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가 - 한국화 세 시선]법고창신 하고, 물我一體 하고…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왕진오 기자) 서구 미술과 설치작업 그리고 미디어를 기반으로 한 작품들이 화랑가를 점령하고 있는 가운데, 수묵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회화적 정체성을 확장해 나가는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장에 연이어 걸리고 있다. 먹이 지닌 사유성을 탐구하고, 먹의 철학적 의미와 재료의 확장을 시도하며, 수묵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회화적 정체성을 확장해 나가는 작품들이다.
그동안 한국화에 대한 논란이 분분했다. 1920년대부터 서양화와의 구분을 위해 사용했던 ‘동양화’라는 명칭은 일제가 만든 용어라고 비판하며 이를 주체적으로 바꾼 ‘한국화’라는 명칭이 설득력을 얻었다.
▲소정 변관식, ‘내금강단발령(內金剛斷髮嶺)’, 종이에 수묵담채, 32 x 24cm, 1973.
공식적으로 한국화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1981년 12월 문교부에서 교육과정을 개편하고 이에 맞춰 1983년 개정된 미술 교과서부터로 본다. 이후 교육계에서는 동양화라는 명칭 대신 한국화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한국의 전통적인 기법과 양식으로 그려진 그림을 서양화와 구별하기 위해 부르는 한국만의 용어인 한국화를 고집하기보다는, 동양화라고 불리는 그림을 한국화로 부르자는 것이 미술계의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홍익대 동양화과 졸업생 모임 신묵회의 ‘법고창신’전
1983년 창립된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졸업생들 가운데 먹을 다루는 이들의 모임인 ‘신묵회(新黙會)’ 회원 중 국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한국화 작가 14명이 6월 17∼23일 서울 인사동 갤러리그림손에서 ‘법고창신’전을 진행한다.
▲송창애, ‘Waterscape_물풀’, 분채, 장지, 물 드로잉, 200 x 300cm, 2015.
‘법고창신(法古創新)’은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으로, 옛것에 토대를 두되 그것을 변화시킬 줄 알고 새것을 만들어 가되, 근본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법고로부터 창신이 나오기까지 작가 자신만의 한국화 정체성을 찾아가는 각기 다른 시도를 하나로 모은 전시다.
‘법고창신’전은 수묵을 기반으로 먹의 재료적 물성 및 미학적 한계를 뛰어넘어 현실의 삶 속에서 부딪치며 느끼는 감성 체험으로서 먹의 사유성을 탐구하고, 먹이 갖는 철학적 의미와 재료의 확장을 시도한다.
▲송창애, ‘Waterscape_물풀’, 분채, 캔버스, 물 드로잉, 180 x 244cm, 2015.
이 중심에는 사생의 흔적이라는 대상과의 직접적인 교감과 소통이라는 밑바탕이 있다. 작가 자신들만의 내면적 정화를 통한 정체성이 회화적 조형 요소와 결합돼 각기 다른 창작 결과물이 생성됨을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것,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은 기존의 것을 한편으로는 보존하고 한편으로는 파괴해 새로운 형식적 충돌을 만들고 그것의 가치가 온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 될 때 가능하다. 새로운 어떤 것은 전통과 현대의 해석보다 공적인 의미와 시각을 부여함으로써 사회적 가치의 어떤 지점을 상기시켜야 한다.
신묵회의 전시에 대해 류철하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은 “동북아시아에서 수묵은 자아를 바라보는 특수화된 내면이지만, 서양과 현대라는 그림자에 맞서 내재된 근대성을 발견하는 욕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수묵은 근대성의 전개 속에서 정체성을 확인하고 보편 문화에 합류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전개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임태규, ‘월하탐매’, 한지 위에 백토 수묵담채, 80 X 80cm, 2015.
새로운 묵, 새로운 표현을 표방한 신묵회는 현대화의 새로운 조형적 미의식을 찾기 위해 전통이라는 조형에 기본을 두면서 실험을 다하는 그룹이다.
갤러리이즈 개관 7주년 기념 ‘근대 한국화의 거장’전
권인경, 김남수, 박경민, 박성식, 박순철, 양정부, 왕열, 이성현, 이여운, 임진성, 임태규, 장태영, 최순녕, 하태진 등 신묵회 회원들은 새로운 감각적 힘과 상상을 위해 고법을 자신만의 법으로 바꾸는 길이 무엇인지 음미한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 이즈가 17일부터 ‘근대 한국화의 거장’전을 진행한다. 개관 7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전시는 소정 변관식(1899∼1976), 청전 이상범(1897∼1972)을 비롯해 의재 허백련(1891∼1977), 이당 김은호(1892∼1979), 심산 노수현(1899∼1978), 고암 이응노(1904∼1989), 운보 김기창(1913∼2001) 등 근대 한국화 거장들의 명작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여운, ‘상원사 수광전’, 캔버스에 수묵, 97 x 163cm, 2015.
특히 소정 변관식의 1973년 작 ‘내금강단발령(內金剛斷髮嶺)’은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세상에 공개된다. 단발령 고개에서 멀리 솟아오른 1만 2천 금강산 봉우리를 둔중하게 담아낸 수작이다.
소정은 붓에 먹을 엷게 찍어 그림의 윤곽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먹을 칠해나가는 적묵법(積墨法)과 진한 먹을 튀기듯 찍는 파선법(破線法)의 독특한 화법을 활용해 자신만의 한국적 풍경을 선보였다. 전시는 6월 30일까지.
한국화의 새로운 변주, 송창애의 ‘워터스케이프 - 물我一體’
‘물로써 그린 물 그림’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갖고 있는 ‘워터스케이프’를 선보이는 송창애 작가는 물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생명의 본질과 존재의 원형에 대한 시각적 고찰을 다룬다.
주체와 객체, 관념과 현실, 물질계와 정신계 등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항대립적 관계로부터 벗어나 바깥 사물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비분별지(모든 사물을 공평무사하게 대하고 긍정한다)의 세계를 물이라는 매개를 통해 드러낸다. ‘물我一體’는 작가 송창애가 물(water)과 자신의 혼연일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전시를 꿰뚫는 화두다.
송 작가는 “비정형의 물을 그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애초에 물의 외형적 재현보다는 물이 지닌 유동성, 가변성, 투명성을 통해 생명의 본질과 존재의 원형을 시각적으로 조형화 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고암 이응노, ‘굴뚝청소원’, 종이에 수묵담채, 34.8 x 34.8cm.
즉흥성과 우연성의 개입은 워터스케이프의 필수불가결한 조형적 특징 중 하나다. 끊임없이 흐르는 물을 컨트롤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저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고 물과 함께 흐르는 것이다.
작가에게 블루는 현실적인 듯 비현실적인 색이다. 투명한 블루는 자궁처럼 평안한 감정을 주는 동시에 자신을 현실 너머 어딘가로 데려가는 힘을 부여한다. 뭉치고 흩어지는 가운데 푸른 물속에서 유영하며 춤을 추는 물풀은 새로운 생명체를 형성하고 원초적인 욕망의 힘을 느끼게 한다.
고충환 미술평론가는 “물을 그리면서 물 자체(아마도 칸트의 물 자체와 그 의미가 다르면서 통할)를 그리고 싶었고, 물에 동화되고 싶었고, 그렇게 물을 그리면서 사실은 나를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곧 물이고 물이 곧 나라고 말하고 싶었고, 내가, 존재가, 세계가, 우주가 다름 아닌 물이라고(아님 물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고 송창애 작가의 작품을 평했다. 전시는 7월 14일까지.
왕진오 기자 wangpd@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