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의 전설이라 불리는 故장준하 선생 등에 대해 지난 4월 11일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장준하 선생의 사망과 관련해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사망으로 보기 힘들다는 결정을 유가족에게 통보했다. 이에 유가족 및 추모연대는 심의위와 면담을 요청하며 항의 농성에 들어갔고, 농성 일주일 만에 장준하 선생에 대해 심의위는“2004년 2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했듯이 정황적 증거는 명백하게 타살로 규정된다”면서 “하지만 관계 정보당국이 결정적 증거를 은폐함으로서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 朴, 70년대 민주 인사 姑장준하 선생 미망인 만나 광복군 장교 출신인 故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맞서는 숙명적인 정치적 라이벌로 뗄레야 뗄수 없는 사이로 유명하다. 얼마전 1970년대 대표적인 민주 인사였던 故장준하 선생의 미망인인 김희숙(82) 여사에게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한나라당 박근혜 경선후보가 32년만에 아버지를 대신해 손을 내밀며 화해를 시도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박 후보는 지난 11일 오전 서울 일원동 한 아파트에 거주하는 고인의 미망인 김희숙 여사를 방문해 김 여사의 두 손을 꼭 잡고 “장준하 선생이 돌아가신 후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을지 생각하며 진심으로 위로 드린다”고 사과의 뜻을 전했다. 이에 김 여사는 “오늘 만남이 좋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박 후보가 온다기에 기도도 많이하고 시간이 많이 흘러 그런지 자꾸 잊어버려서 박 후보에게 말할 세 가지를 적어놨다”고 대답했다. ■ 김희숙 여사, 똑같은 역사 다시 되풀이 되지 않도록… 이어 김 여사는 “사과의 진정성을 보여주고, 과거 고통받았던 분들에 대한 보답은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 달성으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다시는 똑같은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개인적인 욕심없이 헌신해 달라”면서 “과거는 과거지만 다시는 우는 사람이 없도록 해달라”며 눈물을 보였다. 이에 박 후보는 “장 선생님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열정을 갖고 계셨던 분”이라며 “돌아가신 아버지와 정치적으로 반대 입장이셨고 방법은 달랐지만 두 분 모두 항상 개인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셨다”고 위로했다. 박 후보는 또 “장준하 선생님께서 꿈꾸셨던 나라는 자유민주주의가 바로서고 국민모두가 잘사는 나라가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며 “우리 모두가 그 꿈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것이 민주화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아픔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렇게 하기 위해 내 작은 힘이나마 최선을 다하겠다”고 화답했다. 이에 김 여사는 박 후보의 손을 잡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미국에 있는 막내아들 생각이 난다”며 “딸처럼 여길테니 힘들어도 이야기할 곳이 없으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말했다. 한편, 박 후보는 이날 김 여사에게 ‘화해와 사과’를 상징하는 흰 장미와 붉은 장미 다발을 건넸고 김여사는 박 후보에게 1971년 출간된 고인의 저서‘돌베개’를 선물했다. 이날 만남에는 고인의 장남과 친분이 있는 서청원 캠프 상임고문의 주선으로 이뤄졌으며, 서 고문과 김 여사의 며느리가 동석했다. 인혁당 관계자 등 또 다른 과거사 피해자들을 만날 계획을 뭍는 질문에 박 후보 캠프의 이혜훈 대변인은 “전략적으로 계획하지 않지만 늘 진심으로 사과할 마음을 열어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준하 선생은 누구? 언론인이자 정치가인 장준하 선생은 1918년 8월 27일 평북 의주에서 기독교 목사인 장석인과 김경문 사이에서 4남 1녀의 맏아들로 태어나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에서 서거했다. 그는 1944년 6월 일본군 학도병으로 중국전선에 배치되었다가 곧 탈영하여 중국군에 편입된 후 바로 김준엽 등과 함께 충칭으로 가서 1945년 1월 광복군에 가담해 광복군 대위가 되었고, 1945년 8월 중국 시안에서 미육군 군사교육을 받고 국내 밀파 특수공작원으로 대기하다가 8·15 해방을 맞이 했다. 1945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의 수행원으로 입국, 김구의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및 민주의원 비서 등을 역임했고, 1953년 4월 월간 〈사상계〉를 창간하여, 지속적으로 자유·민주·통일·반독재 투쟁에 헌신했다. 이후 그는 1962년 8월 막사이사이 언론문학부문상을 수상했고, 1967년 3월 야당통합을 위한 4자회담을 주선하여 통합을 이뤄냈다. 한편,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운동 중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되어 3개월간 투옥되었으며 그해 6월 옥중출마로 서울 동대문 을구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쾌거를 이룬다. 그는 1972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 참가하고, 1973년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하여 최고위원에 피임되었다. 같은해 12월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백만 인 서명운동’을 주도했으며, 19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1974년 4월 15일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2월 지병인 협심증이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출옥 후 곧바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등을 통해 다시 박정희정권과 맞섰고, 1975년초에는 민주회복을 위한 범민주세력의 단합을 강력히 촉구, 각계에서 그의 호소에 동조하는 성명이 잇따르면서 재야세력의 확고한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그의 저서로는 <돌베개>가 있으며, 1975년 8월 17일 그는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 3리 약사봉에서 의문사 했다. <염미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