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과 천장까지 온통 하얀 방 안으로 작은 빛이 만든 그림자가 거대한 거인처럼 서있다. 빛이 시작되는 곳엔 투명 아크릴 판이나 거울 위로 어떤 공간을 그린 드로잉이 가득하다. 선으로 그려진 2차원 공간이 벽과 만나 또 다른 깊이의 색다른 공간으로 탄생했다.
인사미술공간 지하 전시장의 ‘이면의 공간’ 시리즈는 작가 김민정의 오랜 주제다. 작가는 어린 시절 재개발 사업으로 이사를 떠나며, 자신과 이웃의 집이 부서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살림살이가 빠져나간 텅 빈 공간은 부서진 채 평소 가려져있어 보이지 않던 공간의 너머를 드러내고 있었다.
작가 김민정은 이런 공간을 재현하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공간 이면의 공간을 상상한다. 주로 투명하거나 빛을 반사시키는 물질에 빛을 비추고 그림자를 통해 보다 확장된 공간을 내보인다.
지하에서 1층 전시장으로 올라오면 김다움 작가의 영상설치 작품 ‘맹지(盲地, Blind Land)’가 상영 중이다. 사면의 벽 중 2면을 모두 활용한 ‘ㄱ’자 스크린을 통해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작가가 새로 이사 간 집이 바로 도로와 맞닿는 부분이 없는 토지(맹지)였다. 이웃 소유의 주차장과 텃밭을 지나 이삿짐을 겨우 옮기고 난 뒤, 작가는 맹지에 살게 된 자신의 상황을 반추한다. 여기서 맹지는 단순히 물리적인 토지를 벗어나, 다양한 사회 환경과 조건에 둘러싸인 개인의 상태와 심리를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을 그 의미를 확장한다.
영상 속 홍콩, 타이페이, 서울에 거주하는 3명의 청년 화자는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과 심리를 편지의 형식으로 고백한다. 고립된 맹지처럼, 스스로 타개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화자의 목소리가 거대한 영상과 맞물려 고요한 울림을 남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2016년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성과보고전 ‘이삿날’을 서울 종로구 인사미술공간에서 열었다. ‘이삿날’은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의 시각예술(작가) 과정에 참여한 김다움, 김민정 작가의 2인전으로, 올해 초부터 진행한 조사와 연구를 바탕으로 한 신작을 선보인다. 어떤 공간에서 또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인 ‘이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서로 다르지만, 김다움, 김민정 작가는 각자 심리적, 물리적 범위로서의 공간을 탐구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