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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남루한 일상을 담고 가는 섬진강

[서평] 김용택 서정시집 <섬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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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5호 ⁄ 2007.07.09 13:37:36

일본어에서는 산과 바다를 ‘연인’이라고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들을 이어주는 중매쟁이가 바로 ‘강’인 셈이다. 섬진강은 백두대간의 한 줄기인 호남정맥을 따라 전북 진안군 백운면의 팔공산에서 발원한다. 이곳에서 출발한 물은 임실군의 옥정호에 잠시 들렀다가 순창·남원·곡성 등을 굽이치고, 지리산 허리를 휘감아 돌은 후, 전남과 경남의 경계를 이루며 남해로 흘러든다. 섬진강은 산에 대한 애정으로, 그리고 바다에 대한 연민으로 바다의 품에 안기며 총 500여리의 긴 여정을 끝낸다. ■ “시가 내게로 왔다” 섬진강을 찾아가는 여행길은 서울을 기준으로 적어도 네 시간을 각오해야 한다. 본격적인 여름 더위가 찾아오고 우리네 내면이 지쳐갈 때쯤이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산이나 바다 혹은 강을 찾아 떠난다. 그리고 시인 김용택은 삶에 지쳐, 혹은 허허로운 마음의 빈 곳간을 채우기 위해 섬진강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한 편의 따스한 시를 낮은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대 정들었으리 지는 해 바라보며 반짝이는 잔물결이 한없이 밀려와 그대 앞에 또 강 건너 물가에 깊이 깊이 잦아지니 그대, 그대 모르게 물 깊은 곳에 정들었으리 풀꽃이 피고 어느새 또 지고 풀씨도 지고 그 위에 서리 하얗게 내린 풀잎에 마음 기대며 그대 언제나 여기까지 와 섰으니 그만큼 와서 해는 지고 물 앞에 목말라 물 그리며 서러웠고 기뻤고 행복했고 사랑에 두 어깨 깊이 울먹였으니 그대 이제 물 깊이 그리움 심었으리 기다리는 이 없어도 물가에서 돌아오는 저녁 길 그대 이 길 돌멩이 풀잎 하나에도 눈 익어 정들었으니 이 땅에 정들었으리 더 키워나가야 할 사랑 그리며 하나둘 불빛 살아나는 동네 멀리서 그윽이 바라보는 그대 야윈 등 어느덧 아름다운 사랑 짊어졌으리. - ‘섬진강 3’ 그 ‘깊은 강에 정든 당신’은 어쩌면 시인 자신이거나 마음 한 켠에 누더기때가 가득 묻은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고향 전라북도 임실군 덕치면으로 가는 길은 멀지만, 그 먼 길의 곳곳에는 고단한 삶의 여정을 지나가는 우리네 민중들의 아름답거나 슬프거나 혹은 남루한 일상의 모습들을 자신의 몸뚱이 한 가득 담고 있는 섬진강이 흐르고 있다. 그러므로 ‘강’은 그 강 주변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자궁이자 동시에 어머니의 젖가슴이다. 섬진강변에 살아가는 속정 깊은 사람들은 쉽사리 그 강가를 떠나지 않는다. 김용택은 그것을 일러 ‘고향 근성’이라 한다. 사람들이 모두 도회지로 떠난 후에도 여전히 남아 섬진강 물로 농사를 짓고, 아이들을 키워낸 고향을 시로 말하는 사람. 김용택은 그런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 진정한 ‘고향’의 이미지는 그 자신이 살고 있는 덕치면이 아니라, ‘섬진강’이라는 이름의 참 맑은 물살이다. ■ “나는 떠나지 못한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고향을 지켜야 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가 꿈꾸는 ‘더불어 잘 사는 세계’는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것처럼 흔적 없이 사라졌고 ‘농촌은 끝났다’는 씁쓸한 느낌만이 김용택이 살고 있는 섬진강변을 쓸쓸히 배회하고 있다. 그가 10년 전에 처음으로 펴냈던 시집 <섬진강(창작과비평사)>에는 이러한 가난의 버거움과 농촌 공동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그리움이 농밀하게 깔려 있다. ‘이 세상 우리 사는 일이 저물 일 하나 없이 팍팍할 때 저무는 강변으로 가 이 세상을 실어오고 실어가는 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 팍팍한 마음 한끝을 저무는 강물에 적셔 풀어 보낼 일’이라고 말하는 시편들이 가득한 것이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뜰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띈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자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 ‘섬진강 1’ 김용택의 시는 문학적으로도 빼어나지만 그 문학으로 농투성이의 삶이 얼마나 고귀한가를 일깨운 시인이라는 평가가 더욱 잘 어울린다. 많은 이들이 대처로 떠나갈 때, 그는 한 치 흔들림 없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논과 밭에서 흘린 땀을 노래했고,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강물 같은 농민의 심성을 말했다. 김용택 시인과 가장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 시인으로 이생진이 있다. 김용택이 ‘섬진강’을 상징한다면, 이생진은 ‘성산포’로 대표되는 삶의 공간을 주제로 자연과 사람들, 아이들을 주제로 맑고 꾸밈없는 삶과 풍경을 시화해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산하, 김용택의 말 그대로 “유난히 자정능력이 강해서 하류로 내려갈수록 물이 맑아지는” 섬진강 줄기는 지금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여기저기가 찢겨지고, 흐린 물살의 몸살을 앓고 있다. 인간의 욕심이라는 게 원래 자신만의 ‘오르가즘’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은 까닭이다. 강과 그 강을 인간과 공유하는 뭇 생명들의 생로병사 따위에는 별반 관심이 없는 게 인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한 순간의 쾌감을 위해서 별의 별 짓을 다 하는 게 바로 인간이 아니던가. ■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섬진강의 깊고 푸른 강물 아래를 흐르는 것은 물살이 아니라, 그 강에 의지해 생명을 이어가고 자손을 퍼뜨리며, 그 강물을 마시는 생명들의 거대한 영혼의 덩어리다. 비록 그 산하는 예전과 같지 않고, 사람들 역시 말라비틀어진 꽃대궁이의 눈빛으로 마음 아파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 땅에 희망을 심고 가꾸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시인 김용택과 같은 사람들이다. 김용택은 그 사람들을 일러 “우리네 농민의 이름 앞에 ‘성(聖)’자를 붙여줘야 할 것”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모두가 아우성치며, ‘위기’와 ‘흔들림’을 말하는 때조차도 흙투성이 농투사니들은 그저 묵묵히 땅을 어루만졌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심장에 새긴 채. 어린 시절, 검정고무신에 담겼던 섬진강변의 하늘을 시로 말하는 사람 김용택과 한 명의 탁월한 이야기꾼의 감성을 키워낸 섬진강. 김용택의 시는 여전히 강을 사랑하고, 섬진강 역시 그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해준다. 그 둘이 만나 어우러지는 우리말의 따뜻한 향연은, 절망과 질곡의 시대에도 능히 ‘희망’과 ‘봄’을 노래하게 해주는 힘이다. <유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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