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호 박성훈⁄ 2008.08.26 15:33:35
“성폭력 피해아동의 어머니는 경찰과 약속한 시간에 맞춰 나갔으나 담당 경찰을 만날 수 없었고, 이후 조사를 받을 때에도 몇 시간씩 기다려야 했다. 비디오 녹화심문 등 피해아동에 대한 배려가 없이 여러 사람이 오가는 검사실에서 수사를 하고, 피해아동과 가해자의 대질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수사 도중, 피해아동의 어머니가 아동을 달래려고 하면 ‘퇴실조치하겠다’고 위협하는가 하면, ‘상황을 그대로 재연해봐라’, ‘옷을 벗어봐라’, ‘가해자의 음부를 그려라’는 등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질문을 했다.” “피해아동은 경찰 수사과정에서 경찰 입회하에 피해 사실에 대한 비디오 녹화를 했는데, 경찰의 조작실수로 비디오가 삭제되어 피해아동은 다시 성폭력상담소 소장과 상담하며 비디오 녹화를 해야 했다. 그러나 경찰은 상담을 한 소장이 무자격자라는 이유로 재녹화할 것을 요구해, 부산에서 서울까지 이동해서 세 번째 비디오 녹화를 했다. 수사는 계속 지체됐고, 현장조사도 소홀히 이루어졌다.” “피해아동은 성추행을 당하고 바로 주변에서 방범순찰 중이던 의경에게 신고했는데, 수사는 지연되고 소극적인 수사만 무성의하고 체계 없이 이루어져, 그 과정에서 2차 피해를 입었다.” 이는 아동 성폭력 2차 피해와 관련된 소송을 맡아 온 조인섭 변호사가 소송에서 피해아동 부모의 진술을 바탕으로 실제 사건을 재구성한 내용이다. 13세 미만의 아동 대상 성범죄가 2002년 600건에서 2007년 1,081건으로 증가하는 등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가 늘고 있는 가운데, ‘성폭력 피해자’와 ‘아동·청소년’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한 수사와 재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성폭력 과정에서 정신적 상처를 입은 아이들이 검찰 및 경찰의 수사와 재판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모욕을 당해 2차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성폭력의 2차 피해는 성폭력 사건이 일어난 후 관련 사법기관이나 가족·친구·언론·여론으로부터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심리 공격으로 피해자가 다시 정신적·사회적 피해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성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는 과정에 있고 방어능력이 취약한 아동·청소년의 경우에는 2차 피해에 더욱 쉽게 노출되어, 그 후유증 역시 더 크다고 할 것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수사과정에서 일어나는 2차 피해의 원인을 △성폭력의 사적 문제화 △피해자의 성적 충동 유발론 △동의된 성관계론 △가해자 옹호론 △심문과정의 부적절한 질문 등을 꼽았다. ■ 성폭력 수사지침 ‘있으나 마나’ 수사과정에서 발생하는 2차 피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경찰은 범죄피해자 보호규칙(2004. 8. 17. 경찰청 훈령 제428호), 인권보호를 위한 경찰관 직무규칙(경찰청 훈령 제481호), 범죄수사규칙(2006. 12. 26. 경찰청 훈령 제498호) 등을 통해 성폭력 피해자 보호 매뉴얼을 만들고,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각종 위원회 등을 마련하고 있다. 검찰도 성범죄수사 및 공판관여시 피해자 보호에 관한 지침(1999. 2. 23. 대검예규 제290호), 인권보호수사준칙(2002. 12. 17. 법무부 훈령 제474호) 등을 통해 피해자 보호 및 지원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제도에도 불구하고, 수사 현장에서는 규정에 대한 숙지 및 이해 부족으로 2차 피해의 여지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법정지원팀의 이경환 군 법무관은 “제도상의 변화에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교육 및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하고, 피해자 보호규범들이 실질적인 규범력을 갖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성폭행 또 당하지 말란 보장 없어” 조인섭 변호사는 “성범죄의 특성상 수사과정에서 피해자에게 불필요한 질문을 함으로써 2차 피해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성폭력 수사에서 수치심을 유발하는 질문이 근절되지 않는데 대해 “성범죄의 특성상 ‘수사과정에서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저급한 질문을 정당화한 것은 아이러니하다”고 비판했다. 수사과정에서 감수해야 할 2차 피해로 가장 큰 타격을 입는 쪽은 피해자와 그의 가족들이다. 수사과정의 2차 피해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했다는 피해아동 부모 곽모 씨는 “우리 아이는 이미 성폭행을 당했지만, 또다시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이 국가와 법마저 보호를 해주지 않는 현실과 부딪치면서,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 없어 피해자 부모들이 힘을 합쳐 모임을 결성하여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곽 씨는 아동 심리와 성폭력 사건의 심리 전문가에게 수사를 맡겨 전문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비디오 진술 녹화에서는 아이가 의지할 수 있는 신뢰관계인이 동석한 가운데 녹화 진술을 진행할 것을 요청했다. 아울러, 피해자를 배려한 변호사 선임 제도와 치료비·생계비·소송비 등 경제적 어려움의 해결을 위한 지원제도, 성폭력 사건 전담기관의 설립 등 국가 차원의 제도적 지원을 촉구하기도 했다. 피해아동 부모 이모 씨는 딸을 위해 피해지역을 벗어나 전학시키려 해도 교육청에서부터 거부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해 비밀을 보장하고 맘 편하게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학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했다. ■ 2차 피해 방지 국가의무 명확히 해야 이호중 서강대 법학과 교수도 피해자를 보호하면서 수사를 진행하려면 신뢰관계인 동석 제도, 피해자 변호인의 신문참여권, 비디오 중계장치에 의한 증인신문, 심리비공개 제도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는 “성폭력특별법상의 신뢰관계인 동석 제도가 동법 제5조 내지 제9조와 제11조 및 제12조(제10조의 미수범을 제외한다)의 범죄 피해자에게만 적용된다는 점은 개선이 필요한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신형사소송법에서는 신뢰관계인 동석 제도를 모든 범죄 피해자로 확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허용요건은 “증인의 연령, 심신의 상태, 그 밖의 사정을 고려하여 증인이 현저하게 불안 또는 긴장을 느낄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때”라고 명시해 ‘보호필요성’을 요건으로 하고 있고, 이에 대한 판단을 법원과 수사기관의 재량에 둔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 교수는 비디오 중계장치에 의한 증인신문 제도에 대해 “피해자가 공판정에서 증인으로 신문받는 경우 피고인과 직접 대면함으로써 피해자가 입게 될 추가적인 고통과 피해를 방지하는데 목적이 있다”며 “2차 피해의 문제가 가장 심각한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에는 피해자의 신청이 있는 경우 비디오 중계 방식에 의한 신문을 원칙적인 증인심문 방식으로 이용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그는 피해자의 사생활과 인격권의 보호를 위한 ‘심리비공개와 피해자의 신청권’과 함께 피해자도 피의자처럼 법률전문가의 조력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피해자 측 변호사의 참석권’ 등을 아울러 주장했다. 이호중 교수는 특히 국가의 2차 피해방지 의무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피해자 보호의무를 명확히 하는 토대 위에서,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법적 장치들은 피해자가 피해극복과 형사사법의 실천을 위하여 주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법적 자원을 피해자에게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성폭력 피해자는 형사사법의 과정에서 보호받아야 할 존재만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극복하면서 형사사법의 실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체적 존재로서 승인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