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건희(1942~2020) 삼성 선대회장의 기증품이 춘천을 찾는다. 국립춘천박물관(관장 이수경)은 11일부터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 이건희 회장 기증 국립춘천박물관 특별전’을 연다고 10일 밝혔다.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국보)를 비롯해 이건희 회장 기증품 169건 282점을 선보인다. 김홍도가 그린 ‘추성부도(秋聲賦圖)’ 등 국보·보물로 지정된 국가지정문화유산 19건 24점이 포함됐다.
2021년 4월 28일 이건희 회장 유족이 그의 수집품 가운데 문화유산 2만 1693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듬해 4월 기증 1주년 기념 특별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를 시작으로 2년 동안 소속박물관 네 곳에서 동일 제목의 기증 특별전이 열렸다. 그리고 이달, 수집품이 가득한 ‘강원 별장’을 콘셉트로 마지막 어느 수집가의 초대전을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연다. 이번 전시는 수려한 자연 경관과 풍부한 자원을 갖춘 강원 지역 관련 기증품에 주목했다.
먼저 조선시대 대표적인 수납가구 반닫이 중 소나무로 두껍게 만들고 다른 지역 반닫이보다 큰 ‘강원도 반닫이’를 전시실 초입에 놓아 강원도 자연의 우직함을 전한다. 마지막 전시품 ‘백자 청화 동정추월무늬 항아리’(보물)의 둥글게 퍼지는 모양새와 청화안료로 그린 산과 호숫가 풍경에서 넉넉함과 여유로움을 선사하는 강원의 자연을 떠올리도록 했다.
조선시대 최고의 명승지인 강원도 금강산 관련 그림도 전시한다. 18세기 문인화가 표암 강세황이 그린 ‘피금정도’는 금강산으로 가는 여행객의 쉼터 역할을 한 정자를 그린 그림이다. 또한 금빛 물감으로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표현한 ‘금강산도’는 11월에 처음 공개하는 기증품이다.
금강산도와 강원도 반닫이 외에도 목가구 1점, 도자기 27점을 포함해 총 30점의 기증품이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인다. 높이와 지름이 각 42cm와 45cm인 대형 ‘달항아리’ 2점이 포함됐다. 특히 국외 경매에서 수집한 도자기 7점과 보관 상자, 경매품 꼬리표를 함께 전시해 이건희 회장이 해외에 있던 한국 문화유산이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 데 들인 무한한 노력을 조명했다. 이중 ‘청자 철채 인삼 잎 무늬 병’은 이미 보물로 지정된 ‘청차 철채 퇴화 인삼 잎 무늬 매병’(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기법·문양이 동일해 높은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문화유산과 수집의 가치를 직관적으로 전달하고자 전시 공간을 8곳으로 나누고 각 주제어를 표기한 ‘이야기 명패’와 이에 대한 설명을 간결하게 제공한다. 이는 처음 도입하는 전시 기법으로, ‘이야기 명패’를 따라 관람을 하면 마치 수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전시장을 거니는 경험을 선사하는 효과를 의도했다.
전시 공간 주제어는 이건희 회장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표출된 경영철학과 문화에 대한 혜안에 착안해 선정했다. 이건희 회장은 “합치는 것은 어디서나 힘을 발휘한다”(박물관의 원리, 이건희 에세이 중)며 결합과 복합화로 인한 상승효과를 강조했다. 이를 그의 수집품과 결부시켜 ‘수집의 의미’ 공간에 조선시대 사람들이 가지고 싶었던 귀한 물건이 책장에 놓인 모습을 그린 ‘책가도’ 병풍과 이건희 회장의 다채로운 수집품으로 꾸민 책장형 진열장을 함께 전시했다. 관람객이 제작 시기와 용도가 다른 물건을 연결하며 새로운 생각과 세상을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는 설명이다.
또한 이건희 회장이 강조했던 ‘변화와 도전’이라는 주제어를 한국의 도자기와 연결시켰다. 조선시대 강원도 양구에서 양질의 백토를 찾고자 노력을 기울인 것처럼 자연 재료의 본질을 꿰뚫고 변화하는 상황에 대응하며 기술 도전으로 탄생한 도자기의 가치를 전달하고자 했다.
다음 ‘본질의 공유’ 공간에서는 불교의 본질을 찾고, 그 앎을 나누고자 제작한 여러 불교미술품을 전시한다. 추상적인 불교의 가르침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고려불화 ‘천수보살관음도’(보물)에는 1000개의 손과 1000개의 눈으로 대중을 구원하려는 보살의 마음이 담겨 있다. 보살과 수행자를 함께 조각한 삼국시대 ‘일광삼존상’(국보)과 고려시대 불교의식에 사용된 ‘봉업사가 새겨진 향로’(보물), 15세기 한글로 불교 교리를 전하는 ‘월인석보’(보물)와 같은 불교미술 명품이 관람객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다.
수집가의 철학이 반영된 미술품 감상법을 제공하는 별도 공간을 마련했다. 이건희 회장은 사물을 다각적으로 분석하는 ‘입체적 사고’를 중시했다.(영화 감상과 입체적 사고, 이건희 에세이 중) ‘백자 청화 대나무무늬 각병’(국보) 한 작품만 전시해 형태, 빛깔, 문양 등 작품을 이루는 요소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뜯어보고 조명에 따라 달라지는 각병의 미감을 체험하면서 수집가의 ‘입체적 사고’에 공감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전시의 백미는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김홍도의 ‘추성부도(秋聲賦圖)’를 교체로 선보이는 ‘최고의 나눔’ 전시 공간이다. 오롯이 명작을 감상하는 독립된 공간에서 함께 나눔으로써 문화유산의 가치가 더욱 빛나는 기증의 높은 뜻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의도했다.
3개월 간 진행되는 전시 기간 중 총 주요 서화작품을 교체한다. 인왕제색도(국보)와 고려불화 천수보살관음도(보물)는 다음달 6일까지 전시하고, 다음달 8일부터 11월 3일까지 김홍도가 그린 추성부도(보물)와 고려불화 수월관음도를 전시한다. 또한 고려 사경과 조선시대 회화 7점을 다음달 20일까지 전시하고 다른 그림으로 교체한다. 이는 빛에 약한 옛 서화작품을 보호하고,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려는 뜻이다. 이번 전시의 서화작품 대부분 내년 하반기부터 시작되는 국외전시에 출품된다.
국립춘천박물관 측은 “고 이건희 회장은 ‘전통문화의 우수성만 되뇐다고 해서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이 정말 한국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 때 문화적인 경쟁력이 생긴다’는 말을 남겼다. 유족들의 기증으로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며 “이번 특별전 개최로 강원도민의 문화향유 기회가 더욱 증진되고 더 많은 국민이 우리 문화유산을 가깝게 즐기고 일상을 풍요롭게 가꿀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전시는 국립춘천박물관에서 11월 24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