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뮤지컬 ‘데스노트’ 쇼케이스가 열렸다.
12월 19일 저녁 잠실 롯데콘서트홀 현장은 관객의 열기로 가득 찼다. 군 입대를 앞두고 마지막 작품으로 ‘데스노트’에 출연하는 스타 배우 김준수에 대한 관심, 그리고 이 공연에 애정을 가진 팬들의 환호가 뜨거웠다.
개인적으로는 이 둘 모두에 관심을 갖고 ‘데스노트’ 쇼케이스에 참석했다. 먼저 ‘데스노트’ 원작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뮤지컬 ‘데스노트’는 2003년부터 일본 주간소년 점프'에 연재된 동명 만화가 원작이다. 국내에는 지난해 뮤지컬로 첫선을 보였다.
이름이 적히면 죽는 사신의 노트를 천재 소년 야가미 라이토가 우연히 손에 넣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라이토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데스노트에 이름을 적어 악인을 처단하고, 키라라는 이름으로 숭배 받게 된다. 하지만 키라를 정의로 보지 않는 또 다른 천재 탐정 엘(L)이 등장하면서 라이토와 엘 사이의 쫓고 쫓기는 숨 막히는 두뇌 싸움이 펼쳐진다.
초연 때 엘을 맡았던 김준수가 다시금 엘로 출연하고, 한지상이 새로운 라이토로 합류했다. 여기에 데스노트를 의도적으로 세상에 떨어뜨린 사신(死神) 류크로 초연에 이어 강홍석이 출연하고, 또 다른 사신 렘 역할로 박혜나가 다시 얼굴을 비춘다. 라이토를 사랑하는 아이돌 가수로는 벤이 출연해 신선함을 더한다. 이들이 쇼케이스에서 보여준 매끄러운 호흡은 공연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처음 이 작품의 원작인 만화를 접했을 때는 ‘천재’라는 말이 절로 튀어 나오는,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에 무릎을 탁 쳤다. 하지만 더 소름끼쳤던 것은 ‘이 데스노트가 내게 주어지면 어떨까’ 하는 상상. 또 ‘실제로 이 노트가 존재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도 궁금했다.
세상엔 정말 나쁜 놈들이 많다. 그래서 그런 악인을 처단하는 키라에게 왜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었다. 정의를 대신 실현해주는 수호자와도 같은 느낌 아니었을까. 그런데 ‘데스노트’ 쇼케이스에서 서로의 다른 정의를 이야기하는 엘(김준수 분)과 라이토(한지상 분)의 노래가 울려 퍼질 때 배우들의 성량 자체에도 놀랐지만 섬뜩함을 느꼈다. 지금 우리는 현실판 데스노트가 펼쳐지는 세상에 이미 살고 있지 않은가.
국정 농단에 관한 의혹과 증거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세상이다. 그 중심에는 ‘블랙리스트’도 있다. 10월 한국일보의 보도로 수면 위로 떠오른 블랙리스트. 보도에 따르면 이 블랙리스트는 정부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지원을 끊거나 활동을 제약시키는 형태로 ‘혼을 내’ 응징하겠다는 취지에서 작성됐다.
사신(死神)보다 더 무서운 사람
또 다른 블랙리스트도 있다.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는 세월호 참사 당시 정부와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한 그림을 그린 홍성담의 ‘세월오월’이 광주 비엔날레에서 그림을 걸지 못한 뒷이야기를 취재했다. 방송에 따르면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을 근거로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이를 통제했다. 비망록에는 홍성담의 이름이 빈번히 등장한다. 거기다가 “홍성담 배제 노력” “홍성담 사이비 화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등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어 충격을 더했다. 그리고 실제로 기존 허수아비로 그렸던 박 대통령을 닭으로 바꾸는 등의 수정 과정을 거쳤지만 끝내 그림은 전시되지 못했다.
이 블랙리스트는 데스노트처럼 물리적으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데스노트에 이름이 적힌 사람은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00월 00시 00로 가서 목숨을 끊는다” 등 구체적으로 가능한 사유를 적으면 그렇게도 죽는다. 어쨌든 데스노트의 모든 결과는 사람의 심장 박동이 멈추게 하는 것, 즉 생명을 끊는 것으로 집결된다.
블랙리스트는 물리적으로 심장 박동을 멈추지는 않는다. 하지만 생명만 붙어 있을 뿐, 정신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숨통을 끊임없이 조인다. 더 무섭다. 표면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살인이 아닌 살인이다. 그야말로 더 집요하게 진화된 현실판 데스(death)노트다.
그렇다면 노트의 소유자들은 어떨까? 자취 감추기에 능수능란하다. 극 속의 키라는 오히려 키라를 잡기 위한 수사본부에 잠입하기도 한다. 이게 대단해 보인다고? 현실의 블랙리스트 의혹 관련자들은 더 대단하다. 대놓고 당당하다. “모른다”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이 판치는 청문회가 국민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아, 그렇고 보니 ‘데스노트’에도 키라 신봉자이자 라이토를 사랑하는 미사가 “모른다”고 입을 다무는 장면이 펼쳐진다. 이 작품을 그냥 흥미 거리로 볼 일이 아니다.
제각기 다른 정의를 바라보는 인물들의 태도도 현실처럼 와 닿는다. 라이토는 악인을 자신이 처벌해야 사람들이 함부로 죄를 짓지 못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될 것이라 믿는다. 또 그 역할을 자신이 해낼 수 있고, 자신밖에 할 수 없다고 믿는다. 뮤지컬에서 ‘데스노트’ ‘선을 넘지마’ 등의 노래를 통해서도 “내가 신이 되겠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순간의 욱하는 감정으로 데스노트에 이름을 적기도 하고, 자신의 정의에 반하는 엘을 죽이려고 하는 그의 모습은 아찔하다.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반면 엘은 사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지, 한 인간이 판단할 몫이 아니라고 본다. 또한 여기에 “정의에는 관심 없다”며 서로 싸우는 사람들을 관망하는 사신 류크까지. 자, 어떤가. 이 또한 지금 펼쳐지고 있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스스로가 믿는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데스노트가 누구 손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바뀌는 판도 또한 권력 구조에 따라 정의가 무차별로 휘둘리는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극에서는 키라가 자신이 그렇게 부르짖던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된다. 현실판 데스노트는 어떻게 될까? 불과 1년 전만 해도 단지 소재의 참신성에 감탄했던 이 작품이 이토록 섬뜩한 현실로 다가올 줄이야. ‘데스노트’가 더욱 주목되는 이유다. 공연은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오페라극장에서 2017년 1월 3~26일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