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작가 - 이헌정]“어설픈 예술가보다 창의적 장사꾼이 좋다”
아트사이드 갤러리 ‘퍼스니지(Personage)’전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왕진오 기자)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 힙합 거장 퍼프 대디, 건축가 노먼 포스터, 설치 미술가 제임스 터렐과 수보다 굽타 등 할리우드 유명 배우와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작품을 소장해 화제를 모은 바 있는 작가 이헌정(49)이, 도자기에 자개로 수놓은 작품들과 얼굴이 그려진 작품들을 4월 16일∼5월 12일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 갤러리 전관에 펼쳐놓는다.
이 작가는 많은 전시를 진행하면서도 몇 년에 한 번씩 중요한 터닝 포인트를 주는 전시를 진행했다. 이번 전시도 15년간 자신이 천착했던 인간 주변의 것들에서 벗어나 앞으로 10여 년간 진행할 인간에 대한 탐구라는 주제로 나아가기 위한 이정표를 세우는 중요한 전시라고 강조했다.
▲Vase, 28x25(h), 24x29(h), 23x30(h), 세라믹, 장작가마 소성, 2014. 사진 = 왕진오 기자
“2년여 전 그 동안의 전시 과정을 엮은 책을 출간하면서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이 인간 주변에 존재하는 항아리나 그릇, 가구 등이었던 것을 알게 됐죠. 이를 위해서 여행이라는 타이틀을 사용했는데, 이번 전시부터는 인간에 대한 탐구를 해보자는 방향 설정의 작품을 보여줄 것이다.”
전시장 입구에 마치 깡통 로봇 같이 세라믹으로 만든 커다란 자화상이 서 있다. 사람의 얼굴 모양으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양쪽에는 ‘분노의 손’이라고 명명한 철로 만든 기괴한 팔이 붙어 있다. 분노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예술가를 형상화한 이 작품은 이헌정 작가의 그 동안 삶의 여정을 그대로 투영한 것이어서 더욱 눈길을 모은다.
“작업을 하기 전에 꼭 화를 내는 것 같아요. 작업실 동료와 부인에게까지도. 싸움닭 같이 보이지만 이를 통해 얻어지는 외로움이 작품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이 느낌 때문에 전시를 앞두고는 항상 주위 분들과 언쟁을 벌여서, 최근에는 주위 분들이 슬슬 저를 피하더라고요.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외로움이 작품을 만드는 비타민 같은 요소로 작용해 이제는 싸움이 저에게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헌정 작가의 동물상. 사진 = 왕진오 기자
이헌정의 작품을 관통하는 커다란 주제는 집이다. 이전에는 인간에 가장 가까운 것들인 그릇이나 가옥 형태였다. 집이란 의미와 함께 작품에 단어들이 새겨지면서 상징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여행이라는 주제의 전시를 진행하면서, 집에 대학 애착을 강하게 보였다. 여기서 꼭 필요한 것은 바로 ‘귀환’이라는 상대적인 단어다.
“여행의 존재는 귀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귀환이 없는 여행은 방황인 것 같습니다. 양평에 있는 집 문틀에도 ‘Camp A’라고 써 놨어요. 귀환을 보장하는 의미로서의 상징물이죠.”
▲자화상, 95x46x160, 세라믹, 철조, 2015.
그가 여행을 주요 테마로 삼은 것은 특정 도시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한다. 그냥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공간에서 벗어나 자신을 바라보는 계기로 삼고 싶다고 했다. 어디를 가는 것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무게를 둔다는 이야기다.
“어려운 예술보다 창의적으로 살아야 할 때가 된 듯”
타이틀보다는 삶 중요하다며 뒤늦게 건축학 배우기 시작
‘퍼스니지(Personage)’라고 명명된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자기에 옻칠을 하고 자개로 장식하는 새로운 기법을 선보였다. 전통적 표현기법을 이용해 새로운 미감을 만들어낸 작품들이다.
그의 옻칠은 전통적인 검정이나 마호가니 색부터 빨강, 파랑 빛을 띤 세련되고 생생한 색의 마감까지 매우 다채로운 이미지를 연출한다.
특히 전시장 선반에 나란히 배치된 구멍 뚫린 도자기들은 작가가 미국 레지던시(화가·작가· 음악가 등이 특정 기관 소속으로 작업하는 숙소 공간)에서 작업해 온 신작들로, 도자기를 빚어 채 마르기 전에 AK 47 자동소총으로 구멍을 낸 작품들이다. 인위적으로 쏜 구멍에서 마치 피가 흐르듯 유약의 번짐이 불가마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조화에 매료된 작품이다.
이헌정 작가가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작업의 주요한 소재로 사용하는 것은 세라믹 즉 도자이다. 세라믹은 만든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마에서 구워질 때 갈라지거나, 날씨나 기압에 따라 색깔이 변한다. 도예를 다루는 사람들이 작품을 구워내면서 자신만의 색상을 만들려 하지만, 이헌정 작가는 표면이 갈라지든, 색상이 변하든 개의치 않고 단지 변화되는 사건에 관심을 갖는다.
이에 대해 그는 “디자인된 영역과 예술의 영역과는 차이가 많다. 디자인은 건축 설계처럼 계획과 결과물이 100%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은 창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며 미리 계획한 것보다 자연스러움에 무게를 둔다.
동물 모양의 도자 작업은 어른 키만큼 큰 사이즈부터 실내에서 의자처럼 쓸 수 있는 작은 동물 도자까지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졌다. 크기에 따라, 사람에 따라 그 쓰임새가 달라질 수 있다는 식이다.
이헌정 작가는 일상적인 그릇에서부터 추상적인 오브제와 설치작업, 벽화에 이르기까지 작업의 폭이 넓다. 단순히 ‘도예가’로만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은 작가이다.
자신의 장르에 대해 조각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조각이면 어떻고 가구면 어떠냐”며 특정한 타이틀은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도예로 보이든 디자인으로 보이든, 창의적인(크리에이티브) 자신이 알려지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어설픈 예술가라는 타이틀을 갖는 것보다 창의적인 장사꾼으로 불려도 좋은 것 같습니다. 이제는 어려운 예술보다는 창의적으로 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네요.”
▲동물, 54x36x45, 세라믹, 옻칠, 나전, 2014.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생산자를 존중한다는 작가, 그가 추구하고 이뤄내려는 창의적 삶의 출발이다.
사람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것들에 대해 사색하고 깊이 들어가는 성향은 그의 무의식에 자리해온 작업관이자 인생관이다. 뒤늦게 건축을 공부하며 작업의 범위를 넓힌 것도 어쩌면 삶을 영위하는 공간으로서의 구조물에 대한, 그리고 그 장소를 영위할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해보지 못한 것을 개척하는 작업 방식에서 보이지 않게 중심을 차지하고 이끌어온 힘은 결국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다. 공간적으로는 사람과 그 주위를 둘러싼 대상으로 작품의 주제를 삼았다면, 시간적으로는 그 대상에 시대의식을 담아내는 것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스스로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보다 시선을 돌려 세상을 바라보면서 더 깊고 의미 있는 여행이 됐듯, 여행에서 가져온 선물 같은 작품 사이에서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이헌정 작가는 홍익대학교와 동대학원 도예과를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대학원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1996년 이후 지금까지 27회 개인전과 더불어 From Korea Function & Object D’Art(도쿄 힐사이드 테라스), 아티스트 가든(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BE SMART WITH 3D(서울 아트사이드갤러리), 한국의 분청전(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디자인 마이매미(바젤) 등 다수의 그룹전과 아트페어를 통해 작품을 선보였다.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스칼라쉽 지원을 받았고 서울현대도예 공모전 특선, 서울특별시장 표창장 등을 수상했으며, 세계 최대 벽화인 청계천 정조대왕 반차도 도자벽화, 지하철 9호선 사평역 도자벽화 등 공공미술 영역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왕진오 기자 wangpd@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