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윤종석 작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 주사기 쇼핑에 나선다. 중간 사이즈 크기의 주사기를 주문한 뒤, 커다란 화면 앞에서 붓이 아닌 주사기를 든다. 물감을 곱게 개어 주사기에 넣고 화면에 총총총 점을 찍는다. 물감이 마르면 다시 화면에 주사 놓는 과정의 반복이다. 최근엔 이 주사기로 점뿐 아니라 선도 긋기 시작했다. 화면 위에서 여러 선이 마구 뒤엉키는 과정이 흥미롭다.
방식 자체도 독특하지만, 화면에 나온 결과물은 더욱 독특해 눈길을 끈다. 화면 속 주름이 가득 접힌 옷들은 처음엔 그저 구겨진 옷처럼 보인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닭, 개, 소 등 동물이나 총, 아이스크림, 전구 등 사물의 형태를 띠고 있는 모습이 발견된다. 그냥 보고 지나칠 화면이 아니다. 계속 화면을 쳐다볼수록 새로운 모양들이 튀어나온다. 최근엔 해골 등 섬뜩한 모양도 등장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작가, 머릿속이 궁금해진다.
윤 작가의 개인전 ‘플리(Pli: 주름)’의 현장인 롯데갤러리 에비뉴엘 아트홀을 찾았다. 이번 전시는 2000년대부터 주사기에 물감을 넣어 점찍기 작업을 진행해온 작업의 중간 점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초창기 작업부터 최근 새롭게 시도한 선 그리기 작업까지 함께 전시한다. 다양한 화면의 공통점은 주사기를 통해 그려진 그림이라는 것.
“처음엔 붓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그런데 뭔가 그림을 그리면서도 제 자체가 겉도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질감적인 측면에서 더 재미있는 느낌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모든 걸 다시 시작해보자고 마음먹었죠. 그때 여러 매체를 갖고 실험을 거쳤습니다. 그 과정 중에 주사기도 있었어요. 주사기를 쓰니, 손에 제대로 딱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죠. 그때가 점 시리즈의 시작이었습니다.”
작가의 점 작업 중 잘 알려진 것이 ‘가족’ 시리즈, 그리고 ‘옷’ 시리즈다. 점으로 아버지를 시작으로 가족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게 옷으로 이어졌다. 시작은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증명사진을 보고 점을 하나하나 찍어 큰 화면에 그렸다.
도둑가시 풀로 시작된 작가 주변 이야기
그의 아버지는 작가가 아주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나 추억이나 기억이 많지는 않다. 그런데 산소를 갔다가 돌아오는 어느 날 자신의 옷에 우연히 붙은 도둑가시 풀을 보는데,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아버지가 가까이 느껴지는 오묘한 기분이었단다. 도둑가시 풀이 옷에 붙어 있는 모습이 어떻게든 삶에의 의지를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과도 비슷하게 다가왔던 걸까.
“도둑가시 풀을 보고 아버지가 많이 떠올랐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옷을 보고도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죠. 초등학교 때 어느 날 택시에 실려 병원에 가신 아버지의 옷이 집에 던져진 상태로 있었어요. 아직도 그 옷이 기억나요. ‘저 옷처럼 일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세상을 떠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아무리 치열하게 살아도 결국엔 작은 흔적을 남기고 떠나는 인생. 그래서 더 주변을 돌아보게 된 것 같아요.”
그때부터 작가는 가족의 얼굴을 열심히 그렸다. 처음엔 하나하나 얼굴을 그려 당사자에게 선물을 해줄 생각이었는데, 가족들은 “이 그림들은 하나로 모여 있어야 의미가 있다”고 해서 ‘가족’ 시리즈는 옹기종기 모인 채 전시되기도 했다.
작가 주변에서 사회로 확대된 점 그림
작가의 화면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옷’이다. 화면을 보면 상상으로 옷의 주름 형태를 그렸을 것이라 여기는 경우도 있는데, 모두 실제로 시장에서 구입한 옷을 몇 시간, 또는 며칠에 걸쳐 접어서 형태를 만든 뒤 사진 촬영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들이다. 그냥 상상으로 그리면 옷 주름이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고집하는 방법. 정말 생각에 맞는 옷이 없으면, 동대문 시장에 찾아가 의뢰해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옷을 구한 뒤 볼륨감을 주기 위해 안에 휴지를 넣는 등의 방법을 통해 형태를 잡아나간다.
이 옷 그림들은 가족 그림을 통해 일단 자신의 가장 가까운 주변부터 살폈던 작가의 관심이 점차 사회로 확대된 결과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세상 속 숨은 주름, 즉 숨은 이야기를 짚어내는 과정이다. 한 예로 ‘지난 그때’에는 총의 형태를 띤 교련복이 등장한다. 이 작품은 2009년 즈음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아 그렸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몸소 겪은 세대이기도 한 작가는, 일부러 군복 느낌이 나는 교련복을 찾아 황학동시장을 며칠 동안 뒤졌다. 모두 여섯 종류의 교련복을 찾았고, 이 교련복을 총의 형태로 접어 주름을 만들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은 뒤 이를 보고 그림을 그렸다. 완성된 화면은 가로 518cm, 세로 194cm로 엄청난 압도감을 준다.
“그림을 그리면서 주변 사람들을 많이 보고, 또 보는 사람들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사람들의 이중성에 관심이 가게 됐어요. 사람들은 본래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대외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아요. 그 모습이 옷을 통해 상징적으로 느껴졌어요. 옷으로 자신의 실제 모습을 위장한 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거죠. 여기에 관심이 가면서 인간이 입은 껍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었습니다.”
옷으로 풀어낸 작가의 세상 이야기는 매우 다양했다. 그리고 이 옷 시리즈는 작가를 상징하는 대표 작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사회에서 다시 자신으로
그런데 작가는 최근에 또 다른 도전에 나서고 있다. 점을 찍는 것에서 나아가 이젠 주사기로 선을 그린다. 이야기의 중심 대상도 바뀌었다. 첫 시작이 자신의 주변 이야기, 두 번째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면, 이제는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자신이 실제로 보고 느낀 것들이 중심이 됐다.
선 작업 화면 중 보이는 고양이는 실제로 작가의 작업실에 잘 드나드는 길고양이다. 그리고 활활 타오르는 불과 상자도 보인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화장할 때 본 강한 불길, 그리고 유골함이다. 사랑하는 조카 생일 때 불을 붙였던 케이크도 등장한다. 작가뿐 아니라 모든 이들이 일상에서 접해볼 만한 풍경들이다.
기존 점을 찍는 작업에 12~14시간 걸렸다면, 선 작업은 대중이 없다. 스냅을 이용해 점을 조절하는 건 익숙하지만, 선은 그 흐름이 길기에 변수가 많다. 점 작업으로 알려지고 이제 안정화를 굳히고 있는 시점에서, 굳이 왜 또 이야기와 작업 방식을 새롭게 바꾸는 힘든 길을 택했을까. 거기엔 삶과 죽음에 대한 작가의 고찰이 있었다. 어찌 보면 아버지의 죽음에서 느꼈던 삶의 덧없음과도 연결된다.
“친한 친구가 죽음을 맞았어요. 조금씩 아파하는 과정, 죽음까지 이르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봤죠.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지만 결국엔 모든것을 두고 떠나가는 인생에서 삶의 덧없음을 느꼈어요. 바로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인 거죠. 그래서 더 늦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남들은 안정화의 시기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새로운 작업에 목마르는 시기였습니다. 또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었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겁도 났고요. 그런데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 계기를 맞으면서, 뭔가를 고민한다면 당장 시작해야 한다고 굳게 마음먹었어요.”
결국 삶이 덧없고 허무하다고 느끼지만, 그렇기에 지금 주어진 순간은 치열하게 살아야겠다는 작가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다. “삶은 덧없으되, 작업은 치열하다.” 이것이 그의 작업관이다. 이 생각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데 가장 시간을 쏟게 됐다. 이런 면에서 현재 그의 작업은 자서전과도 같다. 그래서 현재진행형인 작업이다. 작가는 “점 작업으로 알려졌지만, 앞으로는 주로 선 작업을 선보일 예정”이라며 “내년 봄 쯤에는 신작으로 이뤄진 전시를 열 것”이라고 전했다.
이번 전시 타이틀 ‘플리(Pli)’는 주름을 뜻한다. 주름은 겉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팽팽한 면이 좁혀지면서 보이지 않는 공간이 생겨나고, 거기에 주름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이 주름을 펴려고만 한다.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보려 하지 않은 채, 숨긴 채. 이번에 작가는 자신의 주름을 전부 드러냈다. 그의 마음속 깊이 자리했던 이야기들을 이번 전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전시는 롯데갤러리 에비뉴엘 아트홀에서 7월 24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