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 플라토 ‘그림, 그림자’전]변방으로 밀린 그림의 반격
▲브라이언 캘빈, ‘캔과 풍경(로빈)’ 설치 모습. 사진 = 왕진오 기자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왕진오 기자) 디지털 스트리밍과 SNS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불규칙하고 파편화된 이미지의 혼돈 속에서 세상을 인식하는 데 익숙하다.
뉴미디어와 대형 설치작업이 대세를 이루는 최근 미술의 중심에서 오랜 시간 변방으로 밀렸다고 치부되던 회화가 최근 전 세계적으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국제적 추세에 주목한 삼성미술관 플라토가 차세대 작가들의 실험적인 작품을 통해 현대 미술에서 회화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그림/그림자 - 오늘의 회화’전을 3월 19일 시작했다.
전시에는 헤르난 바스, 리넷 이아돔-보아케, 데이나 슈츠, 브라이언 캘빈, 백현진, 리송송, 셰르반 사부, 빌헴름 사스날, 박진아, 질리언 카네기, 조세핀 할보슨, 케이티 모란 12명의 35점 작품이 함께한다.
▲리송송, ‘장군’, 캔버스에 오일, 260 x 170cm, 2011.
플라토 측은 “오늘날 역설적으로 ‘회화의 기원’으로 돌아가 매체의 본질을 성찰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플리니우스(23∼79)는 77년 ‘박물지’(고대 세계에 알려진 자연학적인 지식을 집대성한 일종의 백과사전)에서 “코린토스 지역의 부타데스라는 도공의 딸이 곧 떠나갈 연인의 그림자를 벽에 따라 그린 것이 인류 최초의 그림”이라고 기록했다.
이 일화는 오늘날 선포된 ‘회화의 죽음’ 만큼이나 하나의 허구적 신화에 불과하지만, 디지털 영상 기술의 발달로 무한한 이미지가 생산-소비되는 이 시대에 매체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는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오늘날 기술의 발전은 누구든지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정보를 수집하고 소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많은 작가들이 정보의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하며 회화의 긴 역사를 새롭게 탐색하고 있다.
폴란드 출신 빌헴름 사스날(43)은 대중 매체의 스펙터클과 역사적 아카이브는 물론 사적인 가족사진까지 작업에 담는 등 주제에 한계가 없다. 그의 화법 또한 엄격하게 미니멀한 스타일에서 극적인 표현주의적 붓질에 이르기까지 매우 자유롭다.
▲박진아, ‘여름 촬영’, 캔버스에 오일, 220 x 182cm, 2015.
작가의 작업에 있어 유일하게 일관된 특징은 이미지의 세부적인 디테일에 매우 인색하다는 점이다. 이 같은 방식으로 그는 자신의 이미지들을, 자신만이 아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비밀스런 내러티브가 아니라 바라보는 관객이 열린 해석을 할 수 있도록 열어 놓는다.
리송송(42)은 1989년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중국에서 과도기적 세대에 속한다. 이들에게 역사란 항상 기억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잊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미디어 매체에서 수집한 이미지를 통해 화면을 불규칙한 그리드로 나누고, 다양한 색과 두꺼운 임파스토(유화 물감을 두껍게 칠해 질감 효과를 내는 기법)로 칠한다.
작가의 대부분 이미지들이 역사적 맥락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지만, 그는 각각의 그리드에서 디테일의 강조와 삭제를 모순적으로 대조시키는 양가적인 태도로 직접적인 정치적 발언을 회피한다. 파편화된 그의 회화는, 때로는 선명하고 때로는 흐릿한, 쉽게 포착하기 힘든 인간의 기억 그 자체와 닮아 있다.
디지털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그림의 존재 이유를 말하다
하나의 화면에 다수의 스냅샷 사진을 결합하는 박진아(41)의 작업은 회화의 영역 안에 내재하는 다층적인 시간성을 탐색한다. 작가에게 시간과 그 일시성은 중요한 주제다. 그의 작품들은 미술관의 설치 과정, 공연 리허설, 야외 촬영장 등 간과된 ‘사이’의 순간들을 재구성한다. 작가의 느슨하고 빠른 필치는 사진이 포착한 즉각적인 순간의 감각을 모사하는데, 인물들의 예기치 못한 제스처와 의도적으로 생략된 세부 묘사는 이를 더욱 강조한다.
▲빌헴를 사스날, ‘무제(캐스퍼와 앙카)’, 캔버스에 오일, 180 x 220cm, 2009.
동시에 작가 특유의 색감과 회화적 표현이 드러나는 정교하고 섬세한 화면의 레이어들은 회화의 물리적인 제작 과정으로 축적된 또 다른 차원의 시간을 시각화한다. 이미지이자 오브제로서 동시에 존재하는 회화의 근본적인 특성을 성찰하는 작업이다.
브라이언 캘빈(46)은 인물의 형상을 회화적 표현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단순해 보이는 캘빈의 초상화는 대부분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그려낸 인물들로 로스앤젤레스 특유의 ‘쿨’함을 포착한다.
작가는 인물들의 리얼리즘보다는 그들의 존재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데 집중한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순수하게 회화를 위해 존재하는 이미지들로, 이미지를 위해 회화가 존재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한국, 영국, 미국, 중국, 루마니아, 폴란드 등 다양한 출신의 12명 작가들은 서로 다른 주제와 스타일, 그리고 문화적 맥락으로 작업한다. 디지털 이미지부터 레디메이드(기성품을 의미하는 모던아트에서 오브제의 장르 중 하나)까지 무한히 확장하는 현대 회화의 맥락 안에서도 이들은 붓과 물감, 그리고 캔버스로 이루어지는 가장 전통적인 붓질의 언어로서 매체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관람객은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붓질의 감각을 통해 회화만이 줄 수 있는 깊은 감동과 열린 해석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6월 7일까지 전시.
왕진오 기자 wangpd@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