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울진에는 관동팔경 명승 중 두 곳이 있다. 망양정(望洋亭)과 월송정(越松亭)이다. 겸재도 빠지지 않고 이 두 명승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런데 1860년 이전 울진에는 단 하나의 관동팔경 명승이 없었다. 그러면 1860년을 전후해서 관동팔경이 변경되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이제 겸재의 그림 망양정을 찾아서 길을 떠난다. 동해로 향하는 길은 그렇지 않아도 좋은데 겸재를 앞세우고 떠나니 마음은 한껏 부풀어 오른다. 바다 좋지, 산 좋지, 먹거리 좋지, 거기에다 길동무 든든하면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왜 망양정 길이 각기 다른 두 곳에?
망양정은 불영계곡 물길이 왕피천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가는 곳 남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동해의 망망대해가 바라다보이는 승경지에 세워져 일망무제(一望無際), 하늘과 바다가 막힘없이 열린 곳이다.
이어지는 언덕에는 해맞이공원이 펼쳐져 있어 많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자체에서는 그곳에 종각도 세우고 울진대종이라는 종(鐘)도 주조해 달았다. 해파랑길 25코스가 지나는 곳이라 탐방객도 그치지 않는다.
정자 위로 올라서면 망양정을 노래한 문인들의 시문(詩文)이 편액되어 있다. 숙종, 정조의 어제시(御製詩)를 비롯하여 매월당 김시습, 원재 정추(圓齋 鄭樞),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등의 시와 나재 채수((懶齋 蔡壽)의 기(記)도 걸려 있다. 정자 앞 잔디밭에는 옛 주춧돌 하나를 전시해 놓고 1860년 이전 망양정 주춧돌이라고 설명한 돌을 곁에 두었다. 무엇을 설명한 것일까? 망양정 중수(重修)와 이전 역사를 설명한 안내판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곳 망양정이나 옛 망양정 터에는 비슷한 내용의 안내판이 서 있다.
이곳은 관동팔경(關東八景) 중의 하나인 망양정(望洋亭) 옛터(舊地)로, 망양정이 두 번째로 옮겨온 장소이다. 망양정은 고려 시대 기성면 망양리 해변에 처음 세워졌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허물어졌다.
조선 시대 들어와 1471년(성종 2) 평해 군수 채신보(蔡申保)가 현종산(縣鍾山) 남쪽 기슭인 이곳으로 옮겨 다시 세웠다. 1517년(중종 12) 비·바람으로 정자가 파손되어 다음해 안렴사 윤희인이 평해군수 김세우와 함께 중수하였으며, 1590년(선조 23) 평해군수 고경조(高敬祖)가 다시 중수하였으나, 그 후 세월이 오래되어 다시 허물어졌다. 1860년(철종 11) 울진현령 이희호(李熙虎)가 망양정이 오랫동안 무너진 것을 한탄하여 군승(郡承) 임학영(林鶴英)과 함께 지금 망양정이 있는 근남면 산포리 둔산(屯山)으로 옮겨 세웠다. 1888년(고종 25) 울진 현령을 지낸 류태형의 「선사록(仙槎錄)」에 의하면, 망양정이 둔산으로 옮겨진 이유는 “후세 사람들의 안목이 고루하여 읍치(邑治) 조금 멀다는 이유로 강과 바다 사이로 옮겨 지었다”.
그랬었구나. 이곳 울진 근남면 산포리 현 망양정은 1860년 울진현령 이희호와 군승(郡承) 임학영이 평해 현종산에 있던 망양정을 옮겨 지은 것이구나. 울진 현령 이희호는 이미 성류굴에서 만난 인물로 성류굴 입구 옆에 다녀간 일행의 이름을 각자(刻字)로 남긴 인물이다.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관동팔경이 각 군(郡) 하나씩은 나누어져 있어야 좋은데 울진에는 없고 아랫고을 평해(平海)에는 망양정, 월송정 두 개나 있어서 울진 현령 이희호의 요청으로 평해 망양정이 울진으로 옮겨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옛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지금의 울진군의 북쪽은 울진군(蔚珍郡), 옛 망양정이 있던 현종산(懸鍾山) 남쪽은 평해군이었다. 우리가 조선의 옛길 중 원주, 강릉 거쳐 동해 바다 고을로 가는 관동대로는 평해읍치까지 이어져 있어서 평해대로(平海大路)라 했으니 엄연히 수백 년을 내려오던 동해의 중요한 고장이었다. 그러던 평해는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하던 일제에 의해 1914년 울진으로 통합되었다 한다.
현재 망양정에 걸려 있는 시문(詩文)의 내용이나 겸재 등을 비롯하여 화인(畵人)들이 그린 그림도 이곳을 그린 것이 아니니 옛 망양정 자리를 찾아간다. 비록 정자는 떠났어도 이름은 남아 망양리, 해수욕장도 망양해수욕장이다. 기성면 망양1리 413-3이 그 자리라고 한다. 지자체에서는 아쉬움을 달래려 했는지 현종산 기슭 옛 자리 변에 편액은 없이 정자를 세워 놓았다.
현종산이 바다로 들어가는 옛 그림 속 기슭은 아쉽게도 해안도로 개설로 인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다행히 새로 지은 정자에서 해안도로 너머로 보이는 망망한 바다는 옛 문인들이 그린 그 바다였고, 그림 속 모습도 변함없는 그 바다였다.
옛 망양정 자리에는 지나는 이 누구나 찾기 쉽게 망양정 옛터 안내판을 붙였고 나무 데크 층계를 오르면 망양정유허비도 세웠다. 망양정의 이력과 편액되어 있던 시문도 소개되어 있다. 둔산으로 옮겨간 새 망양정에 편액된 시문들이다.
옛 망양정을 알기 위해 우선 원재집(圓齋集)에 실려 있는 조선 전기 문인 채수(蔡壽)의 망양정기(望洋亭記)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정자는 여덟 개의 기둥이 둘러 있는데 기와는 옛것을 이용하고, 재목도 새것을 쓰지 않았다. 웅장하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경물은 기이하여 이루 말할 수 없다. 정자의 조금 북쪽에는 8칸을 둘러 꾸몄는데 영휘원(迎暉院)이라 이름 붙였다. 벼랑을 따라 내려가면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 그 위에 7, 8명은 앉을 수 있으며 그 아래는 땅에 닿지 않으니, 이름을 임의대(臨漪臺)라 한다. 북쪽 백 보쯤 밖을 바라보면 험한 잔교(棧橋)가 구름을 의지하여 그 위로 사람이 가는 것이 공중에 있는 것 같으니 이름을 조도잔(鳥道棧)이라 하는데, 무릇 여행자들이 즐기고 보는 즐거움이 더할 바 없다. 바람 자고 물결 고요하며 구름 걷고 비 갤 때에, 눈 들어 한 번 바라보면 동도 동이 아니요, 남도 남이 아니니 신기루(蜃氣樓)는 숨었다 나타났다 하고, 섬들은 출몰한다. 가다가 큰 물결이 거세게 부딪치고, 고래가 물을 내뿜으면 은은하고도 시끄러운 소리에 하늘이 부딪치고 땅이 터지는 것 같으며, 흰 수레가 바람 속을 달리고 은산(銀山)이 언덕에 부서지는 것 같다. 가까이 가서 보면 고운 모래가 희게 펼쳐지고 해당화는 더욱 붉다. 고기들은 떼 지어 물결 사이에서 놀고 향백(香柏)은 돌 틈에서 덩굴 뻗는다.
옷깃을 헤치고 한 번 오르면 유유히 드넓은 기운과 짝하여 놀아도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르겠고, 크게 조물주와 함께 해도 다한 곳을 모르겠다. 그런 연후에 이 정자가 기이함을 비로소 알고, 하늘과 땅이 크고 또 넓은 줄을 안다.
아, 우리나라에서 봉래(蓬萊)·영주(瀛洲)를 산수의 고장이라 하지만 관동(關東) 지방이 제일이며, 관동지방의 누대(樓臺)가 수없이 많지만 이 정자가 으뜸이다. 이는 하늘도 감추지 못하고 땅도 숨기지 못하니, 기이함을 올리고 드러내어 사람에게 많은 기쁨을 준다. 어찌 이 고장의 행운이 아니겠는가. 이를 적어서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구나.
望洋亭記
是亭繚以八柱。瓦用其舊。材不新聚。雖不壯不麗。而景物之奇。莫可端倪。亭之小北。環搆八間。名迎暉院。緣崖而下。又有一石突起。上可坐七八人。下臨無地。名臨漪臺。北望百步外。有險棧欹雲。人行如在半天。名鳥道棧。凡行旅遊觀之樂極矣。每風恬波靜。雲消雨止。擧目一望。則其東無東。其南無南。蜃樓隱見。鼇嶼出沒。或洪濤怒號。鯨鯢噴薄。則隱隱轟轟。如天摧地裂。如素車奔風。銀山碎岸。近而視之。鳴沙鋪白。海棠飜紅。群魚族戲於波間。香柏蔓生於石隙。披襟一登。悠悠乎若與灝氣游而莫得其涯。洋洋乎與造物者俱而不知其所窮。然後始信亭之奇。而天地之大且廣也。嗟夫。我國號蓬瀛山水之窟。而關東爲最。關東之樓臺以百數。而此亭一朝冠焉。天不能慳。地不能祕。呈奇獻異。悅人多矣。豈非此邑之幸歟。是不可不志以傳於後也.
상당히 정확한 글이다. 이 망양정기를 읽은 후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아계 이산해도 망양정기를 썼는데 이런 사실적 묘사보다는 망향정의 의의 등을 주로 쓴 글이라 소개는 생략한다. 사천 이병연도 망양정 시를 읊었다. 겸재와 함께 와서 겸재는 그림을 그리고 사천은 시를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망양정에 대한 겸재의 그림과 사천의 시가 전해지는 것은 축복임에 틀림없다.
사천시초(槎川詩抄)에 전해지는 이병연의 ’망양정‘은 채수의 망양정기와 궤를 같이 한다.
望洋亭
極目蒼然使我勞 창연히 끝 간 곳 바라보기 만만치 않은데
波侵鳥道寄秋毫 파도는 아슬히 걸친 조도잔교까지 몰아치네
不愁地盡天猶大 땅끝 맘에 두지 않아 하늘은 더욱 큰데
須信溟深嶺自高 바다 깊다 맘에 두니 고갯길 절로 높다
箇箇漁舟輕性命 고깃배 마다마다 빠른 움직임인데
飄飄游宦犯風濤 표표히 가는 아치 물결을 범하네
持竿老叟來相就 낚싯대 든 노인은 서로 조차서
講說鯤鵬意更豪 장자의 뜻 논하니 의기 다시 호탕쿠나
망양정을 그린 그림들도 채수의 망양정기의 사전지식을 가지고 보면 훨씬 와 닿는다. 겸재, 단원, 복헌(復軒 金應煥)이 그림을 남겼고 복헌은 현종산에서 바다로 뻗어내린 바위들의 모습을 현종암(懸鍾巖)이라는 화제로 그렸으니 옛 망양정을 이해하는 데는 복헌에게 신세를 진 셈이다.
우선 겸재의 그림을 살펴보자. 현종산 끝이 바다와 만나는 우뚝우뚝 솟은 바위 위에 정자와 그 부속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그곳으로 오르는 층계는 하늘만큼 가파르게 이어져 있다. 바다를 바라보는 앞 정자는 물론 망양정이다. 기둥 숫자도 분명히 그렸는데 망양정기에 기록한 8개가 선명하다. 망양정 뒤를 에워싼 8칸의 건물 영휘원(迎暉院)도 선명하고 이곳으로 오르는 높다란 층계길 조도잔(鳥道棧)도 높이 이어져 있다. 벼랑을 따라 내려가면 우뚝 솟은 바위, 그 위에 7, 8명은 앉을 수 있다는 임의대(臨漪臺)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정자 넘어 사각(死角)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릴 수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단원과 복헌은 훨씬 넓은 시각(視覺)으로 망양정 주변의 경관을 폭넓게 그렸다. 정조의 명(命)으로 관동명승을 그린 화첩 속 그림들이다. 그런데 디테일은 알 수 없지만 망양정 뒤 영휘원이 보이지 않는다. 겸재 시대(영조)와 단원, 복헌 시대(정조) 사이에 벌써 무너져 사라진 것일까?
한편 복헌 김응환은 7, 8명이 앉을 수 있다는 솟은 바위 임의대(臨漪臺)에 세 사람이 오른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용이 날듯이 활기찬 그 모양이 대단하다. 그런데 그 바위 이름을 현종암이라 했다. 조선 초기에 쓰던 임의대란 이름이 잊혀진 걸까? 아니면 복헌이 모르고 현종암이라 한 것일까? 그것도 궁금한 일이다.
술 마시는 숙종과, 항상 차렷 자세인 정조와
이제 차마 지나치기에는 아쉬운 시문 몇 편 읽고 가려 한다.
어제시(御製詩)를 남긴 두 분의 시다.
숙종
골짜기들 겹겹이 구불구불 열리고 列壑重重逶迤開
놀란 파도 큰 물결은 하늘에 닿아 있네 驚濤巨浪接天來
지금 이 바다가 술술이 된다면 如今此海變成酒
어찌 단지 삼백 잔만 기울이겠나 奚但只傾三百盃
숙종은 마치 이백(李白)이 된 것 같은 호기로운 어제시를 남겼다.
예전 코미디언 어떤 분이 ‘인천 바다가 사이다가 되어도~’ 이렇게 재미를 더했던 것처럼 숙종은 ‘동해 바다가 술이 된다면’ 이렇게 재미를 더한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다. 숙종은 망양정에 온 일이 없으니 화첩을 보고 시를 쓰셨을 터인데 경포대도 그렇고, 죽서루도 그렇고, 망양정까지…. 과연 어떤 화첩을 보고 이렇게 시를 쓴 것일까? 그 화첩이 지금 현존하고 있는 화첩인지 ‘그것이 알고 싶다’.
정조
원기가 창망한 바다는 펼쳐지는데 元氣蒼茫放海溟
누가 여기에 망양정을 지었는고 誰人辨此望洋亭
마치 공자님댁 집 보듯이 恰如縱目宣尼宅
종묘며 관청 담 역력히 정돈됐네 宗廟官墻歷歷經
정조는 단원과 복헌에게 명을 내려 금강산과 관동명승을 그리게 했으니 이 두 화원(畵員)의 그림을 보고 시를 지었다. 그런데 숙종과는 달리 지나치게 차렷 자세라서 흥이 나지 않는구나.
한때 울진에 와서 지낸 매월당도 이곳에 와서 시 한 수 남겼다.
십 리 모래밭 큰 바다를 바라보니 十里沙平望大洋
바다는 멀고 하늘은 넓고 달은 푸르구나 海天遙闊月蒼蒼
신선 세계라 티끌 세상과는 격해있는데 蓬山正與塵衰隔
사람들 사는 곳은 떠도는 마름 한 잎 곁 人在浮菱一葉傍
세상을 부유(浮游)하는 매월당이라 이곳에 와서도 그다운 한 수를 남겼다.
고래 소리 울리는 망양정 옛 글들
동국여지승람에도 물론 망양정이 기술되어 있다.
망양정(望洋亭). 고을 북쪽 40리에 있는데 동쪽은 큰 바다에 임하였다. 정추(鄭樞)의 시에,
‘망양정 위에 한참 동안 서 있으니,
늦은 봄이 가을 같아서 마음 더욱 아득해지네.
아무래도 바다 가운데 바람과 안개 나쁜 모양이지,
전나무-소나무 동쪽 향한 가지는 자라지 못했네.
일만 골짜기 일천 바위가 잇따라 놓였는데,
산을 따라 돌아가고 산을 따라 왔다네.
구름이 큰 물결에서 나니 하늘을 다 감쌌고,
바람은 놀란 물결을 보내어 언덕을 치고 돌아오네.’ (기존 번역 전재)
望洋亭。在郡北四十里。東臨大海。鄭樞詩:
望洋亭上立多時,春晩如秋意轉迷。知是海中風霧惡,杉松不長向東枝。
萬壑千巖邐迤開,傍山歸去傍山來。雲生巨浪包天盡,風送驚濤打岸迴。
이제 망양정에 편액되어 있던 글들을 더 살펴보자.
고려말 문인 원재(圓齋) 정추(鄭樞)의 망양정이다. 그는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으로 이색과는 가까웠고 신돈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망양정에 한참을 서 있었네 望洋亭上立多時
가을 같은 봄 마음 슬퍼지네 春晚如秋意轉悲
바다에 바람과 안개 사나워 知是海中風霧惡
삼나무 소나무 동쪽 가지 자라지 못했네 杉松不長向東枝
만 골짜기 천 바위 이어 펼쳐졌는데 萬壑千巖邐迤開
산 곁으로 돌아가고 산 곁으로 돌아왔네 傍山歸去傍山來
구름 큰 물결에서 일어 하늘 모두 감싸고 雲生巨浸包天盡
바람에 놀란 물결 언덕을 치고 돌아오네 風送驚濤打岸回
현종산과 망양정을 담담히 읊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는 시화집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에서 평해(平海)의 망양정(望洋亭)을 읊은 시로서는 오정(梧亭) 박란(朴蘭)의 시를 절창(絶唱)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나는 듯한 정자의 뛰어난 경치가 우리나라에 으뜸이라
영 밖 누대들 모두 와 항복을 하네
해 돋는 곳에 치미는 물결은 솟는 해를 떠받쳐 올리고
고깃배 돛에 심한 바람이 불어오니 휘청거리는 돛대만 앙상하구나
누가 앞으로 낚시질을 배워서 자라를 여섯씩 한 줄에 꿸꼬
나는 신선을 따르고자 신을 한꺼번에 둘씩 들어보네
천년토록 뛰어난 시인들이 수곽에 부끄럽게 여긴 까닭은
바다와 강을 아우른 장관을 읊기 어렵기 때문이라네
飛亭勝絶冠吾邦
嶺外樓臺盡乞降
暘谷浪飜掀出日
漁帆風急露危杠
誰將學釣鼇連六
我欲追仙寫擧雙
千古雄才慙水郭
壯觀難賦海兼江
(기존 번역 전재)
망양정을 읊은 시문은 아계 이산해, 간이 최립, 참판 성익수…. 더 이상 소개는 줄이고자 한다. 그래도 줄일 수 없는 것이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중 망양정을 읊은 부분이리라.
텬근(天根)을 못내 보와 망양뎡((望洋亭)의 올은 말이
바다 밧근 하날이니 하날 밧근 무서신고
갓득 노한 고래 뉘라셔 놀내 관대
블거니 쁨거니 어즈러이 구난디고
(하늘 끝을 못 보고 망양정에 올라서 하는 말이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고
가뜩이나 노한 고래 누가 놀라게 했길래
(물을) 불거니 뿜거니 어지럽게 구는구나).
망양정 옛터에서 옛 그림과 옛 글로 지낸 한 나절 호사를 무리고 정자를 내려 간다. 망양리에는 울진 오징어 건조 작업이 한창이다. 관광객에게도 판매하고 택배로도 배송해 준다. 팔자도 한 축 사 와 근래에 맛있게 먹었다. ‘오징어게임’을 보며 먹는 울진 오징어는 망양정 바다의 멋만큼 맛있다.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