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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아티스트 - 가국현]색의 조화를 연주하는 붓, 다채로운 색으로 담백함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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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17호 변상형 미학전공·한남대 예술문화학과 교수⁄ 2015.02.12 09:02:56

▲가국현 작가.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변상형 미학전공·한남대 예술문화학과 교수) 우리는 흔히 구상화와 추상화의 차이를 결정하는 기준을 구체적 형태의 유무에 따라 손쉽게 가늠하곤 한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아볼 수 있으면 구상작품이고, 뭘 그렸는지 도통 알 수 없으면 추상작품으로 판단해버리면 마음 편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상작가라는 타이틀로 분류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가국현 작가의 그림을 앞에 놓고 그러한 판단기준으로 마음 편하게 바라보기에는 뭔가 불편함이 고개를 든다. 과연 여전히 구상화라는 잣대를 작가의 작품에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인지 망설여지기 때문이다. 더불어 진정한 의미에서 구상과 추상 그 사이의 경계를 확연히 나누는 일이 가능한 것인지도 참으로 모호해진다.(중략)

▲굿모닝(good morning), 캔버스에 오일, 100x60cm, 2015


가국현 작가의 노트를 읽다보면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작가의 그림 안에 존재하는 화초들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흔한 존재의 파편에 불과하지만 곧 작가의 부지런한 손짓에 예쁘고 다정다감한 정물적인 존재로 재탄생돼 더 이상 평범하기만 한 화초들로 여겨지지 아니한다. 작고 소소하지만 무척이나 인상적인 표정들을 지닌 화려함으로 다시 태어난 그들은 엄격한 절제를 통해 강한 단호함도 풍긴다.

▲파티, 캔버스에 오일, 100x100cm, 2013


화면 안에서 너울거리며 부드럽게 묘사되고 있는 이미지들이기도 하면서 한 편에서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은 무엇일까? 직관적으로 포착된 물상의 깊은 심상적 흔적들로 남겨진 이미지들은 구체적인 묘사가 억제돼 있고, 대부분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몇 가지 안 되는 색으로 배색을 마친 묘하게 화려한 색면(色面)들은 아주 세련되게 표현돼 있는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견고한 단단함을 느끼게 한다.

▲뮤즈의 방, 캔버스에 오일, 100x100cm, 2014


이는 최소한의 형태들로 환원돼 있는 원이나 타원 그리고 사각형의 조형성이 주는 단순한 간결성에서 전해오는 인상이 강렬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 꽤나 구체적 형상을 띠고 있을 것 같은 색들의 구획과 형태들은 최소한의 형상만을 남긴 채 사실성을 화면 밖으로 이미 몰아내 버렸다. 화면은 이제 현실의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형태와 속성만이 남아 있다. 그의 작품은 이제 더 이상 구상이라는 라벨을 붙일 수 없다. 그렇게 굳이 분류하려는 사람들의 눈에는 여전히 사물들이 실재라는 사변을 늘어놓고 있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봄봄, 캔버스에 오일, 100x100cm, 2015


하지만 모든 현실의 사물은 그의 사각 틀 안에서 더 이상 옛 존재로서의 이름과 형상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존재의 순수한 형상만을 남기고 싶어 하는 뜨거운 열망이 폭발한 이후 점차로 냉정하고 치밀한 이성으로 구획돼가는 화면은 일면 차갑기까지 하다. 이제 가국현 작가에게 현실의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니다. 한때 꽃이라 사람들이 말하던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가 선취하고 재현하는 꽃은 원이라는 선과 면의 완벽한 형상을 색으로 피워내는 덩어리일 뿐이다. 여기엔 꽃이 가졌던 아름다움의 본질만이 꿈틀댄다.(중략)

작가의 직관에 포착된 세계는 양적 개념이 아닌 질적 개념이다. 화폭 가득 하나의 사물을 형태적으로 확장하려 한다 해도 구체적 형태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는 태도는 완전한 추상으로 걸음을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구상을 통한 추상의 결과를 놓치지 않으려 하는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실적 물상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보이는 대로가 아닌 작가 자신이 본 것을 놓치지 않고 재구성해 내고 있는 가국현만의 세계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화폭에는 구상과 추상이 이미 하나의 길에서 만나 사이좋은 친구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고 있다. 

▲사발의 행복, 캔버스에 오일, 100x60cm, 2015


작가노트에서 가국현은 한편 이렇게 쓰고 있다. “비워둘 일이다. 점차 단순화시켜 빈 공간을 넓게 둠으로써 대상과 여백만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도록 한다. 빈공간이 커질수록 대상은 점점 기다렸던 님처럼 애틋하다.” 작가 가국현의 여백은 단순한 여백이 아니다. 이미 가득 채워져 있는 치밀한 공간인 것이다.(중략)


색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물감 연구에 몰두

작가는 평생 그림만 그려왔다고 한다. 그에게 ‘그린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아주 오래 전부터 그는 색에 집착해 왔다. 작업실 한편에는 색상환표가 붙어있었다. 작가로서 경험하는 색의 한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미 검증된 색의 세계를 화면에 배치하는 일은 사실 그저 간단한 일은 아니다.

▲나들이, 캔버스에 오일, 100x100cm, 2015


유독 유화 물감만을 고집해왔다는 작가 가국현은 그림을 그리는 시간보다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고 술회한다. 끊임없이 색에 대한 효과와 방법론을 실험하고 연구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유화 물감과 아크릴 물감이 가진 물성을 비교하고, 화면에 바른 물감을 거두어 내고 나이프로 긁어보기도 하고 찍어도 보고 이제는 천을 붙여보고도 있다는 그는 끊임없이 실험하고 있었다.

그렇게 작가가 보내야 했던 긴 실험의 시간들을 아크릴 물감은 견뎌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숙성되듯 색감의 깊이가 우러나오는 잠재성을 지닌 유화 물감을 지금도 그가 선택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와 물감은 무한한 잠재성 안에서 서로를 탐색하며 서로의 시간을 익혀가고 있는 것이다.

▲더 해피 데이(the happy day), 캔버스에 오일, 100x60cm, 2014


그 끈기 있는 도전과 선택의 갈림길에서 그의 농익은 색감은 어느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색의 설계도로 화면을 구성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비로소 독특한 색이 빚어낸 향미를 풍기며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끈다. 그가 풀어내고 있는 색 맛의 감각적인 향연에 끌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그림을 감상하는 이들은 색의 화려한 눈 맛을 그저 즐길 일이다.(중략)

자신의 작업세계에 관한 철저한 고민과 그 구현이 감상 대중의 많은 지지를 확보하고 있는 작가, 가국현은 행복한 예술가이다. 앞으로도 그가 끊임없이 우리 앞에 던져줄 형과 색의 원숙한 조우가 줄 기쁨을 미리 떠올리는 것도 또한 행복한 일이다. 다채로운 색이 만들어내는 형태의 담백함은 그의 그림에서는 각자의 역할을 잘 알고 내밀한 호흡을 맞추고 있는 실내악단 같다. 지금 그 자연스러운 색의 조화로움을 연주하는 가국현의 붓끝에는 소박한 화려함이 춤추고 있다.

(정리 = 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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