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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눈, 솔(松)의 눈을 보다

우안 최영식의 강원일보 창간 기념 전시회 관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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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7호 ⁄ 2007.07.23 14:10:58

미술을 좀 아는 체한 것이 화근이었다. 어느 술자리에서였던가, 글쟁이며 논객이라 공인된 이들과 어울려 늘 그렇듯 천하만사를 논하다가 불쑥 현대미술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공교롭게도 그 분야만큼은 모두가 문외한들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백짓장 하나 차이일 텐데, 내겐 몇 번의 전시회 관람 경험과 특별한 어떤 느낌을 즐겨 본 바 있다는 것이 조금 달랐던 것뿐이다. 그렇게 미술이라는 예술도 ‘자신의 감수성만큼 느끼면 되는 것’이라며 좀 아는 체를 했었던 것이 내가 우안 최영식 님의 전시회를 다녀와 관람기를 강요받게(?) 된 상황까지 내몰린 근원이다. 우안의 전시회는 명확한 테마가 있고 그 전시규모가 컸기 때문에, 그리고 이미 8년간의 작업과정에서 수많은 예술인들과 문인들로부터 주목받고 평가받아왔던 작품들로 구성된 전시회였던 터라, 추가적으로 작품에 대해 말한다는 것도 가당치 않고, 덜 다듬어진 시각과 느낌으로 새로운 무엇인가를 발견하여 전달할 수 있을 리도 만무하다는 생각이었다. 다만, 주어진 관람의 기회를 통해 좀 더 배우는 기회로 삼자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고, 물론 앞으로도 이런 기회는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다. <우안화첩> 시리즈를 전해주신 분의 수고를 통해서 이미 몇몇 작품들은 분위기나마 공유되었고, 그래서 더욱 관람기가 부담스러웠다. 7월 17일의 춘천나들이는 그래서 최영식 님께 내 정체를 밝히지 않고 여러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슬쩍 묻어갔다 오는 것처럼 꾸미려 하였다. 다녀와서 뭔가를 쓸 수 있다면 ‘사실은 그날 다녀간 게 접니다’ 하고 커밍아웃하는 쪽이 억지로 쓰는 것보다 나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뭔가 알리바이를 만들고자 사랑노래 하나 올리고 딴 짓 하고 있는 것처럼 꾸며 놓았던 것인데…. 그런데 춘천미술관에 도착해서 인사를 나눌 때 우안의 첫마디에 나의 얄팍한 계략은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았다. 그는 나의 정체를 이미 알고 계신 것이었다. 지난 일요일에 다녀가신 어떤 분이 정체를 알려드렸다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분이 언제부터 나의 정체를 알고 계셨는지, 그 분의 정체를 모르겠다는 점이다. 뉘신지요? 어쨌든, 기왕에 그리 되었으니 더 열심히 그림을 들여다보는 수밖에. 입석으로 열차를 타고 두 시간을 달려 온 피곤함은 따님으로부터 대접받은 솔잎차 한 잔에 온통 소나무로 둘러쌓인 숲속에서 피톤치드향을 마시는 듯한 느낌과 함께 싹 가셔 버렸다. 그림 속 소나무들이 뿜어내는 향을 연출하는 차 한 잔을 소품으로 대동하고 뚜벅 뚜벅 전시로를 따라 걷다 보면 전시장은 그대로 솔밭이 되고 숲이 되는 것이다. 이번 전시회의 제목은 <소의 눈, 솔의 눈을 보다>인데, 그 제목부터가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그림을 다 둘러 봤는데, 소의 눈에 보인다는 솔의 눈이 내겐 안보이면 제대로 못 본 게 되지나 않을까, 은근히 겁나는 제목 아닌가. 하지만 ‘소의 눈, 우안(牛眼)’이 그의 호임을 알고 나면, 솔의 눈이라는 은유를 그림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듯하다. 그림을 그리는 우안의 시선은 소나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며, 동시에 소나무가 자신의 은밀하거나 잘 드러내지 않던 부분들까지도 섬세하게 드러내는 솔직한 시선이다. 문인화에서처럼 대체로 단순하게 처리되어 글에 종속되는 소나무도 아니요, 극사실주의적인 카피로 완벽하게 재현되는 소나무도 아닌, 우안만의 시선이 머무는 지점에 서 있는 소나무를 만날 수 있게 된다. 때로는 산하를 굽어보는 노송의 우람한 형상이나, 가끔은 상처 입은 등걸이며 썩은 가지까지 솔직하게 드러내는 모습, 그리고 철따라 주변의 피조물들과 어울리는 아기자기하고 평화로운 풍경에 이르기까지, 감상자들도 우안의 그림을 따라가다 보면 우직하고 충직한 소의 큰 눈망울을 닮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작품은 작가를 닮는다 작품들은 8년의 시간을 거쳐 수습되고 가다듬어지고 마침내 한 매듭을 이룬 우안의 시선과 영감을 감상자들에게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산수화라는 것을 절제와 여백의 미로 감상해야 한다고 학습해 왔는데, 우안의 그림에서는 구도도 여백도 괘념치 않는 자유로운 시선을 발견하게 된다.

우안의 소나무는 전신을 우람하게 드러내기도 하지만, 굵은 등걸로만 다가서기도 한다. 어떤 화면에서는 솔잎의 날선 뻗침만을 바라보기도 하며, 어떤 화면에서는 바람을 따라 뻗어나가는 가지들의 굴곡만을 주시하기도 한다. 마치 대자연이라는 커다란 그림에서 눈에 띄는 어떤 부분만을 도려낸 듯한 자유분방한 시선이다. 한국화에서 오히려 작가의 심미안에 따라 대상이 실체와 다르게 표현되는 인상주의적 화면구성이 더 친근하다고는 하지만, 우안의 소나무들은 실체를 중시하면서도 작가의 느낌을 강렬하게 담아내는 굵은 시선에서 비롯되고 있다. 우안의 소나무는 우리가 예상하는 어떤 한 그루의 실체가 아니라, 화면마다 담고 있는 소나무의, 또는 소나무를 향한 시선의 특별함과 함께 그 주위를 감도는 대자연과의 대화로 표현되고 있다. ■역시 봄은 사람을 설레게 한다 우안의 작품들에서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소나무 주위를 맴도는 새들이다. 새들은 교묘하게 그림의 주인공인 소나무를 호위하며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을 감상자에게 지각하게끔 만든다. 새들은 넓다란 여백 속에서 도드라지게 튀어나오는 법이 없으며, 하필이면 가지 사이나 굵은 등걸 틈에서 뜬금없이 제멋대로 유영한다. 그러면서도 바람을 거스르듯 화면을 흐리지도 않으며, 계절에 맞서 곤두박질치거나 훌쩍 그 곁을 떠나 버리지도 않는다. 이 보일 듯 말듯 소나무 주위를 맴도는 새들은 우안의 그림을 정적인 산수화로 느껴지지 않도록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 만약 우리가 어느 날 뒷동산에서 듬직하게 굵어가는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났을 때의 경외감과 생동감을 그림에 담는다면, 그 찰나의 느낌은 그림이 되는 순간 정지화면이 되어버리는 운명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안의 그림은 신비하게도 그 찰나를 ‘동적인 정지화면’으로 재생해 낸다. 새들은 이러한 묘한 역동성의 에너지원이다. 그리고 우안에게 여백이란, 구도 상에서 절제되고 생략된 무엇이 아니라, 거기에 새들이 날고 우리가 살아 숨 쉬는 거대한 시공간의 존재를 그려 넣은 자리로 봐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어느 여백도 온전히 비어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다. 이 점이 우안의 시선이 그림으로 재창조되는 과정의 특별함이라 여겨진다. 관람이 끝나고 나서, 이번 전시작품들이 담긴 두툼한 화첩을 작가로부터 친필사인과 함께 선물 받았다. 화첩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의 테마로 작품들을 모아 싣고 있었다. 관람 중 느낀 건데, 필자는 개인적으로는 겨울의 풍광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겨울에 태어나서일까, 아니면 하얀 눈이 더 이상 여백과 그림을 구분 짓지 않는 겨울 풍경화를 더욱 푸짐한 느낌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까. 어쩌면 한 번 다녀와 본 산막골의 물과 숲이 어우러진 구체적인 겨울풍광을 아득히 상상하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층 전시장을 돌아 나올 때 다시 한 번 맞은 편 벽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절벽 위의 저 소나무’는 그림이 감상자를 빨아들이는 힘이 무엇인지를 스스로의 느낌으로부터 배우게 만들었다. 저마다 다른 시각이 존재할 수 있지만, ‘절벽 위의 저 소나무’는 감상자의 시선을 흐리게 했다가도 다시 집중시키며 그림 전체를 꼼꼼히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바로 그런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륙 한복판에 호수를 아우르고 물길이 굽이쳐 돌아드는 도시 춘천은 언제 찾아도 평화롭고 아늑한 금수강산의 정취를 안겨준다. 이 도시의 아름다움과 여유로움, 그리고 우람함에 참으로 잘 어울리는 우안의 그림들을 감상할 수 있었던 행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겨질 것이다. 이 글은 평범한 감상자의 서투른 심미안에서 나온 글이지만, 평론이 아닌 ‘관람기’로써 소의 눈의 넉넉함으로 보듬어 주시리라 믿는다. 한 가지 더 핑계를 드리자면, 화첩에 실린 여러 전문가들의 평이나 추천사를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 전문가의 평을 읽고 선입견을 갖게 되는 것도 피하고 싶었고, 평범한 감상자의 관람기로서 충실하고 싶었기 때문임을 양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이번 전시는 분당에서 한 번 더 열릴 예정이었는데, 춘천까지 발걸음하지 못한 분들에게는 안타깝게도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전시회가 너무 큰 성황을 이뤄서다. 감상자들이 매입해간 작품들이 너무 많아 전시회를 재구성할 작품이 부족한 것이다. 이는 물론 기쁜 일이지만, 한 가지 더 희망적인 사항을 상기시키자면, 이번 전시회의 테마는 ‘소나무’였다는 점이다. 우안은 소나무만 그리는 전문작가는 아니라는 것! 우리에겐 다행히도 우안의 폭넓은 작품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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