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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人] “이정지! 지금 뭐하지? 그리고… 쓰고… 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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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74호 김연수 기자⁄ 2016.03.17 08:56:29

▲이정지 작가. 사진 = 김연수 기자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김연수 기자) 커다란 그림은 멀리서 봐야 한다. 비슷한 색감이 겹쳐진 평면에서 시각적인 어떤 형상이 떠오르기 시작할 때, 이어 천천히 가까이 다가가면서 실체를 확인한다. 그 실체는 작가의 감정이 남긴 흔적일 수도, 켜켜이 쌓인 사유의 흔적일 수도 있다. 그 발견의 순간 관람자는 작가의 감정이나 생각을 공유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자신의 상태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것은 단색 추상화를 바라보는 방법의 하나다.

최근 몇 년간 국·내외 미술 시장을 휩쓸고 있는 단색화 계열 작가 중 유일한 여류화가로 알려진 이정지의 개인전이 인사동 선화랑에서 3월 16일~4월 15일 열리므로 이런 감상법을 시도해 볼만하다.

“나를 가슴 뛰게 하는 재료”

이정지의 작업은 이른바 ‘단색화’로 알려진, 즉 하나의 색감을 위주로 수많은 붓질로 채운 평면 추상회화다. 1941년생으로 올해 75세를 맞는 나이만큼의 세월이 캔버스에 압축돼 스며든듯하다. 유화물감이라는 서구 재료를 썼는데도 쪽빛, 먹색, 주묵색, 베적삼 색 등 자연에서 얻어온 우리 고유의 색감이 발현되는 것이 신기하다.

▲작가가 다 쓰고 난 물감 튜브 더미. 사진 = 김연수 기자

작가는 반세기가 넘게 작업을 해왔지만 아직도 재료를 보면 가슴이 뛴다고 말한다. 자택의 반지하 작업실에는 다 쓴 물감 튜브가 산처럼 쌓여 있다. 지금까지 약 30회의 개인전을 거치면서 유화를 떠난 적이 없다. ‘시간의 흔적’들을 담아낸 초창기 작업과도 어울리지만, 현재 그녀가 강조하는 것은 ‘화면 속에서 숨을 쉬는 것’이다. 누가? 재료(물감)가.

▲「○」-23(An die Musik). 캔버스에 오일, 60 x 40cm. 2016.

▲「○」-11(The Great Lawn). 캔버스에 오일, 100 x 100cm. 2016.

현대 미술가들은 아크릴 물감을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이 작가는 “아크릴 물감은 비닐막을 형성해 숨을 쉴 수가 없다”고 표현한다. 무생물이 숨을 못 쉰다는 게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해 재료를 다뤄본 사람은 안다. 재료가 사람의 마음대로 조종되는 게 아니라 각각의 특성을 간직하고 반응한다는 사실을.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들의 호흡, 즉 산소와 접촉해 굳는 시간이 중요해진다.

재료의 호흡이 길다는 것은 작가의 행위와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길다는 뜻이며, 추상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물질성에 집착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작가가 사용하는 그림 도구들. 사진 = 김연수 기자

작가의 작업에서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는「○」와 숫자 그리고 괄호 안의 글자로 이뤄진 제목이다. 숫자는 보통 작품이 완료된 날짜나 특별한 날을 의미하고, 괄호 안의 글자는 특별한 메시지나 추억하고 싶은 것, 주술적 메시지 등 작품에 사용된 소재를 의미한다. 그녀의 최근작에 가까울수록 모든 작품에 제목으로 쓰이는「동그라미」에는, 동그라미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심상적 의미도 있지만, 자연의 법칙 중 순환의 원리를 담은 전 우주적인 의미 또한 있다. 제목에 존재하던 기호 동그라미는 근작에선 캔버스 안에서도 발견되면서 그 의미를 더욱 강하게 전달한다.

우주의 기호 「○」

작가가 흥미를 가지는 또 다른 관심 분야는 기호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소통을 강조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기호를 연구하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1995년 작품에 등장하기 시작한 문자(한자)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추상화 된 형태로 독립적으로, 혹은 앞서의 동그라미 기호와 함께 캔버스에 나타난다. 상형문자인 한자가 가지는 본질적인 형상과 메시지를 담은 소재를 일치시키는 과정처럼 보인다.

▲이정지 작가의 작업실 전경. 자택의 반지하층을 개조해 34년째 같은 자리에서 작업하고 있다. 사진 = 김연수 기자

여성과 한국(동양)인 그리고 철학적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 작가라는 이정지의 정체성은 그녀의 전 생애 작업에서 일관되게 표현된다. 한국 미술사에서 단색화를 끄집어 내 국내외 미술 시장을 흔든 최근 미술계의 흐름은 동양 철학에 심취한 데서 출발했다. 하지만 그런 흐름은 이미 그녀의 작품에 꾸준히 담겨 있어 그녀에겐 새로운 것이 아니다. 환경과 순환 같은 우주적인 거대 담론조차 그녀는 생명을 생산하는, 혹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어머니로서의 여성 정체성을 숨기지 않은 채 바라본다. 

작가는 “이 모든 방법은 체질화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원초성(본질, 원류)에 대한 탐구 및 그에 따른 물질에 대한 반복적이고 끊임없는 연구는, 작가이기 때문에 혹은 자신이 여성으로 태어났기에 본능적으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22(An Die Musik). 캔버스에 오일, 100 x 100cm. 2016.

예컨대 그녀의 작업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한국적인 색채는, 양반집에서 태어나 매년 몇 차례씩 제사 때마다 입어야 했던 적삼의 색, 또는 학창시절 내내 입어야 했던 검정 단색 교복으로부터 ‘체질화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체질화’ 된 작업과정

단색화 작가 중 하나로 분류되는 작가는, 최근 몇 년간 국내외에 몰아친 단색화 열풍에 대해 “소용돌이에 휩쓸린 것 같다”고 했다. 홍익대에서 18년간 교편을 잡은 교육자로서 그는 ”역사 속 사조를 돌아보고 연구하는 것은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작금의 상황은 단색화의 의미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모든 것이 금전화되고 있다”며 “내 그림은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결과인데도 미국에서 발생한 미니멀리즘 혹은 유럽의 앵포르멜에서 영향을 받은 회화들과 함께 싸잡아 끄집어내어졌다”고 비판하길 잊지 않는다. 

▲작업실의 작가 노트. 사진 = 김연수 기자

작가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전시를 여는 선화랑에도 과거 작품들은 내놓지 않겠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는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며, 아직도 세상에 대한 호기심에 끊임이 없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기호에 대한 호기심’을 시작으로 그녀는 앞으로 “한자가 만들어진 시기인 기원 전 4000년으로 시간여행을 할 것”이라고 했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는 전형적인 표현도 작가 이정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늙지 않는 작가 이정지는 “심장이 없는 사람이 어딨냐”며 “작가의 작품을 금전적 목적이 아닌, 타는 가슴으로 내놓은 결과로 봐주기”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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