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 위 하얗게 깔린 소금, 그 위에서 펼쳐진 배우들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스크린에 투사된 시민들의 댓글. 인상적인 무대 구성이 돋보인 이 작품은 “‘돈이나 먹어라(Let them eat money)’는 뜻을 지닌, 고착된 권력 구조에 반대하는 저항 세력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LG아트센터(대표 정창훈)의 올해 하반기 기획공연 시즌이 연극 ‘렛 뎀 잇 머니(Let Them Eat Money. Which Future?!)’로 막을 올렸다. ‘렛 뎀 잇 머니’는 136년 역사를 지닌 독일 극장 도이체스 테아터, 그리고 독일의 훔볼트 포럼이 예술가를 비롯해 경제, 사회, 환경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 전문가, 그리고 일반 시민들과의 리서치, 토론 등을 통한 ‘참여형 제작 방식’으로 만든 작품이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알프레드 바우어상(2011)과 유럽영화상 다큐멘터리상(2001) 등을 수상한 바 있는 이 작품은 “2028년, 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를 주제로 했다. 난민 대이동,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되는 노동력, 데이터의 통제와 감시, 민주주의의 위기까지 토론에서 미래에 닥칠 수 있는 위기와 관련해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고, 공연은 이 토론에서 나온 내용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독일의 영화감독이자 연출자인 안드레스 바이엘은 “우리는 현재 기후변화, 금융위기, 난민 문제 등 다양한 위기를 겪고 있고, 이 위기는 힘든 미래를 초래할 수도 있다”며 “우리는 위기에 무언가를 빼앗길 수도 있지만, 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미래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 공연 또한 계속 질문을 던진다”고 공연 기획 의도를 밝혔다.
LG아트센터가 올해 기획공연 시즌에 ‘렛 뎀 잇 머니’를 초청한 것도 이 연출 의도의 맥락과 맞닿는다. 관련해 이현정 LG아트센터 기획팀장에게 이야기를 들어봤다.
-2000년 건립된 LG아트센터는 2003년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기업에 주어지는 ‘메세나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LG아트센터가 성과를 인정받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이 기획공연 시즌제과 패키지 제도다. 기획공연 시즌제는 어떤 목적에서 만들어졌고, 어떤 방식으로 운영돼 왔는가?
“LG아트센터는 문화를 통해 기업의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고자 2000년 LG가 건립해 공익법인 LG연암문화재단에서 운영하고 있는 공연장이다. 2003년 ‘메세나대상 대통령상’ 수상을 비롯해, 지난해 열린 ‘한국서비스품질지수 1위 기업 인증 수여식’에서 12년 연속 ‘공연장 부문’ 1위를 차지하는 등 관객들의 신뢰를 받는 공연장임을 입증했다. 이런 LG아트센터의 중심을 이루는 프로그램이 연간 기획공연을 전 해에 한꺼번에 발표하는 ‘시즌제(CoMPAS)’, 그리고 시즌 공연을 다양하게 묶어 판매하는 ‘패키지 제도’다.
CoMPAS는 LG아트센터가 직접 기획해 선보이는 시즌 공연을 일컫는다. 동시대 다양한 영역(compass)의 공연을 만날 수 있는 곳, 새로운 작품과 만날 수 있는 나침반(compass) 역할을 하는 곳, 예술과 관객 모두의 상상력을 제도(compass)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LG아트센터처럼 (관객 입장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낯선 공연, 즉 아티스트의 명성에 기댄 작품이 아니라, 작품성 면에서 꼭 봐야할 공연이거나 해외 트렌드를 반영하는 작품들을 많이 하는 공연장에서 프로그램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제도이기도 하다.
LG아트센터의 프로그램 방향성을 안정적·지속적으로 가져가면서, 극장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제도라는 생각에 기획공연 시즌제를 만들고, 패키지를 판매하게 됐다. 다행히 관객들의 호응으로 이제는 우리나라 공연 시장 전반에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여타 공연 프로그램들과 비교해 기획공연 시즌제와 패키지 제도가 지닌 강점은?
“관객들 입장에서는 한 해에 관람할 공연들을 미리 결정해 관람 계획을 세울 수 있고, 티켓을 한꺼번에 구입하면 다양한 할인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한 제도다. 극장 입장에서는 하나하나 개별 공연에 대해 불특정 다수에게 마케팅을 하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관객 수요를 일찍 예측할 수 있어 마케팅비를 크게 절감하는 효과가 있다. 또한 주요 관람객층의 수요를 파고드는 ‘타깃 마케팅’을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패키지 판매엔 할인이 제공된다. 이 금액은 결국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 비용을 줄이고, 이를 자주 공연을 보는 관객에게 할인으로 돌려주는 개념이 된다. 그렇기에 극장 입장에서도 부담이라고만 볼 수 없다.”
-올해 하반기 기획공연 시즌을 여는 연극 ‘렛 뎀 잇 머니’가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 작품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껴 이번 시즌에 초청했는가?
“연극 ‘렛 뎀 잇 머니’는 2018년을 기점으로 ‘향후 10년 동안 우리 미래가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됐다. 2년 동안 250여 명에 이르는 각계각층의 사람들과의 토론과 연구를 통해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독일 베를린의 명망 있는 공연장인 ‘도이체스 씨어터’가 독일 ‘홈볼트 재단’과 공동으로 시행한 프로젝트의 일환이기도 하다.
공연을 만드는 과정이 새롭고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공연을 통해 예측된 미래가 현 시점에서 봤을 때 유효한 지점들이 많아 우리 관객들에게 소개할 만한 작품이라 판단했다. 물론 어려운 점도 있었다. 수많은 자료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인데다, 극 중 10년 동안의 시점이 빠르게 지나간다. 더구나 독일어로 공연돼 우리 관객 입장에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지점이 있었다.
하지만 안드레스 바이엘 연출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공연을 통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것이 중요했다. 더 나아가 작품에 나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양한 관점을 갖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작품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렛 뎀 잇 머니’를 비롯해 LG아트센터가 기획공연 시즌에 들어갈 작품을 선별할 때 중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
“피나 바우쉬, 피터 브룩, 레프 도진, 로베르 르빠주 등 세계적인 거장들이 선 LG아트센터의 무대는 파격과 혁신, 도전의 연속이었다. 로메오 카스텔루치, 이보 반 호프, 매튜 본 등 현 시대의 공연 예술계를 주도해가는 예술가들의 신선하고 도발적인 작품들도 LG아트센터 무대를 통해 처음으로 국내 관객과 만났다.
LG아트센터는 폭넓은 시야와 관점에 기반을 둔 ‘세계성’과 앞으로의 가능성을 살피는 ‘미래 지향성’에 방향을 둔다. 그리고 동시대 우리 관객들이 ‘꼭 봐야 할 작품’들을 선별해 기획공연으로 소개해 왔다.
꼭 봐야 할 작품은 관람객 각각에게 매우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다양한 관점이 있기에 어느 한 가지 요소만 갖고 판단하진 않는다. 작품이 지닌 다양한 측면과 장점을 고려한다. 그것이 때로는 작품의 주제, 무대 미장센, 연기, 연출 방식이 될 수도 있다. 무엇이 됐든 관객 입장에서 단 한 가지라도 흥미롭고 감동할 만한 것이 있다면 좋은 작품이고, 소개할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 관객들의 영감에 어떤 면에서는 자극이 될 만한 작품이 무엇인지 항상 염두에 두고 작품을 선별한다.”
-관객들의 피드백, 공연 매출 부분 등에서 현재까지 LG아트센터의 기획공연 시즌이 이룬 성과가 궁금하다.
“LG아트센터 기획공연은 초대권을 발행하지 않는다. 모두 유료 매표임에도 연 평균 80~90% 정도의 매표율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G아트센터가 선보이는 공연들은 상업적인 공연들이 위주가 아니기 때문에 제작비를 모두 회수하지는 못하며, 자립도를 50~60% 정도 유지하고 있다. LG아트센터는 민간 기업에서 운영하는 민간극장이지만, 공익법인에서 운영하고 있고,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설립한 공공극장이다.
20여 년 동안 시즌제를 운영하며 LG아트센터의 기획공연을 신뢰하고 기대하는 많은 마니아 관객들이 생겼다. LG아트센터가 선택한 작품을 기대해주는 관객들 덕분에 프로그램을 구성할 때도 조금 더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앞으로도 관객을 위한 공연을 선보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