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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유당공원 일부 공덕비 알고보니 ‘친일파’

광양시 무관심 속 친일파 공덕비 방치 -역사적 재평가 통해 정비 서둘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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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6호 ⁄ 2007.07.16 11:54:06

광양시가 광양지역 대표적인 전통 공원인 유당공원 내에 조성된 공덕비 관리가 허술해 빈축을 사고 있다. 이들 공덕비 가운데 반민족 친일행위자의 애민비는 물론, 근현대사의 사료적 재판단이 필요한 공덕비를 별다른 설명 없이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 같은 공덕비에 대한 정확한 내용파악과 함께 존치여부에 대한 검토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광양시문화해설사협회에 따르면, 친일파로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하사받았던 이근호 애민비를 비롯, 일제시대 판사를 지낸 경력으로 지난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바 있는 조예석 선정비 등 친일파 공덕비 2기가 유당공원 내 그대로 방치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 갑오농민전쟁 당시 대접주 김개남 장군을 척살하고 녹두장군 전봉준 장군을 체포해 서울로 압송했던 인물인 ‘전라관찰사 이도재 선정비’도 별다른 설명 없이 방치되고 있다. 이와 함께 1869년 광양변란을 진압한 광양현감 윤영신의 업적을 기념해 조성한 토평사적비에 대한 평가도 재정립 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폭정에 시달리다 이에 반발해 발생한 것이 바로 광양민란이기 때문이다. 이 민란을 폭정 당사자인 현감이 진압했고, 그것을 기념한 것이 바로 토평사적비다. 그러나 폭정에 저항해 백성들 스스로가 민란을 일으킨 광양민란은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하고, 정당한 역사적 판단과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게 협의측의 주장이다. 광양시문화해설사협회 최영철 회장은 “친일파와 동학군 포살자들의 공덕비가 아무런 설명과 안내 없이 여전히 시민들의 공경을 받고 있는 시의 현실이 부끄럽다”며, “시급히 이들 비석들에 대한 역사적 판단을 통해 부끄러운 역사를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 비석의 비문들은 현재 광양의 한 단체가 탁본해 학계에서 정확한 비문내용을 파악하고 있으나 비문 훼손상태가 심해 내용파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광양읍 노인분들에 따르면, 비문이 훼손된 것은 이들(공덕비당사자)에 대한 무언의 항거로 당시 아이들의 대표적인 놀이였던 비석치기를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 만큼 이들 공덕비의 주인들이 당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는 말이다. 광양시의 무관심 속에 여전히 시민의 공경(?)을 받고 있는 친일파의 공덕비, 하루빨리 정확한 자료조사와 재해석을 통해 정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광양시는 귀 담아 들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유당공원 내 공덕비 가운데 존치여부 지적을 받고 있는 비는 다음과 같다. (시대 순) 토평사적비 이비는 기사년(1869년)에 발생한 광양변란을 토벌한 광양 현감 윤영신의 업적을 기념하는 비로, 광양변란은 폭정에 견디다 못한 광양출신 민회행을 중심으로 70여 명이 일으킨 난이다. 이들은 1869년 3월 23일(음력) 당시 광양읍성 동문으로 들어가 현감 윤영신을 체포하고 수령임명권과 군사지휘권을 탈취하였으나 백성을 살해하거나 재산을 탈취하지 말 것을 지시하고,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여, 사창의 곡식을 나눠 주었다. 그러나 이들의 세상은 몰래 도주한 현감 윤영신이 성을 빠져나와 당시 칠성면에서 창솔군 수 천 명을 모집, 반격에 나서 3일 후인 25일 광양성을 되찾으면서 3일 천하로 끝을 맺고 서울로 압송돼 모반대역죄로 능지처참 당했다. 이 같은 현감 윤영신의 변란 진압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 바로 이 토평사적비다. 유교적 사관 입장에서 보면 광양변란은 반역죄에 해당된다. 그러나 학정을 과감히 맞선 항쟁으로 받아들여 질 일이었다. 아무리 승자의 역사라 하더라도 정작 민초들을 괴롭힌 이 윤영신을 기리는 공덕비가 백성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치부하기에는 당시 민중들에게 너무 가혹한 일임에 틀림없다. 관찰사겸위무사이공도재애민선정비 약 300만명의 농민이 참여해 그 중 30만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진 갑오농민전쟁은 그동안 ‘동학란’으로 불려오다 지난 2004년 2월 ‘농민군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발발 110년만에 ‘동학농민혁명(갑오농민전쟁)’으로 재평가됐다. 현재까지도 동학을 비롯한 농민군의 성격과 활동에 관한 연구가 학계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비석의 비문을 곧이곧대로 풀이하면 관찰사로 내려온 이도재가 백성을 사랑하고 선정을 베풀었던 점을 기리는 비다. 그러나 전라관찰사 이도재는 1894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 그해 12월 동학대접주 김개남을 척살하고, ‘녹두장군’ 전봉준을 체포해 압송한 인물이다. 이 선정비를 보노라면,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재평가가 속속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갑오농민전쟁의 마지막 격전지였던 광양지역에서 만큼은 이들 농민군은 여전히 반란군 누명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이 유당공원은 영호도호소에 속해 광양 섬진나루 등지에서 마지막까지 활약한 수많은 동학군이 체포돼 척살당한 포살지다. 위 비문은 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하다. 관찰사이(공)근호청덕애민비 이근호는 1902년 전라남도 관찰사로 임명된 이로,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인 군부대신 이근택의 아우다. 일제는 한일합방을 발표하던 해 조선귀족령도 함께 공포, 75명에게 공후백자남의 순서로 작위와 훈장, 은사금을 수여했다. 이 당시 형 이근택은 자작, 애민비의 주인공인 동생 이근호는 남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행군수후예석휼민선정비 조예석은 일제식민지 시대에 판사를 지냈던 인물이다. 이 같은 일제조력 경력에 따라 지난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 명단에 포함되기도 했다. <최인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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