인을 진행하며 전세계 축구팬들과 실시간 소통했다. 아디다스가 후원한 독일과 아르헨티나가 결승전에서 만나고, 후원 선수들이 골든 어워드를 모두 석권했으며, 특히 아디다스는 월드컵 기간 동안 소셜 미디어 채널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브랜드가 됐다.
- 정의식 기자
정의식 기자 es.jung@m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