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아담하고 귀여운 박새가 서랍에 앉아 실을 문 모습. 2011년 만났던 정해윤 작가의 작품에 대한 이미지는 그랬다. 어언 5년이 지난 2016년.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플랜 B’전에서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2011년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작품에서는 사뭇 변화가 느껴졌다.
과거 작품 속 주요 배경이었던 서랍 대신 금색, 은색 실타래가 등장했고, 실을 물고 있던 박새들은 이제 실 위에 옹기종기 앉았다. 그런가 하면 전혀 박새와 서랍이 등장하지 않는 작업도 보인다. 커다랗고 긴 파이프들이 서로 엉켜 있는 ‘디퍼런스(Difference)’와 가지각색의 크기와 형태의 돌멩이, 그리고 거기에 어우러진 시계 초침까지 담은 ‘플레이그라운드 오브 라이프(Playground of Life)’ 등 4년 만에 국내 개인전으로 돌아온 그녀는 작품이 보여주듯 그간 많은 일을 겪은 듯 했다.
먼저 박새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은 박새 이미지로 많이 알려졌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박새가 존재하는 뒤, 바로 배경이다. 작가가 주목하고 또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은 세상살이이기 때문이다.
“박새는 저 자신, 더 나아가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존재로 볼 수 있어요. 왜 많은 새 중 하필 박새를 그렸냐는 질문을 많이 들었어요. 과거 공부하며 힘든 시절, 우연히 보고 그린 박새가 제게 큰 위안과 힘이 된 존재였죠. 그런 박새에 자연스럽게 저를 투영했고, 더 나아가 사람들의 모습까지 담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전작에서는 여러 열리고 닫힌 서랍을 통해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야기했죠. 서랍마다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셈이에요. 그리고 그 서랍 위에서 실을 서로 물고 있는 박새의 모습으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했고요.”
이번엔 세상을 보여주는 주요 소재로 실타래가 쓰였다. ‘운명의 실타래’라는 말이 있는데, 작가는 오히려 운명론보다는 다양한 선택에 의해 달라질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을 바라봤다. 서랍 시리즈에서 입에서 실을 놓칠까봐 꽉 물고 있던 박새들은 이번 신작에서는 실 위 여기저기에서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소 편해진 모습이다. 실의 여러 갈래에서 ‘어디로 가볼까’라며 호기심어린 수다를 떠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림을 보면 실타래의 방향이 일정하기보다는 여기저기 다양하게 펼쳐져 있는 걸 볼 수 있어요. 마치 ‘사다리 타기’처럼요. 다른 점이라면, 사다리 타기는 마지막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데, 그림에서는 그 목적지가 명확히 나타나지 않아요. 이게 바로 플랜 B예요. 흔히들 첫 번째 계획 달성이 실패했을 때의 차선책으로 플랜 B를 마련하는데, 저는 첫 계획이 실패했다고 플랜 B로 가는 게 아니라,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실패했으니 플랜 B로 가자!”가 아니라
“플랜 B나 C를 가도 실패는 아냐”
인생을 살아갈 때 오로지 플랜 A만 바라보고 달려가다가 좌절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작가는 플랜 B, 또는 또 다른 플랜 C의 길을 가도 괜찮다고, 그렇다고 실패하거나 틀린 인생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어떻게 인생이 오엑스(OX) 퀴즈처럼 정답을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수많은 삶의 가능성을 함께 교류하고, 공감하고 싶었던 작가의 바람이 담긴 작업이다.
세상, 그리고 교류에 대한 관심은 신작 ‘디퍼런스’와 ‘플레이그라운드 오브 라이프’에서도 이어진다. 먼저 디퍼런스엔 굵은 파이프들이 서로 엉켜 있다. 그런데 그게 답답해 보이기보다는 서로 유연한 형태로 길을 내어주고 있는 것 같다.
“뒤엉킨 파이프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고 마주하게 되는 다른 존재들과의 만남을 상징해요. 실타래와도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엉킨 실타래를 풀어나가듯 사람들의 관계들은 끊어질듯 또 이어지죠. 파이프도 그런 삶의 한 과정을 보여줘요.”
틀린 게 아닌 다른(Difference) 삶의 모습을 접하고, 서로 계속해서 연결돼 살아가는 인생사를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플레이그라운드 오브 라이프’도 흥미롭다. 흰 배경 앞에 다양한 돌멩이들이 시계 초침과 함께 떠 있다. 돌멩이들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 그리고 시계 초침은 그들의 삶에 흘러가는 시간을 이야기한다.
“왜 돌멩이를 소재로 썼냐고요? 돌멩이는 사람과 비슷한 점이 있어요. 나무, 물 등 자연은 환경에 따라 빠르게 변해요. 그런데 돌멩이는 그렇지 않아요. 모가 나고 컸던 바위가 수 천 년의 세월 동안 물과 바람을 맞으며 깎이고 깎여서야 나중에 맨들맨들한 돌멩이가 되죠. 사람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들 해요. 습관과 성격을 바꾸기 힘들죠. 그런 점이 돌멩이와 비슷해 보였어요. 또 흔히들 ‘모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랬던 사람이 수많은 풍파를 겪으며 조금씩 온순해지는 과정이 바위에서 돌멩이로 변하는 모습과도 비슷해 보였고요.”
작품 속 돌멩이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이 수많은 돌멩이들을 한 화면에 어우러지게 하면서, 개별의 삶이 모여 공동체를 이룸을 보여준다. 결국엔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서랍 시리즈부터 이번 ‘디퍼런스’와 ‘플레이그라운드 오브 라이프’까지 상통하는 주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플랜 B’를 주요 주제로 붙였다. 정답을 추구하는 게 아닌, 다양성을 인정해 가며 성숙해지는 삶을 위해.
“작업을 하면서 저는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또 멀리 떨어진 게 아닌, 서로의 삶을 공감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고요. 제 그림을 그냥 지나치는 게 아니라 앞에 서서 조금이라도 공감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아요. 이번 전시는 플랜 B로서의 제 삶을 보여주는 자리이기도 해요. 저는 현재 작업을 할 때 정말 행복하고, 그 삶에 만족하고 있어요. 이 삶이 플랜 A냐 아니냐는 중요한 게 아니죠. 앞으로의 삶도 다채롭게 그려가고 싶어요.”
이번 전시에서는 서울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정해윤의 독특한 특색의 작품을 살펴볼 수 있는 자리도 된다. 동양화 물감과 금분, 은분을 섞어 장지에 겹겹이 먹여 마치 유화 같은 질감을 통해 동양화의 현대적 미감을 보여준다. 또한 화폭 안에 동양적 색조와 서양의 공간분석적 사고를 아우르며 장르를 넘나드는 매력으로 눈길을 끈다. 회화 작품 30여 점이 전시된다.
특별히 이번 전시에서는 그녀가 벽화를 그리는 모습도 볼 수 있을 전망이다. 전시실 한 공간에 서랍 그림을 크게 그리는 작업을 5월 2일부터 시작한다. 4년 만에 시작된 그녀의 ‘플랜 B’ 작업. 다음엔 플랜 C가 등장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전시는 가나아트센터 전관에서 5월 4~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