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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극심한 가난 시달린 박수근이 경주 간 까닭은?

‘신라에 온 국민화가 박수근 특별전’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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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33-534호 김금영⁄ 2017.04.27 11:33:04

▲'국민 화가'로 불리는 박수근.(사진=네이버 캐스트)

(CNB저널 = 김금영 기자) 혹독한 가난에 시달리면서 건강까지 나빠져 한쪽 눈을 실명한 박수근(1914~1965). 그런데 그 힘든 환경 속에서도 그는 몇 번이고 경주를 찾았단다. 도대체 왜?


‘신라에 온 국민화가 박수근 특별전’이 5월 2일~8월 31일 경주솔거미술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가나문화재단과 경주솔거미술관,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세 기관 공동주최로 열린다. 박수근이야 ‘국민화가’로 불릴 만큼 그 명성이 드높지만, 생각보다 박수근과 관련된 대규모 전시는 열기가 힘들다는 게 관계자들의 발언이다. 짧은 작업 기간에 작품 수까지 적기 때문. 게다가 이번 전시는 박수근의 작품과 신라 사이의 연관성까지 짚었다. ‘민중의 삶의 애환을 그린 화가’라는 식의 이야기는 그간 많이 보였지만 이번엔 살펴볼 수 없었던 주제라 그래서 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박수근, '금강역사'. 종이에 오일, 27 x 20cm. 1954.

전시 기획에 참여한 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가 전시를 열게 된 과정을 밝혔다. 그는 “박수근은 6.25 전쟁 시기 월남한 후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까지 짧지만 굵은 본격적인 작품 제작 기간을 가졌다”며 “이 시기 중 특히 60년 전후쯤 박수근이 경주를 많이 방문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그가 경주에 애정을 갖고 방문했다는 몇몇 기록과 증언이 남아 있고, 경주에 거주하는 원로 화가들이 박수근을 직접 안내하기도 했다고도 알려졌다”고 말했다.


박수근이 힘든 몸을 이끌고서도 경주를 찾은 이유를 윤 교수는 신라 문화에서 찾았다. “이번 전시명에서도 알 수 있듯 박수근과 신라 문화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있다. 박수근 작품의 대표적인 특징은 회색조의 우툴두툴한 화면 질감이다. 이 질감은 마치 화강암 같다. 꼭 신라시대 석조 마애불을 연상시킨다. 우연히 나온 질감이 아니라 치열한 연구의 흔적이 느껴지는 지점”이라고 그는 짚었다.


추측으로만 박수근과 신라 문화 사이의 연관성을 찾은 것이 아니다. 실질적인 발언과 증거가 있다고. 윤 교수는 “박수근 또한 생전 자신의 예술 모태가 신라의 서쪽 문화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석조 미술품에서 아름다움의 원천을 느낀다고도 말했다. 경주를 답사하면서 신라 문화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는 유족들의 증언도 있다”고 말했다.


▲박수근, '앉아 있는 여인'. 하드보드에 오일, 27.8 x 22cm. 1950년대.

또한 “이 구체적 증거가 박수근이 직접 찍은 탁본에서 보인다”며 “경주에서 손수 찍은 탁본을 자신의 작품을 사랑해준 미국인 애호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며 “그는 화강암으로 이뤄진 석탑, 석불을 보고 많은 영감을 얻었다. 화실에서 화강암 조각을 어루만지면서 의도적으로 바위의 질감을 표현하려고 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박수근이 자신만의 방식도 곁들였다는 것. 윤 교수는 “질감뿐 아니라 무채색의 흑백 톤, 그리고 직선에 가까운 선묘까지 박수근의 작품에서 신라 문화의 잔재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많다”며 “또한 박수근은 이 신라 문화를 받아들이고 여기에 자신만의 느낌을 담아 ‘박수근표’로 특화시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박수근의 우툴두툴한 화면 질감서 발견한 신라 마애불


▲박수근, '도화'. 하드보드에 오일, 19 x 26cm. 1960년대.

박수근표 특화는 바로 사람들의 삶을 화면에 담은 것. 그의 화면엔 화려한 풍경이나 세련된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도시가 아닌 도시 변두리, 또는 농촌의 정경을 소재로 애정 어린 시선을 담는 데 주력했다. 또 그림 속엔 노동력이 있는 청장년층의 남자가 아닌, 시장에서 물건을 팔거나 아이를 돌보고 있는 아낙네, 그리고 노인이나 아이들이 거의 등장했다.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윤 교수는 “전쟁 이후 가장(家長) 부재 사회를 보여준다. 또한 박수근의 화면은 이파리 하나 허용하지 않는 싸늘한 겨울 풍경이 주를 이뤘는데, 이는 당시 궁핍한 사회의 표상이다. 나무 또한 곧게 자라지 못한 모습이었다. 우리 민족의 어려웠던 시절의 정서를 담았다. 그래서 더 뜻 깊다”고 설명했다.


김형국 가나문화재단 이사장 또한 박수근의 그림이 괜히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김 이사장은 “박수근은 한국 사람이 겪었던 전(前) 시대의 정서를 생생하게 그렸고, 이것이 감동을 줬다. 불과 반세기 전 절대가난의 농촌 시대를 겪었던 우리가 지금은 컴퓨터, 스마트폰이 일상생활을 압도하는 정보시대를 살고 있다”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 이전 시대에 대한 그리움이 자연스럽게 솟아나기 마련이다. 19세기말 세워진 철제 에펠탑이 세워졌을 당시엔 혐오 조형물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랜드마크로 우뚝 솟은 것처럼 말이다. 박수근의 그림은 그 시절을 추억하는 동시에 친근감, 동질감까지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박수근, '시장의 여인'. 캔버스에 오일, 29.5 x 28cm. 1963.

전시는 박수근의 유화, 드로잉, 판화 탁본, 옵셋 판화 등 약 100여 점으로 구성된다. 윤 교수는 특히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판화 탁본을 꼽았다. 박수근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박수근의 탁본 20~30여 점이 박수근과 경주, 즉 신라 문화와의 연관성을 환기시킨다는 것. 윤 교수는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탁본은 특히 박수근이 경주에서 직접 탁본한 것이라는 것에서 상징성이 있다. 박수근 예술의 원형에 자리 잡은 신라 문화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박수근 예술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길을 여는 새로운 시도의 의미도 있다. 명작은 다양한 각도에서의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했다.


전시가 이뤄질 수 있는 배경엔 전시 주최 기관들의 협조가 컸다. 김형국 이사장은 “박수근을 비롯해 이중섭 등 대가들의 전시를 여는 것은 정말 뜻 깊은 일이다. 하지만 과정이 늘 어렵다. 작품의 숫자가 적고 매우 고가의 작품도 많아 대여하기도 어렵고 소장처를 확인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일반인의 접근이 갈수록 어려워져 아쉽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번 전시를 위해 가나아트의 이호재 회장이 선뜻 작품을 빌려줬다. 전시에 공개되는 유화 대부분은 이호재 회장의 도움이 컸다.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또한 큰 힘을 보탰다. 그 덕분에 경주에서 박수근 전시가 대규모로 열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장소적인 특이성도 있지만 이번 전시로 기대하는 바도 있다고. 박수근 전시는 ‘호찌민-경주 세계문화엑스포 2017’을 알리는 일환으로도 기획됐다. ‘문화 교류를 통한 아시아 공동 번영’을 주제로 하는 이번 엑스포는 베트남 호찌민 시에서 11월 9일~12월 3일 열린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고 전통 공연 및 미술 교류전, 뮤지컬, 케이팝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박수근 전시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공원 상시개장 콘텐츠로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이두환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사무처장은 “박수근 전시는 한국의 뛰어난 미술을 알리는 행사”라며 “우리나라 미술의 뿌리에는 신라 문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국내를 넘어 세계인이 주목할 이번 전시에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김형국 이사장은 “경주는 자체가 미술관이다. 문화유산이 워낙 많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관심을 끌기 위한 전시를 열기가 어렵다. 박수근 정도 돼야 주목을 끌 수 있다”며 “극사실 그림이 중시됐던 시대에서 화가의 뜻이나 감정을 그리는 사의(寫意)가 못지않게 중요한 시대에 진작 접어들었다. 이 점에서 신라 문화를 받아들이고, 여기에 자신의 생각과 뜻을 담은 박수근 그림은 그가 왜 국민화가라 불리는지 느끼게 해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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