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평(平)이라는 것을 쓰기 위해 책을 읽는 것만큼 따분한 일은 없다. 비평이라는 것은 흔히 그 책이 가지고 있는 ‘상상’과 ‘언어적 유희’ 혹은 ‘미학적 상상력’을 논리의 거울로 들여다봐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책이 감성의 발현이 아닌 이성의 구현일 때, 그리고 진실을 노래하는 내용이 아닌 진리를 외치는 내용일 경우 책을 읽는다는 것은 즐거움의 대상이 아닌, 직업적 괴로움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다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책, <니벨룽의 반지(바그너 원작/류가미 지음/호미 펴냄)>는 어떤 책일까. 책의 표지를 보자마자 나는 이 책이 어릴 적 읽었던 동화 <니벨룽겐의 노래>를 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지크프리트’와 ‘브륀힐데’라는 잊혀지지 않는 이름들이 서로 사랑하고 증오하며 복수하는 내용의 그것 말이다. ■잊혀진 것이라 믿었지만,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신화(전설)’가 없는 나라 혹은 민족은 없다. 우리에게 단군이 있고, 일본에게 아미테라스가 있듯이, 이제는 늙어버린 땅 ‘유럽’에도 신화는 존재한다. 물론 우리네와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존재한다. 단군의 이야기에는 단군 자신의 사랑과 고난이 없다. 일본의 아미테라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사랑과 고난이라는 것은 실상 서구의 신화(전설)에 단골 출연한다. 그것은 아마도 서구인들이 우리보다 더 인간적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서구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환경 자체가 우리보다 덜 ‘공동체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서구인들에게 있어 민족이나 국가라는 개념은 비교적 최근에야 각광받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서구인들에게는 그들이 중세까지 고수했던 ‘도시들 간의 느슨한 연합’의 세월이 하나의 역사로 정당히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솔직히 영국인들이 자랑하는 ‘아더왕 이야기’나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있는 ‘롤랑의 노래’ 그리고 독일인들의 건국신화나 마찬가지인 ‘니벨룽의 반지’ 등은 모두 그들의 영토 전부나 대부분이 아닌, 일부의 범주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신화 혹은 전설은 지금의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서구인들에게는 ‘국가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웅’이라는 존재에 대한 그들의 끊임없는 갈구 역시 마찬가지다. 서구에 비해 민족공동체 의식이 더 높았던 우리네들에게는 한 명의 영웅의 힘보다는 다수의 공동체 구성원의 합일 의식이 더 중요했을런지 모르지만, 적어도 유럽의 초창기 거주민들에게 있어서 ‘민족’이라는 개념은 애시당초 ‘뜬 구름 잡는’ 얘기였다. 그들이 살았던 당대의 유럽은 지방의 주요 도시를 점유한 유력자들의 느슨한 연합체가 ‘국가’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물론 로마제국이라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가 이미 명멸했지만, 그 역시 자치주와 속주, 그리고 직할령의 연합체에 불과했다. 한 마디로 “산은 높고 황제는 멀리 있었다.” ■지크프리트, 그 매혹적인 할리우드 영화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어떤 것이 될까. 영화전문가는 아니지만, 특히 미국의 영화 혹은 미디어는 끊임없이 ‘영웅’을 찾는다. 그 대상은 무궁무진하다. 거리의 갱단을 홀로 청소하는 경찰에서부터, 침략전쟁을 일으키고도 ‘테러와의 전쟁’이라 우기는 대통령까지 미국인들이 환호하는 영웅은 ‘널렸다.’ 거기에 반해 유럽의 영웅은 어떠할까. 유럽인들은 미국인에 비해 호들갑을 덜 떤다. 미국인의 기준으로 본다면 유럽에도 영웅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쉽사리 환호하지 않는다. 적어도 유럽인의 영웅과 미국인의 영웅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 차이란 바로, ‘역사에 대한 영향’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생활 속의 작은 영웅들은 자신과 주변 몇몇의 개인사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의 주인공 지크프리트와 같은 영웅은 한 민족 혹은 한 국가의 역사 형성에 심오한 영향을 미친다. 그게 유럽 식 영웅이다. <니벨룽의 반지>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의 최후는 하나 같이 불우하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그들은 서로 경쟁하고 반목하며 증오한다. 그리고 음모와 계략 역시 판을 친다. 알베리히도, 지크프리트도, 하겐도, 브륀힐데도 어느 누구 하나 ‘행복한 최후’를 맞이한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 <니벨룽의 반지>는 독일의 어두운 앞날을 예고한 작품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하긴 이 책의 원작자인 바그너가 죽은 지 얼마 안 있어, 독일은 ‘제 3제국’이 되었고, ‘천재적 미치광이’ 아돌프 히틀러의 출현을 바라봐야만 했다. 더구나 히틀러는 바그너 음악의 열렬한 매니아였다. 그가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바그너의 음악은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에 의해 히틀러와 나치즘의 공식 비공식 음악으로 선전되었다. 그리고 히틀러와 제 3제국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바그너의 음악이 음악사에 어떠한 의미를 던지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인류사에 돌이킬 수 없는 해악을 남긴 제 3제국을 떠올릴 때마다 바그너의 음악이 그 배경음으로 깔린다는 것은 바그너 자신에게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니벨룽의 반지>와 <반지의 제왕> 오늘 날 가진 거라고는 옛 제국에 대한 향수뿐인 연합왕국 영국인들은 말한다. “독일인에게 <니벨룽의 반지>가 있다면, 영국인에게는 <반지의 제왕>이 있다”고. 하긴 <반지의 제왕>이 2차 세계대전 와중에 영국인 톨킨이 쓴 작품이긴 하다. 그리고 그 집필 의도 역시 <니벨룽의 반지>와 비슷하다. 독일의 그것이 독일 내의 여러 세력들을 규합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반지의 제왕>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내에 혼재되어 있는 컬트족과 게르만족을 한데로 묶어줄 새로운 신화가 필요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물론 톨킨이 애당초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썼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두 작품(니벨룽의 반지 vs 반지의 제왕)은 비슷한 전개과정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서로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즉, <니벨룽의 반지>에서는 여러 세력들이 연합해 반지를 서로 ‘차지하려고’ 투쟁하지만, <반지의 제왕>에서는 반대로 여러 종족이 연합해 그 반지를 ‘버리려’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작가 자신의 세계관의 충돌일지도 모른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절대권력에 대한 갈구를 보이는 바그너와,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는 사람들을 찬양하는 톨킨. 한 세월이 저물어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질서의 해체와 재구성’은 현재의 한국 사회가 넘고 있는 고갯길이기도 하다. 피투성이 영웅 지크프리트와 늘상 소외되고 멸시당하는 작은 사람들 호비트, 이들은 너무나 다르지만, 그러나 너무나 닮은 존재들이다. 그것은 지크프리트와 호비트 두 존재 모두, ‘세상을 바꾸려’ 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과정과 방법은 다를지 몰라도, 결국 그들이 가려는 곳은 ‘보다 나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바그너의 대본을 놓고 이 이야기를 새롭게 지어낸 류가미 씨는 한 인터넷 매체에 ‘류가미의 환상여행’이라는 말 그대로 ‘환상적인’ 진술을 시리즈로 엮어주고 있다. 동과 서, 그리고 옛날과 현재를 넘나드는 그 진술 시리즈는 문화라는 것에 대한 이해를 도울 뿐 아니라, 인류의 문명사를 바라보는 좋은 교재이기도 하다. 한 번씩들 읽어보시길 권한다. <유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