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영광을 누리고 있는 기업의 이면에는 세인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간 기업들이 있다. 그들은 모두 창업 기업을 발판으로 급속한 성장을 거듭하여 여러 계열기업을 거느린 재벌로 성장하는데 성공한 기업들이지만 어느 시점부터 급속한 몰락의 길을 걸으며 역사속으로 사라져 갔다. 올해로 5·18 민주화 운동이 어느덧 27살이라는 청년의 나이로 접어들었다. 그때 그 시절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 ‘군사독재 타도’를 외치던 사람들이 기억에서 점차 사라져 가고 있는 지금, 5공화국이라는 거대 공룡의 먹잇감(?)이 된 3개의 굴직굴직한 재계 ‘대들보’들이 왜 쓰러져가야만 했는지에 대해 짚어보고, 이에 앞서 정부와 기업이 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를 알아보자. ■ 예로부터 정부와 기업은 ‘水魚之交’ 국경 막론, 시간을 초월해 기업에게 가장 중요한 생산 요소는 자금이다. 어는 한 나라에서 자금줄을 쥐고 있는 것은 재벌도 아니며, 전 세계의 신처럼 군림하고 있는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아닌 그 나라의 정부다. 금융이 관치(官治) 금융의 성격을 강하게 지닌 상황에서 기업들의 운명은 정부와 어떤 관계를 유지하느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어느 순간이라도 자금줄을 틀어쥔 쪽이 기업의 생사권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업의 진입에 대한 힘을 가진 것도 정부, 인허가권을 이용해 신규 진입을 허용하기도 막기도 할 수 있는 것도 정부다. 어디 그뿐인가? 과거에는 지금보다 더 산업합리화 조치를 이용한 정부의 각종 퇴출 정책과, 정부의 인수기업 선정 권한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업이 정부와 어떤 관계를 갖느냐는 기업 성장에 중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하지만 과거 군사 정부의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정책 결정 방식에서 문민정부로 변화됨에 따라 과거와 같이 정부가 전횡을 휘두르는 일은 점점 사라들고 있지만 현재도 기업과 정부와의 관계의 중요성은 한 기업의 미래를 점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로 적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 ‘국제그룹’, 5공 無所不爲 칼날의 희생양 부산에서 재벌로 이름난 양정모 씨는 1947년 부친의 정미소 한 켠에 고무신 공장을 차리면서 사업을 시작한다. 이후 국제그룹을 설립해 사업을 점차 번창시켜 연간 매출액만 1조 8천억원에 수출 9억 3천만 달러, 3만8천명의 종업원과 20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7위의 대기업으로 성장시킨다. 양 회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제그룹이 해체될 수 밖에 없었던 표면적인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방만한 경영과 무리한 기업 확장, 둘째-과도한 단기 자금의 의존, 셋째-해외 공사의 부실이다. 실제로 국제그룹은 친족중심의 비능률적인 경영체계로 그룹을 운영하며 이들 간에 내분이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소위 재벌 사위들에게 경영을 맡겨 사위들 간의 경쟁이 그룹 내부에 파벌을 조성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늘 단기성 자금으로 충당하다 보니 항상 자금조달에 시달려 도산으로 치닫게 되었고 경험과 지식의 폭이 넓지 않은 건설업에 뛰어들어 4년 남짓한 공사기간동안 막대한 적자를 내며 결국 1985년 2월 21일 국제그룹은 해체하게 됐다. 하지만 이같은 이유로 거대그룹 ‘국제’가 하루아침에 공중분해 된 사실은 5공화국의 숱한 파문과 의혹을 남기며 베일에 가려져 ‘5공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당시 항간에는 서슬이 퍼렇던 5공화국의 고위층이 국제그룹의 도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바꿔 말하면 ‘권부에 의한 손보기’에 걸려 어처구니없게도 무소불위의 권력이 휘두르는 칼날의 제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1983년 새마을 성금 과정에서 양정모 씨가 그룹의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적은 금액을 냈다던지, 1984년 12월 폭설로 인하여 청와대 만찬에 늦게 참석했다던지, 2·12일 총선에서 부산 지역의 야당 성향과 당시 부산 지역 상공인 대표였던 양정모 씨의 협조 부족 등이 세상에 회자되고 있는 소문들이다. 그러나 93년 7월 당시 헌법재판소가 국제그룹 해체결정이 헌법에 보장된 ‘자유시장 경제원칙’을 침해한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의혹은 한꺼풀 벗겨졌다. 국제의 공중분해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독단적 결정이며, 그 배경이 결코 경제적 판단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는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국제그룹의 해체결정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85년 2월 21일. 당시 국제의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의 이필선 행장이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국제그룹 정상화대책’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이 행장은 국제그룹의 분해방안이 적힌 유인물을 짤막하게 읽은 후 질의답변도 사양한 채 기자회견장을 서둘러 떠났다. 그러나 국제그룹의 해체작업은 주거래은행이 일체 간여하지 않았으며 이 행장 또한 재무부사무관이 밤샘작업으로 만든 발표문을 당일 건네받고 대신 읽었을 뿐이었다. 국제그룹 해체의 최종결정은 이미 2월7일 당시의 전 대통령과 김만제 재무장관의 밀실단독회동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때 인수자까지 결정됐던 것이다. 국제그룹의 모 기업인 국제상사에 마지막 공채로 입사했다던 A씨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까지 소상히 듣고 보았다”며 “공중분해로 인해 계약 불이행에 따른 수백억 규모의 위약금이 고스란히 국민의 혈세로 충당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국제 그룹 해체 사건은 원상회복하기엔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 버린것 같다” 토로했다. ■ 무모한 모험으로 끝나버린 ‘율산그룹’ 전남 고흥이 고향인 신선호 씨는 26세이던 74년 1백만원을 갖고 오퍼상을 시작했고 점차 제조·해운·건설·섬유·관광업 등으로 영역을 넓히며, 77년말에는 11개 계열사 7천여명의 종업원을 거느리는 거대 그룹을 일궈낸다. 78년초에는 종합상사 지정도 받고, 잠실호수부지 30만평을 매입하는 등 부동산도 늘려갔다. 그러나 78년 국내 경기 호황으로 건축자재를 수출하기가 어려워지면서 자금난이 시작된다. 같은해 추석명절 전후로 발생한 밤빔사건과, 79년 1월 신선호 사장 납치사건이 연쇄적으로 터지면서 결국엔 율산그룹의 신선호는 79년 외국환관리법위반 및 업무상 횡령혐의로 구속되면서 율산의 이름은 점차 잊혀져 갔다. 율산이 급성장할 때 언론은 ‘재계 신데렐라의 탄생’이라고 끝없는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율산이 부도를 맞을 때는 ‘철없는 어린아이들의 무모한 모험’으로 매도했다. 그때로부터 30여년이 지나면서 율산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젊은 율산맨들이 추구했던 열정과 아이디어, 재계의 기득권 파괴와 경쟁력에 의한 승부수, 돌파력으로 요약되는 ‘율산정신’ 만큼은 지금 더욱 더 유효하다는 지적들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율산그룹 또한 부도가 내부의 원인보다는 ‘정치권의 음모’와 ‘재계의 견제 및 타도 반열’에 올라 초래됐다는 증언들이 나오면서 ‘5공 시대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율산부도의 정치권 음모로 거론되는 결정적인 요인은 ‘신선호 사장 납치 사건’이다. 신사장은 1979년 1월 5일 오후 1시쯤 정부 고위 기관 비서(청와대 비서실 의미)라고 신분을 밝힌 전화를 받고 그들을 만나기 위해 약속장소로 갔다. 약속장소에서 그들은 신 사장의 운전기사를 내리게 한 후 본인들이 직접 운전을 하고는 청와대가 아닌 경부고속도로 톨게이트에 진입, ‘이건 아니다’라고 느낀 신 사장은 차가 정차하는 순간 극적으로 탈출했고, 이후 범인들이 붙잡히면서 단순한 인질 납치극으로 결론났다. 재벌총수의 백주납치사건은 세상을 뒤흔들었다. 문제는 신 사장이 탈출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터졌다. ‘재벌총수가 순순히 따라 간것이 납득이 가지않는다’는 기자들의 집요한 질문에 ‘사실은 청와대 비서실을 사칭했기 때문에 따라나섰다’고 실토해버린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이 어딘가. 무소불위의 권력기관 아닌가. 당시 김계원 비서실장이 신 사장의 회견내용을 전해들은 뒤 노발대발했고, 청와대 비서실장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 율산을 회생불능으로 몰고 갔다는 얘기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 역사속 미스테리 기업, ‘명성’ 1968년 명성그룹의 창시자 김철호 씨는 1966년 호남비료에서 안전과장으로 근무하면서 따로 택시를 굴리는 운수사업에 손을 대 금강운수라는 회사를 차려 경영전선에 뛰어든다. 이후 레저산업·관광업·전자산업을 비롯해 신문사까지 경영하는 다재다능한 경영능력을 발휘하며 명성그룹을 하루 아침에 ‘멀티플레이형 기업’으로 성장시킨다. 하지만 경기불황속에서도 끈임없는 고액의 광고와 사세확장을 하는 미스터리 기업 명성그룹에 대한 정밀세무조사를 1983년 6월 15일부터 7월 20일까지 35일간 실시하겠다고 국세청장이 밝히면서 명성에 대한 실체 해부가 시작됐다. 명성그룹에 대한 세무조사는 50여명의 정예조사요원을 투입한 정밀법인조사로 실시됐다. 그후 한달가량 경과한 8월 17일 국세청의 고발에 따라 대검중앙수사부는 명성그룹회장 김철호 씨를 탈세·업무상횡령 등 혐의로, 은행창구를 통해 김철호 회장에게 사채를 모아 준 상업은행 혜화동지점 대리 김동겸 씨를 업무상횡령 혐의로 각각 구속했다. 김철호 소유 명성계열기업은 1978년도에는 금강개발 등 5개 법인으로 그 자본금 총액이 1,200만원이고 외형총액은 3,800만원에 불과 했으며 그나마 결손이 1,300만원이었다. 그런데 1982년도에는 자본규모가 59억3천여만원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급팽창했다. 명성의 미스터리는 1979년 10월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8년도에 서민용 아파트 1동을 건축중 부도를 내고 쫓겨다니던 김철호 씨가 어떤 수단을 써서 68억원이 드는 오성골프장을 인수했느냐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김철호 회장은 “육군 헌병감을 지낸 공국진 씨로부터 골프장을 사들이면서 인수자금 11억원, 공사비 50억원, 운영비 7억원을 포함해 8억원이 들었다”며 “이러한 거액은 37억원이 거액사채, 22억원의 골프장 입회금, 5억원의 영업수익, 4억원의 소액사채로 충당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명성은 오성골프장를 인수하는데 그치지 않고, 1983년도까지 21개의 계열로 급속히 확장했다. 외형도 1979년에는 24억원, 1980년 47억원, 1981년 79억원, 1982년도 254억원으로 급팽창한다. 그런데도 세무서에는 매년 결손으로 신고만 되풀이 됐고, 자본금 59억원 중에서 21억원을 잠식하여 자금조달이 어려워야 할 상황인데도 사업은 날로 번창하는 수수께끼 같은 그룹이었다. 항간에는 이 같은 상황에서 ‘큰 손’ 등이 명성의 뒷배경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무성했다. 통일교가 뒷돈을 대고 있다는 풍문이 나돌았는가 하면 대통령의 장인 이규동 씨가 뒤를 봐주고 있다는 이야기도 흘러 나왔다. 이러한 명성그룹에 대해 국세청은 1982년 5월 세무조사를 실시하여 17억원의 탈세를 추징했었다. 털어 먼지가 안 날 기업이 없는 마당에 세무조사를 당한 기업 치고 그 정도의 추징을 당했다면 일반적인 사건에 속했다. 그러나 명성에 대한 루머는 끊이질 않고 계속 증폭되어 갔다. 그당시 국세청장인 안무혁 씨는 “1983년 6월 다시 세무조사를 실시했는데, 명성에 대한 세무조사는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이였다고 밝혔다. 당시 윤자중 교통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레저산업육성계획’을 보고하면서 명성을 적극적 참여시키는 내용을 골자로 보고했는데 이 보고를 받고 난 대통령이 정보 보고를 통해 자신도 명성에 관한 의구심을 가져왔던 터라 직접 국세청 조사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명성’이라는 기업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라는 지시를 한 것이다. 당시 5공화국 부실 기업 정리 청문회에서 명성그룹 부문을 맡았던 한 인사는 명성사건에 대해 ‘확실히 규명되지 않았지만 확실히 정치냄새가 나는 사건“이였다고 평해 명성은 아직까지도 미스터리한 기업으로 역사속에 남아 있다. -염미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