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 전시 - 이슬기 개인전]누비이불로 풀어낸 한국 속담의 추상
▲자신의 작업에 대해 설명하는 이슬기 작가. 사진 = 왕진오 기자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왕진오 기자) 세계적 건축가 알바루 시자가 설계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여성의 신체를 건물에 옮겨놓은 듯한 날개 형태의 독특함을 보여준다. 여체를 닮은 이 전시장 바닥에 알록달록한 누비이불이 나란히 누워 있다. 익숙한 전시장을 기대하고 이곳을 찾았다면 일순 당황할 만하다.
이 작품은 3월 7일∼4월 19일 경기도 파주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관장 홍지웅)에서 10년 만에 한국 개인전 ‘분화석’을 진행하는 이슬기 작가(43)의 작품으로, 한국 속담의 의미를 기하학적 무늬로 10개의 누비이불에 아로새겼다.
작가는 전시 공간의 두 날개를 ‘안’과 ‘밖’으로 나눈다. 누비이불이 놓인 오른쪽 날개가 ‘안’이고, ‘밖’으로 이름 붙여진 왼쪽 날개에는 진흙으로 만든 분화석 조각이 세워져 있다.
10개의 이불에 새겨진 모양들은 한국 속담 속의 상징물들이며, 음양오행 사상에 기반을 둔 한국의 오방색과 누비의 결을 통해 표현됐다.
▲이슬기 ‘이불 프로젝트 U’ 설치 전경. 사진 =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밀기’는 마름모꼴과 오리발을 반구형으로 형상화한다. ‘새 발의 피’는 분홍색 발 모양에 붉은 동그라미가 눌려 있다. ‘수박 겉핥기’는 초록 타원형과 붉은 사각형이 뚜렷이 대비를 이루면서 분리된다.
속담에 담긴 의미들은 간결한 색상과 도형으로 뚜렷하게 표현하기 위해 30년 경력의 통영 누비 장인이 한줄 한 줄씩 박음질로 제작했다.
이슬기 작가는 “어느 날 집에 있던 70~80년대 여름용 누비이불을 보다가 결의 모양에 매료됐다. 여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속담을 풀어내면 재미난 결과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작업이 여기까지 왔다”며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는 추상적 이미지를 한국적 형태인 이불에 옮겨다 놓았다”고 말했다.
음양오행의 오방색을 접목
처음에는 전통 색깔에 사로잡혔고 이후 자연스럽게 색깔과 문양에 담긴 철학에 주목한 작가는, 음양오행설에서 사방(四方)을 색깔로 보았던 것을 접목했다. 오랫동안 머릿속에 인상적으로 남아 있던 빛깔들에 전통공예와 속담이라는 설화적 요소가 덧붙여져 새로운 예술품이 탄생했다.
전시장 한 쪽 공간을 ‘밖’으로 규정한 작가는, 10년만의 한국전을 위해 ‘분화석’이라는 작품을 설치했다. 파주 강가에서 퍼온 5톤 분량의 진흙으로 사람 크기만 한 공룡 똥을 형상화했다.
작가는 똥이라는 프랑스 욕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분화석이라는 새로운 ‘욕’이 나오길 기대한다. 분화석은 ‘똥의 화석’이자 ‘욕의 화석’이라는 의미다. 분화석은 이미 오래 전 멸종한 동물의 생태를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의 의미와 땅의 역사를 담은 개체이지만, 똥이라는 해학성 역시 갖는다.
▲이슬기 작가의 전시회 중 ‘밖’에 설치된 ‘분화석’ 작품. 사진 =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이슬기는 미술관에 똥 화석을 세움으로써 고급 예술의 가치 체계에 대해, 그리고 한 발 더 나가 2008년 이후 심각하게 휘청거리면서도 아무 문제도 없는 듯 시침 뚝 떼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속담은 한 지역 공동체의 삶의 지혜를 담은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분화석은 아득한 옛날 한 지역의 역사가 외형화한 영혼이기도 하다. 누비이불에 담긴 전통, 분화석에 담긴 원시는 서구 현대 미술의 비평이나 과학적 개념들을 의식적으로 거스른다.
극적 대비를 이루면서도 이불과 똥이라는 친숙한 소재를 통해 해학으로 연결하는 흐름은, 유희적 소통을 시도했던 이슬기 작가의 이전 작업들과 맞닿는다.
이 작가는 1992년부터 파리에 거주하며 활동 중이다. 2014 광주비엔날레 ‘터전을 불태우라’, 2012 라 트리애니얼, 팔레 드 도쿄 ‘강렬한 근접’, 2009 보르도 비엔날레 ‘이벤토’, 2007 광주비엔날레 ‘애뉴얼리포트’ 등 주요한 국제 전시에 참여했다. 멜버른의 빅토리아 내셔널 갤러리에 작품이 소장됐다.
왕진오 기자 wangpd@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