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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태백산맥 저 편의 태백산맥

[서평] 조정래 대하역사 소설 <태백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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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3호 ⁄ 2007.07.02 13:02:26

2003년 2월 25일 작고한 소설가 故 이문구 선생의 고향은 충청남도 보령이다. 머드축제로 유명한 그곳의 바다는 그러나, <관촌수필>의 작가에게는 비극의 바다였다. 1950년, 그의 셋째 형이 좌익부역자로 몰려 수장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문구의 가족사적 비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해방 직후 남조선노동당 보령군 총책이던 그의 아버지와 둘째 형은 1950년 예비검속 때 처형되었고, 큰 형은 일제시기에 징집되어 오늘날까지 소식이 없다. 전쟁은 넷째이던 어린 이문구를 장손이자 맏아들로 만들어버렸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손가락질은 이문구에게, 동네에서나 학교에서나 아무개의 아들이라는 게 입에 오르내리면 안 된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아버지와 형제들의 죽음을 통해 열두 살 소년은 이미 죽음을 학습했고, 생존을 생각해야 했으며, ‘북진통일 궐기대회’에도 열심히 따라 다녀야 했다. 그것이 어린 이문구의 생존법이었다. ■ 화두 혹은 상처 훗날 작가가 된 이문구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가족사를 드러낸다. 스스로 빨갱이의 자식임을 밝힌 것이다. 그것이 어른 이문구의 ‘극적 드러내기’였다. 아버지의 과거와 서슬 퍼렇게 살아있는 연좌제는 그에게 평범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문학’이다. 유일한 탈출구였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문구는 대표적인 우익문인인 김동리의 문하이다. 그가 김동리의 문하로 들어간 것은 이문구라는 한 고립된 인간이 선택한 생존법이었다. 언젠가 이문구가 고백했듯이, 김동리의 제자가 되고 추천을 받아서 제도권 문단에 나오면, 김동리는 그에게 우산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다. 실제로 김동리는 30여 년 동안 이문구의 신원보증인 노릇을 하였다. 지난 1995년 이문구 소설의 고향인 관촌 마을에 문학비를 세우려 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빨갱이 아들’의 비석을 세울 수 없다며 반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비석이 세워지고 고향사람으로 인정받기까지, 아비와 형의 죽음으로부터 45년이 흘렀다. 이 땅에는 수 없이 많은 ‘이문구들’이 있다. 분단과 전쟁, 그 후의 전쟁과 분단이 남긴 반공냉전신앙 속에서 ‘이문구들’의 삶은 해체되고 찢겨져 왔다. ■ 혁명은 따뜻하다 1980년 이후, 우리 문학가들은 ‘이문구들’에 주목한다. 그 시간대가 가지고 있는 유산과 상처 혹은 화두가 ‘5월 광주’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학살의 수괴가 통치자의 자리에 있는 나라, 많은 이들이 변절하고 또 그 변절을 합리화하는 문학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그 눈물조차 흘릴 수 없던 시대에, 그들은 목숨을 걸고 글을 썼다. 4·3 항쟁과 대구인민항쟁과 여순사건과 국민보도연맹의 민간인 희생자들의 얘기와 6·25 당시 학살당한 셀 수 없이 많은 남과 북의 민중들을 쓰고 또 썼다. 그러나 그 작품들은 출판될 수 없었고, 설혹 출판되었다 하더라도 독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사건의 나열에 치중한 나머지 문학 본래의 미덕인 인간의 내면에 대한 탐구가 부족했고, 분노에 치우친 나머지 읽는 이로 하여금 쉽게 지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한 작품이 어느 문학잡지에 연재되기 시작하면서, 패배주의와 감상주의에 젖어 있던 우리 문학에 희망과 민족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1983년 9월부터 1989년 9월까지, 만 6년 동안 원고지 1만6200매의 분량으로 씌어진 이 작품은, 1986년에서 1989년까지 매년 2~3 권으로 묶여져 나올 때마다 엄청난 판매고와 함께 문단의 찬사와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리하여 6·25 전후사에 대한 총체적 파악과 실체적 진실의 규명에 성공한 작품으로, ‘분단극복문학’의 모범으로, 해방 이후의 모든 붉은 금기를 일거에 깨어버린 한국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불리는, 이 소설의 이름은 <태백산맥>이다. <태백산맥>은, 1948년 10월의 여순사건에서 시작하여 1953년 7월의 휴전협정 조인에서 막을 내리는 가운데,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전남 지역 빨치산들의 시각이나 입장을 최대한 살리려 하면서, 이들에 대한 왜곡과 편견을 벗겨 버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극우반공냉전 신앙의 시간대 속에서 그 동안 ‘공비’ 혹은 ‘비적’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명칭으로만 불려졌던 빨치산들에게, 민족주의와 민중중심주의의 시각으로 그들의 삶에 걸맞는 정당한 이름을 찾아 주자는 조정래 선생의 창작 의도는, 6·25 전후의 빨치산들을 향하여 습관적으로 ‘공비’라고 부르는 대신, ‘한 많은 농민’ 혹은 ‘자각하고 행동하는 민중’이라는 역사의 합법칙성에 부합하는 명칭을 선사한다. 당시의 빨치산들에게 정당한 규정이나 역사적 위치를 찾아주는 것은, 일회적인 감상에 호소하거나 왜곡된 공식문서에 의해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조정래 선생처럼, 우리 역사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는 극우적 편견과 공식문서의 도식화된 왜곡의 때를 벗겨내고, 근거와 목적성이 분명한 재해석 작업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조정래 선생은 수없이 많은 기록의 검토와 증언의 채취, 그리고 여러 차례의 현지답사 등의 번거롭고도 고통스러우며 위험하기까지 한 경험을 해야 했다. 작가 조정래가 파악하고 있는 민족분단의 문제는 정치적 이념에서가 아니라 민족의 삶이 밑바닥에서부터 본래적으로 얽혀 있던 의식의 매듭에 해당된다. 이러한 인식은 분단 상황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차원의 논의가 드러내는 논리적 허구성을 지적할 수 있는 심정적 근거를 제공한다. 그의 장편대하소설 <태백산맥>은 이러한 관점에서 분단민족의 허리를 이어가는 작업으로 지속되고 있다. 그가 주력하고 있는 것은 숨겨진 진실의 재확인과 민족적 자기 모럴의 새로운 확립이다. 우리 민족 모두가 분단의 비극에 대해 새로운 비판적 반성을 시도해야만 하는 윤리적 판단이 이 작품에 깊이 깔려 있다. - 권영민(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바람이 바람을 불러 바람 불게 하고 <태백산맥>이 10권으로 완간된 것은 1989년 11월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책은 물경 500만부가 팔려나갔다. 평론가와 작가, 출판인들에 의해 해방 이후 최고의 작품으로 꼽혔으며, 대학 도서관 대출 순위 1위를 기록했는가 하면, 서울대 신입생들이 뽑은 ‘가장 읽고 싶은 책’에서도 1위에 선정되었다. 10권이라는 방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일본어로 번역 출간되고 있기도 하다. 한마디로, <태백산맥>은 최상의 문학적 평가와 최고의 상업적 성공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이 소설의 어떤 점이 그런 일들을 가능하게 했을까. 조정래 선생은 1991년에 쓴 ‘태백산맥 창작보고서’라는 글에서 처음 증언을 수집하던 무렵의 어려움을 사례를 곁들여 털어놓고 있다. 이 작품이 한창 쓰여지고 있을 때 6월 항쟁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이태의 <남부군>을 필두로 한 빨치산 수기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지만, 조정래 선생이 이 소설에서 보여준 빨치산의 실상과 의미는 당사자들의 수기와 역사학계의 연구를 앞서는 것이었다. 80년대 이후 특히 대학생 등 젊은이들이 <태백산맥>에 열광한 것은 무엇보다도 작가의 새로운 역사 해석에 매료된 때문이었다. 후일 임권택에 의해 영화화 되었을 때, 극우단체 회원들은 “영화관을 폭파하겠다”고 협박을 일삼기도 했고, 영화관에 난입하여 뱀을 풀어놓는 등의 몰상식한 행위로 자신들의 한계를 여과 없이 보여 주기도 했다. 하나의 문학작품이 제대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 상황이 필요하다. 첫 번째로 그 사회가 ‘열려’ 있어야 한다. ‘닫힌’ 사회는 ‘벽’ 안의 그림들만을 제공할 뿐이다. 두 번째로 모든 ‘금기’에 도전하는 사람을 칭찬해 주는 문화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성적 소수자나 장애인, 그리고 일용직 노동자 등에 대한 배려가 없다. 그들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권리마저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세 번째로 문학가 혹은 문학 종사자에 대한 상징 조작이 혁파되어야 한다. 현재의 국어교과서에 실린 한국문학 작품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민족반역자들의 글이다. 물론 그들의 문학작품도 읽혀져야 한다. 다만 그 ‘읽기’는 무미건조한 찬양조의 그것이 아니라, ‘비판적 글 읽기’여야 한다. 모든 텍스트는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찬양 일색의 읽기는 영혼을 병들게 할 뿐이다. <태백산맥>의 가장 큰 미덕은 ‘솔직함’에 있다. 당시 남한 사회에 유행하던 온갖 소문과 육두문자 그리고 걸쭉한 성적 농담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리얼리즘의 진정한 힘을 알고 싶다면, <태백산맥> 안에 나오는 밥 먹는 장면들을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금세 입 안에 침이 고일 것이다. <태백산맥>이 지니는 두 번째의 미덕은 왼 편과 오른 편 그 어느 쪽도 소홀히 하지 않는 ‘균형의 미학’이다. 염상구가 가장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백남식이나 여타의 다른 수구적 인물들과는 달리, 염상구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것은 염상구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냄새 때문일 것이다. 수구라 하여 다 인간쓰레기 같은 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염상구처럼 ‘인간의 얼굴을 한’ 수구도 있다. ■그대 언 살이 터져 詩가 빛날 때 작가들은 종종 되뇌곤 한다. ‘한국문학에 과연 미래가 있는가’라고. 그리고 또 묻는다. “한국문학의 패러다임은 무엇이어야 할까.” 저 장엄했던 ‘시의 시대’는 다시 올 것인가.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자신 없다. 현 단계의 한국문학의 얼굴이 어느 지점을 바라보고 있는지, 작가들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지난 시기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두 개의 산맥을 험난하게 넘어 왔듯이 오늘의 작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강력하고도 위압적인 적과 마주하고 있다. 표절을 ‘패러디’라 호칭하고, 남의 글을 버젓이 자신의 것으로 속여 출간하고, 신춘문예를 나눠 먹고, 메이저 출판사들 간의 광고 경쟁에 휘둘리고, 맨 정신으로 잠들기가 힘든 상황이다. 한국문학은 노벨문학상이라는 월계관을 쓸 수 있을 것인가. 현 단계로서는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한국 정부는 문학 혹은 예술을 일종의 들러리로 여겼다. 문인단체 역시 극우 단체에 못지않은 수구적 행태를 보였다. 물론 지금은 ‘민족문학작가회의’라는 보다 열린 조직으로 분화했지만.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단순히 국가의 예산으로 작품을 번역하기만 하던 지금까지의 관행에서 벗어날 때 한 걸음 진보할 수 있다. 노벨문학상이 타고 싶은가. 그렇다면, 아일랜드를 본받으라. 그 나라는 독자들에 의해 검증받은 문인들에게 국가에서 집필 공간을 제공한다. 우리가 그렇게도 우습게 보는 일본은 독서열이 우리의 10배 정도이다. 부러워만 하지 말자.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국정교과서의 공식화된 문학에 식상한 사람들, 당장 서점이나 도서관으로 가 보시라. 거기 보석처럼 빛나는 한국어들이 있다. 모국어의 힘을 느끼고 싶은가. 문학서적을 읽어 보시라.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 숨 쉬는 한반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될 것이다. 그 전에 먼저, 국어교과서를 찢어 버리시라. -유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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