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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83) 민재영 작가] 공간에서 만나면서 겹쳐지는 체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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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16호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2022.01.28 09:28:03

(문화경제 =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동양화적 필치를 바탕으로 현대 한국인의 만남을 그리는 민재영 작가와의 일문일답이다.

- 얼마 전 열렸던 성곡미술관에서의 전시 ‘생활의 발견’(2021)에 대해 “일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동시에 전통의 계승이 가능한 동양화를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이는 민재영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작가의 지향이자 특징이다. 일상의 풍경,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그리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성장기에는 미술 교육의 환경이 서양화 중심이었다. 그래서 동양화를 전공하면 내 안에서 동양과 서양의 균형이 잡힐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서예를 배웠고, 동양화 재료에 익숙하기도 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니 옛 정신을 가져와 자기화하는 게 어려웠다. 생각은 실제 삶과 따로 떨어져 나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문으로 동양화론을 배우는 것과 그것을 응용하는 것 사이에 괴리가 있었다. 또 미술이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작가는 누구인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헤맨 시간이 많았다. 그러다 내린 결론은 일회적이고 신기한 것을 보여주려 하기보다는, 비교적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고 여겨지는 나와 비슷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공감할만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경험한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남에게도 닿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겪어서 잘 알고 있는 것인 생활의 단면을 그리게 되었다. 나는 ‘한국적인 것’이라는 개념도 시간에 따라 다른 양상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내가 실제로 접하는 세계와 내가 계승 가능한 세계를 잘 융합해 지금의 내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한다.
 

‘오늘(Today)’, 한지에 수묵채색, 182 x 150cm, 2015, 도판 제공 = 민재영

- 도시의 풍경이나 사람들을 가로선을 사용해 표현한 작품이 많이 알려져 있다. 그 시작이 궁금하다.

가로선 작업은 우연히 시도하게 되었다. 1999년에 동문들과 ‘낯선 외출’이라는 단체전을 기획하게 되었는데, 전시에 출품할 작품의 조건을 ‘전통 재료와 기법으로 현대적 장면이나 소재를 그리기, 또는 전통 소재나 주제를 현대 재료나 기법으로 표현하기’로 정했다. 나는 전자를 택해서, 가로 대나무 발에 닥지를 떠낸 종이를 바탕 삼아 텔레비전 화면으로 본 영화의 한 장면을 그렸다. 유년기부터 지속적으로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접한 정보나 이야기, 이미지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 지점을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일회적으로 거칠게 픽셀 형식의 화면을 표현하고 지나갔는데 그 작업을 위해 만들어놓았던 바탕 재료나 자료들이 남아 있다 보니 2002년경부터 차츰 그와 같은 방식의 작업을 더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가로의 중봉(中鋒) 선으로 텔레비전을 암시하는 화면을 그리는 것이 그동안 내가 고민했던 몇 가지 난제를 해결해줌을 알게 되었다. 화면 안에 매우 단단한 구축감을 주는 중봉 선을 중첩하니 넓은 면적도 우려내기 없이 표현할 수 있었고, 한지에 스미는 색도 원래의 색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또한 가로선의 중첩으로 양감이나 움직임의 표현도 가능해 보였다. 한편 노이즈가 낀 주사선 화면은 기억이나 마음속에 누적된 생활 속의 전형적 이미지를 떠올려 드러내기에도 효과적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이와 같은 형식을 지속하게 되었다.
 

‘내일이 오기 전(Before Tomorrow Comes)’, 한지에 수묵채색, 100 x 136cm, 2021, 도판 제공 = 민재영
‘직장(職場, A Work Place)’, 한지에 수묵채색, 125 x 170cm, 2007, 도판 제공 = 민재영

-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풍경은 어떻게 선정하고 그리는가? 신문의 보도사진뿐 아니라 연출 사진을 이용한다고 밝힌 바 있는데 무엇에 근거해 연출하는가?

거리를 스치는 다수의 사람을 균등하게 원근 없이 담아내려면 위에서 보는 시점이 효과적인데, 이런 시점의 시각 자료는 크로키나 스케치, 스냅 사진으로는 얻어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상상만으로 그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 후배들(동문 극예술동아리 등)에게 부탁해 모델들을 구하고 지정한 장소에서 촬영한 동영상과 사진을 바탕으로 그렸다. 지인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를 찾아가거나 갓 입사한 후배의 회사를 찾아가 촬영한 적도 있다. ‘PAUSE’, ‘사람숲’, ‘길 위에서’처럼 익명의 사람들이 등장하는 도시 보행 장면이나 양복 입은 사람들, ‘The Summer Uniform’, ‘퍼레이드’, ‘Their Way Home’ 같은 교복 입은 학생들을 그린 연작 등은 연출 사진을 바탕으로 한다. 연출의 조건을 당사자들에게 설명하고, 실제 삶의 단면을 보여주기를 부탁했다. 모든 작업이 연출 사진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고 필요에 따라 선택한다. 나는 나의 삶과 다른 사람의 삶이 교차하는 교집합을 그려 나와 겹치는 공간에서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봤을 때 자신의 이야기라고 공감할 수 있는 정경을 그리고 싶었다.

한편 보도사진의 경우 선택한 사진을 일부 변형, 취합해서 그린다. 전시 ‘생활의 발견’과 관련해 많이 언급된 작품인 ‘내일이 오기 전’(2021)도 공항의 인파를 찍은 사진을 선택해 사진기자에게 허락을 받고 그 일부를 그렸다.
 

‘회의실(Meeting Room)’, 한지에 수묵채색, 57 x 100cm, 2021, 도판 제공 = 민재영

- 앞서 작가가 언급하기도 했지만, 가로선이 반복되는 표현법과 관련해 텔레비전 화면이 자주 언급된다. 그런데 텔레비전뿐 아니라 핸드폰, 컴퓨터, 혹은 CCTV 화면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누군가의 일상을 엿보는 것 같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작가가 도시의 풍경으로 들어가기보다 심리적으로 거리감을 유지하며 관찰한다고 느꼈다.

사실 그림 속 풍경 안에 언제나 나 자신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며 장면을 선택하고 그린다. 작품을 본 관객들의 반응은 ‘내가 그 안에 있는 것 같다’와 ‘거리를 두고 관조한다’로 나뉜다. 그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한 화폭에 군상처럼 여러 인물을 그려 넣기 위해서는 일정 거리가 필요하다. 만약 심리적으로 거리감이 느껴진다면 가로선의 형식이나 표현법에서 카메라와 같은 매체가 중간에 놓여있다고 연상하게 되기 때문일 거다.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가 촬영한 것을 본다는 느낌을 받아 그렇게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싶다. 등장인물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서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보는 이가 자신에게 이입할 수 있는 여지로서의 익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기념촬영(Commemorative Photography)’, 한지에 수묵채색, 50 x 300cm, 2010, 도판 제공 = 민재영

- 생활의 단면을 그리는 이유 중 하나로 공감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작품의 전체적인 기조가 외롭거나 차갑다. 도시 속에서 익명의 존재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도 같다. 관객이 주체적으로 감상하는 것도 중요하고, 작가의 의도를 반드시 알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의 작품을 보고 관객들이 어떤 부분에 공감하길 원하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면 좋겠다.

체험의 교집합을 통해 각자가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의도했다. 그것은 막연한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알고 있는 존재가 마주 보면서 받을 수 있는 위안에 가깝다. 도시에서 생활하는 보통의 사람이 반복되는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자신이 보낸 전형적인 하루를 이미지로 돌이켰을 때, 모두 다른 자기만의 체험 아카이브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 교집합이 있을 것이다. 이런 교집합의 장면을 상정해 그렸다. 그것은 주로 공공장소에서의 이동이거나 군집 생활의 단면이다. 물론 여기에는 심리적인 부분도 담겨 있다. ‘회의실’(2021) 연작은 코로나 이후 우리가 경험한 상황의 단면을 보여준다. 너무 있는 그대로가 아닌가 싶었는데 많은 관객이 자신의 상황이라며 반가워했다. 내 개인의 생활 반경이나 체험이지만 보편적일 수 있는 소재를 드러낸 경우이다.
 

‘PAUSE-줄(In the Line, On the Line)’, 한지에 수묵, 64 x 98cm, 2004, 도판 제공 = 민재영

- 지금까지 동양화(회화)라는 형식을 고수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혹시 현대의 도시 풍경을 그리는 데 적합한 다른 재료나 형식을 고민해본 적은 없는가? 매체와 형식 못지않게 소재도 지속성과 일관성을 갖는데 새롭게 다루고 싶은 주제나 소재가 있다면 무엇인가?

이제까지 익혀온 재료와 기법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동시대의 정경을 그려왔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주로 도시의 군상을 그리다 보니 자연물을 중심으로 한 풍경은 배경으로만 등장했다. 그러나 생활 반경 안의 자연과 자연의 편린에 집중하는 작업도 생각하고 있다. 2017년경부터는 사람의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 삶 속의 장면을 그린 작품이 늘어가고 있다. 2010년경부터 그려온 자동차도 가시적으로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군상화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관심사가 언제나 인간이다 보니 어떻게 변화하든 인간의 세계를 이야기할 것 같다.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의 전시 ‘SO.S(Sarubia Outreach & Support)-민재영’(2017)에서 가로선 없는 드로잉과 벽화를 선보이자 이제 이전처럼 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가로선이 없거나, 보조적인 역할로 남은 작업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지만 미리 정해놓고 작업하지는 않는다.
 

‘PAUSE-오후(In the Afternoon)’, 한지에 수묵채색, 148.5 x 210.5cm, 2005, 도판 제공 = 민재영

- 본인이 생각하는 동양화, 전통의 계승 및 재해석 등과 관련한 설명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내 작업이 대상을 바라보는 시점이나 그려내는 방식에서 전통 동양화와 거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다른 소재를 그릴 생각은 없는가, 다른 표현법은 없는가?’와 같은 질문을 받기도 하는데, 이런 질문은 순수한 궁금증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더 잘 맞는 길이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작가가 지필묵의 특별히 뛰어난 장점에 부합하는 소재와 표현 방법만을 선택한다면 비슷한 작품만 나올 것이다. 나는 그런 유사성을 벗어나고 싶다. 다른 재료를 사용해보겠다는 생각은 언제나 있지만, ‘이제까지 익혀온 전통 재료로 선택한 대상을 어디까지 관통해서 그려낼 수 있는가?’란 생각으로 지속해 왔다. 재료의 특장성에만 매달리지 않을 때 장르가 더 다채로워진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도 재미있는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다. 재료가 한정된 듯하지만, 그 안에서 틈새를 열어온 많은 작업이 있어 왔다. 동양화는 재료적인 영향력이 강한 장르인데, 그것이 한계로 다가올 수도 있겠으나 역으로 그 내부가 넓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동양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힘든 부분도 있지만 동서양의 문화 예술에 대한 시각과 고민을 교차해가면서 작업을 확장할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한다.
 

‘은신(隱身, A Shelter)’, 한지에 수묵채색, 100 x 80cm, 2017, 도판 제공 = 민재영

- 일상은 매일 똑같은 것 같지만 매일 다르다. 이런 일상의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고자 한 이론가들, 예술가들도 많다. 작가 민재영에게 일상은 어떤 의미인가?

예를 들어 소설을 읽다 보면 모두가 겪었을 법한 일인데도 작가의 독창적인 묘사로 독자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거나 상상하고 공감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기상천외한 일이 아니라 공감이 형성되면서도 소설가만의 표현력이 느껴지는 작품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각자에게 다르게 다가오지만 모두가 겪는 일이기 때문에 반가울 수도, 슬픔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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