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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소‘韓牛’

예부터 세계 최우량소…일제의 ‘한우말살’정책으로 황소만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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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83,84호 박성훈⁄ 2008.09.10 09:42:55

불후의 명작 <대지>를 지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펄 벅 여사는 생전에 뜨거운 한국사랑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이다. 그의 한국사랑이 움튼 배경은 이러하다. 1960년 초겨울, 펄 벅 여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경상도 경주에서 소를 끌고 가는 한 농부를 보았다. 그런데 무거운 쟁기를 지게에 짊어진 농부는 소에게 빈 달구지를 끌고 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 무거운 쟁기를 빈 소달구지에 싣지 않고 스스로 짊어진 농부의 모습이 펄 벅 여사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소가 힘들어할까봐 무거운 짐을 스스로 감당하는 저 농부의 어진 마음!” 비록 가축이지만 소를 내 식구처럼 배려하는 한국인의 온정은 그에게 이색적인 영감을 불어넣었다. 이 일화는 3년 후 그녀가 쓴 베스트셀러 <살아 있는 갈대>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펄 벅 여사의 감탄처럼 ‘소’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에게 동물 이상의 특별한 존재이다. 예전에는 소를 생구(生口)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사전적인 의미로 식구는 가족을, 생구는 하인이나 종을 지칭한다. 즉, 소의 의미를 가축 이상의 인격체로까지 격상시켰음을 엿볼 수 있다. 농경사회인 우리 전통사회에서 소는 농사에 없어서는 안 될 일꾼이자, 재산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소는 밭을 갈거나 논을 고르는 농사일뿐 아니라 짐을 나르는 일에도 쓰여 여러 모로 요긴한 가축이었다. 죽고 나서는 고기와 가죽까지 남겨주니 사람에게 이만큼 고마운 동물이 없을 것이다. 소를 인격시한 측면은 민담으로도 전한다. 정월의 첫 축일(丑日)은 ‘소의 날’로 정해, 소에게 일체의 노동을 시키지 않고 쇠죽에 콩이나 밥과 나물을 잘 먹여 쉬게 했다고 한다. 이날에는 소가 연장을 지는 일도 금했다. 이게 다 소를 한집안의 가족처럼 여긴 풍습들이다. 역사적으로 소가 어떤 존재였는지는 사료(史料)에서도 잘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소의 도축을 엄금했고, 소 절도범에 대해서는 형벌을 엄하게 적용했다고 전한다. 세종 29년(1447) 5월에 개정된 형법에는 초범에게 곤장 100대에다 오른팔 아랫마디에 ‘도살우(盜殺牛)’라고 새겨 가족과 함께 먼 섬으로 귀양 보냈다. 게다가 재범은 주범이나 종범을 막론하고 교형(絞刑)에 처해 소 절도의 경각심을 환기하고 있다. 성종 때 부제학 이극기가 “성안 대소인(大小人)의 집에서 아침저녁의 봉양이나 연향(宴享) 때 대개 금지한 쇠고기를 쓰고, 관가(官家)에서 공급하는 것도 간혹 쓰는데, 이러한 고기들이 어찌 모두 저절로 죽은 것이겠습니까”라고 금법(禁法) 엄수를 요구한 것은 밀도살이 끊이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조선 후기 양반들이 기생들과 계곡에서 몰래 화롯불에 쇠고기를 구워 먹는 모습을 담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한국화 ‘야연(野宴)’은 소의 무단도살을 엄금했던 사회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순조 때 편찬한 <만기요람(萬機要覽)> 상평청(常平廳)조에 소를 도살한 값(宰殺牛價)을 쌀 250석으로 적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쇠고기는 웬만한 부자가 아니고선 구경조차 힘든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칡소·흙우·황소·백우·청우 등 오색빛깔 한우 한우는 원래 품종도 다양하다. 사람들은 대개 ‘한우’를 떠올리면 황소 이 외에는 다른 이미지를 생각해 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황소 말고도 여러 종류의 토종 한국 소가 있었다. 농업진흥청 가축유전자원시험장의 조창연 박사는 “조선시대에 발간된 서적을 보면 소의 종류가 7가지 정도 발견되는데, 칡소·백우·흑우 등 여러 가지가 확인되고 있다. 1912년대에 조사한 경상도 지역 한우 분포현황을 보면, 당시 황소는 80%가 안 되고, 흑갈색소·흑우·칡소와 갈색백반우(흰 반점이 있는 소)·흑색백반우 등의 소들이 분포돼 있다”고 설명했다. 조 박사는 “우리나라 한우의 모계는 25종 이상으로 분류되며, 칡소의 모계는 12종, 흑우는 9종, 제주흑우는 5종 이상이 확인되었다”면서 “특히 제주흑우는 내륙에 있는 한우·흑우·칡소에서 볼 수 없는 모계도 2종 존재한다”고 덧붙였다. 먼저, 얼룩덜룩한 무늬가 특징인 칡소를 꼽을 수 있다. 예전에는 칡소를 ‘얼룩소’ 혹은 ‘호랑이소’라고 불렀다고 한다. 진갈색의 바탕에 검정색 줄무늬가 온몸에 그어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언뜻 보면 칡넝쿨이 온몸을 휘감고 있는 형상이어서 칡소라고 불리웠다. 황소보다 약간 긴 털을 가지고 있다. 동요 ‘얼룩송아지’에 등장하는 ‘얼룩소’와 ‘얼룩송아지’를 많은 사람들이 젖소로 오해하고 있으나, 이 소도 칡소이다. 이 동요는 박목월 시인이 지은 시에 음조를 붙인 곡으로 1930년대에 창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젖소는 1902년에 프랑스인 쇼트가 처음 들여왔으나, 1970년 이전까지는 보급이 안 돼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고 한다. 따라서, 훨씬 이전에 창작된 동요에 등장하는 얼룩송아지가 젖소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다. 정지용 시인의 시 ‘향수’에도 칡소가 나온다.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울던 ‘얼룩배기 황소’가 칡소다. 황소 그림을 즐겨 그리던 화가 이중섭도 칡소를 소재로 여러 작품을 남겼다. 조선 초기인 1399년에 발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수의학서 <조선우마의방(朝鮮牛馬醫方)>에도 칡소가 토종 소로 나온다. 이 책에서는 “이 소의 이마가 황색이면 기르는 주인에게 기쁨과 경사가 많이 생긴다”고 덧붙이고 있다. 칡소는 육질이 부드럽고 맛이 뛰어나 조선시대 임금의 수라상에 오르기도 했다고 전한다. 또한, ‘꺼멍소’ 혹은 ‘검정소’라고 불린 흑소는 몸 전체가 숯덩이처럼 시커멓다. 황소보다 지방층이 약간 더 두꺼워 육질이 더 부드럽다고 한다. 칡소와 흑소가 토종 한우라는 사실은 고대 유적에서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357년에 만들어진 안악 3호분 고분 벽화에는 세 종류의 소가 마구간에서 먹이를 먹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것이 칡소와 흑소·황소이다. 여기에 덧붙여 백우와 청우도 있다. 백우는 숫자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얀 소가 태어나면 길조라 하여 매우 좋아하고 신성시했다고 전한다. 청우(푸렁소) 혹은 청치라고 불리는 소도 있으나 단지 이름이 청우였을 뿐, 푸른 빛은 아닐 수도 있다고 한다. ■ 일제의 한우 종자 찬탈로 황소만 남아 여러 종류의 한우가 지금의 황색으로 통일된 시기는 일제 강점기이다. 1938년도에 제정된 심사표준에서 “한우의 모색을 적색으로 한다”고 규정하여 황소를 제외한 한우는 우리 땅에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1920년대에 일본은 일본소 화우(和牛, 한국의 흑소와는 다르다)를 개량하기 위해 일본으로 칡소를 대량 반출했다. 또, 조선소 등록사업을 실시하면서 흑소는 일본소, 황소는 조선소(한우)라고 규정했다. 당시 일본은 농사를 지을 때 말을 사용했는데, 구한말 중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수행하면서 대량의 군용마가 필요했다. 그러던 중 한우가 일소로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을 발견한 것이다. 조창연 박사는 “일본은 우리 소가 거친 사료에 강하고 환경적응 능력이 뛰어난 점과 힘이 좋아 일소로서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해 수탈 대상 품목으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1930년대 초기에 불거진 일본 대공황의 타결책으로 유축농업이 권장됐던 점도 한몫했다. 일본은 자국 소의 고유 품종을 성립시키는 과정 중에 있어 유전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한우 반출을 합법화하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 기록만으로도 일제 36년간 150만 두 이상이 일본·중국·러시아 등지로 반출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종자 찬탈의 결과, 황소 이외의 조선소는 자취를 감추게 되어 ‘한우는 곧 황소’라는 개념이 굳어졌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에서 ‘한우개량사업’이 추진됐고, 이 과정에서 황소를 제외한 칡소·흑소 등 다른 품종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농업진흥청은 8월 14일 국내 희소가치가 높은 가축에 대한 발굴 보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일제 강점기에 사라져간 재래 한우를 발굴하여 증식 보존한다고 밝혔다. 농촌진흥청 가축유전자원시험장에서는 현재 남아 있는 재래 한우인 흑소와 칡소를 먼저 복원하고 있다. 조창연 교수는 “현재 전국적으로 제주도를 제외하고 흑우가 200마리, 칡소가 100마리 정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수정란 이식기술 등 첨단 생명공학 기법을 이용해 전통한우가 복원될 수 있도록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 한우, 이미 조선시대부터 국제적 경쟁력 입증 지난 4월 이후 한미 쇠고기 수입협상이 몰고 온 광우병 광풍으로 전국이 공포에 휩싸이는 등 홍역을 거치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재개됐다. 이에 가장 큰 위기의식을 갖고 있는 계층은 한우 축산농가가 아닐까 한다. 한우가 미국산 쇠고기보다 안전하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입증하지 못하면 한우는 망한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다. 헐값의 미국산 쇠고기가 대량으로 우리 축산시장에 쏟아져 들어올 경우, 축산농가의 줄도산은 물론, 국민 식탁에도 위협이 닥쳐올 것이라는 우려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리 한우는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품질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조선경제사 전문가인 전성호 프랑크푸르트대학 객원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이미 한우는 국제시장에서 그 경쟁력을 입증받은 바 있다. 조선 시대엔 건국 초기부터 함경도 명천·길주 등지에 국제 우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전성호 교수는 “이곳에는 중국과 러시아 상인들이 소를 가지고 와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 한우가 가장 우수한 품질을 지녀 높은 값에 팔리곤 했다”고 설명했다. 한우가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품질을 갖는 이유로는 사계가 뚜렷한 우리나라의 기후와 산이 많은 지형조건을 들고 있다. 전성호 교수는 “사계절이 뚜렷한 조선에서 양육된 소는 겨울에 산악지대에서 대륙의 한랭한 기온 때문에 가죽이 조밀하게 오그라들고, 여름에는 아열대의 무더운 해양기후 영향을 받아 가죽이 최대한 팽창해 탄력성이 확보되기 때문에, 한국 기후가 체질화된 한우는 세계적인 품질을 지녔다”고 설명했다. ■ 고품질 기반으로 ‘한우 글로벌 시대’ 만들자 하지만, 한우는 불합리한 다단계 유통 구조 때문에 비싼데다 소비자가격이 수입산을 한우로 둔갑시키는 일부 음식점·정육점 등 한우 판매점의 ‘양심불량’때문에 이미지가 좋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농수산물유통공사의 ‘2007년 주요 농산물 유통실태 조사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42개 대표 농축산물의 다양한 유통경로를 추적하여 가격형성 과정을 분석한 결과, 유통비용이 55.9%에 달했다고 한다. 농수산물 가격의 절반 이상이 유통비용으로 허비된다는 뜻이다. 특히, 소나 돼지와 같은 축산물 부문에서 농가로 돌아가는 비용은 소비자 가격의 40.7%여서 전체적으로 가장 낮았다. 또한, 잇따라 적발되는 수입 쇠고기 한우 둔갑 사례는 수요가 일정한 한우 값을 떨어뜨리는 이유로 지목되기도 한다. 축산농가는 “수입 쇠고기가 한우로 팔리면서 시장가격을 교란하고 실수요를 잠식하는 요인이 크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8월 26일 가축시장에서 거래된 한우 가격은 한마리에 338만 원(큰 수소, 600㎏)으로 지난주보다 1.7% 떨어졌다. 왜곡된 유통구조와 상인들의 양심불량이 한우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우수성을 충분히 인정받고 있는 한우는 이제 더 이상 ‘우물 안 개구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결국, 한우의 생존을 위해서는 생육환경과 위생조건을 개선하고 품종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 국제사회에서 검증을 받는 일이 필요하다. 농림식품수산부는 올해를 ‘한식 글로벌화의 원년’으로 삼고 다양한 한식 세계화 전략을 준비하고 있다. 4월 초에는 ‘한식의 세계 5대 음식화 전략’의 하나로 ‘한식 세계화 포럼’을 구성했다. 9월에는 한식의 글로벌화를 위한 ‘글로벌 푸드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이 같은 한식 세계화 전략의 중심에 한우를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 정부는 광우병 괴담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한우의 안전성과 품질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는 호기로 활용하도록 지원하면 된다. 전성호 교수는 “우리 농산품이 미국시장 공략의 주된 품목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국내 한우 산업을 세계 최고의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육성하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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