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살 난 아들을 둔 박모 씨는 아이가 다니는 놀이학습학원 원장으로부터 “아들의 영재성을 검사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아이가 4살 때 한글을 익히더니 지금은 두 자리 덧셈과 뺄셈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의 수리·언어능력이 뛰어난 것이다. 또 다른 수학 영재 오모 양은 수학책을 동화책 읽듯 쉽게 읽어 내려가고. 새로운 수학공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처음에는 오 양의 행동이 느리고 말이 어눌해 다른 아이들보다 오히려 모자란 듯이 보였지만, 그를 영재교육원에 보낸 후로 영재성이 발현됐다. 영재아 판별만 15만 원. 영재교육을 받으려면 매달 50만~60만원 정도가 소요된다. 하지만 아이를 영재로 키우고 싶은 학부모의 열망은 뜨겁기만 하다. ■ 5共, 영재육성 프로젝트 가동… MB “100명 중 한 명은 영재로 키운다” 5공화국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하던 1985년에는 영재 발굴과 육성을 위한 비밀 프로젝트가 극비리에 청와대 주도로 진행됐다. 전국에 수소문해 신동 144명을 선발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영재 육성계획은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이로 인해 5살의 어린 나이에 5개국어를 구사했던 천재와 태어난 지 20개월 만에 초등학교 국어실력을 갖춘 영재들은 현재 범재(凡才)로 살고 있다는 사실은 듣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20년이 지난 최근에는 몇 년 새 영재교육 열풍이 불고 있다. 전국적으로 영재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은 줄잡아 3만7000여 명으로, 전체 학생 72만여 명의 0.51% 정도다. 이명박 대통령은 9월 20일 청와대에서 국제과학올림피아드 입상자들과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영재교육 대상을 초·중·고 전체 학생의 1%까지 늘리겠다”며 지원을 확대할 뜻을 밝혔다. 이 대통령은 “과학영재를 발굴해 체계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27일 ‘영재교육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교육과학기술부도 “과학영재고를 올해 말까지 1~2곳 더 지정하고, 과학고 내실화 방안도 마련하겠다”고 밝혀 이 같은 방침을 뒷받침했다. 교과부는 또, 전국의 과학고와 시도 교육청을 대상으로 영재학교 전환 신청을 받았다. 신청서를 낸 학교는 경기과학고·경남과학고·경북과학고·광주과학고·대구과학고·대전과학고·전남과학고 등 7개 학교이다. 서울시 교육청에서는 ‘영재 교수학습 표준화 자료 개발팀’을 구성하고 7월까지 자료개발을 마친 뒤 2학기부터 일선 학교에 보급할 계획도 나와 있다. 영재 교수학습 표준화 자료는 학년별 과목별로 책자 형태로 만든 것인데, 그 동안 영재교육 자료가 없어 임의대로 교육해 온 영재교육 담당 교사들에게는 일종의 교과서로 활용된다는 기대감을 표시하고 있다. 교육당국은 영재교육을 늘려 2010년까지 5%로 영재교육을 확대한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 학부모 “영재는 만들어진다” 유·초등생 자녀를 둔 학부모 사이에서 한동안 잠잠했던 영재교육 열풍이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다시 번지고 있다. 학부모들은 “영재도 만들어진다”며 너도나도 영재교육에 뛰어들고 있다. 사교육 시장에서도 영재교육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강남 일대 학원에서는 교육청이나 대학 영재교육원 시험 기출문제를 갖고 영재 준비수업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지난 4월 서울과학고가 과학영재학교로 전환된다는 소식에 학생과 학부모들은 비전 있는 새로운 ‘특목고’가 생겼다며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과학영재학교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에 따라 영재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사교육 열풍도 함께 일고 있다. 학원에서 개설한 ‘과학영재학교 대비반’의 가격은 고액과외 수준이다. 과학영재를 뽑는 게 아니라 사교육 영재를 뽑고 있다는 불만도 터져나온다. 애초에 과학영재학교가 추진된 데는 과학고가 ‘과학인재양성’이라는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현실이 한몫 했다. 입시 사교육을 최소화하겠다는 것도 중요한 취지 가운데 하나였다.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을 둔 박모 씨는 아이가 7살 때부터 영재교육을 시켰다. 임 씨는 “학기 초에 교육청 산하 영재교육원 입학시험에선 떨어졌지만, 사설기관 두 곳에서 받은 영재검사에서 아이가 상위 3%에 들었다”며 “학원에 계속 보내며 다음 시험에 대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학부모들은 영재적성검사나 영재교육원 입학시험 역시 사교육으로 대비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창의력 개발을 내세운 사설 영재학원들은 초등학생들에게 중·고교 수준의 수학·과학 선행학습을 시키며 학부모들의 기대심리를 자극하고 있다. ■ ‘영재학교대비반’이 한 달에 80만원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 분야에서 깊은 통찰력을 가진 영재가 아닌 선행학습을 통해 길러진 ‘무늬만 영재’가 양산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을 둔 정아무개 씨는 “교육청 산하 영재교육원 시험장에 가 보면 사설학원들이 지난해 합격자 중 자기 학원 출신 학생이 몇 명이라고 홍보한다”며 “결국 영재교육원 입학에 성공한 아이들 중 대다수가 학원을 통해 만들어진 영재라는 말 아니냐”고 지적했다. 대치동의 A 학원은 최근 초등생 학부모들의 상담이 크게 늘고 등록자 수도 15% 이상 늘었다. 이 학원 관계자는 “꾸준한 관리와 선행학습을 통해 영재성을 기를 수 있다”며 “진짜 영재아들의 수는 얼마 안 될지도 모르지만, 부모들은 장기적으로 특목고 입시 등을 바라보고 영재교육을 시작한다”고 전했다. B학원은 2주 과정에 40만 원, 목동의 C학원은 1개월 과정에 80만 원 수준이다. 중계동 D학원은 1개월에 76만 원에 이른다. 여기에 일부 과학영재학교 준비생들이 올림피아드 등을 위해 개인과외를 받는 것까지 합하면 사교육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지난 5월 통계청이 발표한 ‘중학생 평균 사교육 비용’인 23만4000원과 비교하면 4배에 이를 정도다. B학원 관계자는 “오는 7월 ‘창의력 문제해결검사’ 전형에 대비하는 파이널 과정이 개설돼 있는데 인기가 많아 자리가 없을 정도”라면서 “서울지역의 많은 특목고 학원들이 영재고 대비반을 신설하는 등 분위기가 많이 고무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학원들은 이런 설명에 코웃음만 친다.A학원 관계자는 “올림피아드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학원에서 체계화된 훈련을 계속하면 충분히 입상이 가능하다”면서 “수천 명이 지원할 과학영재학교에서 대부분의 지원생이 올림피아드 수상실적이 있을 텐데, 없으면 불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교조의 한 관계자는 “고교 다양화를 성급하게 추진하다 보니 사교육 열풍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라고 지탄했다. ■ 영재학교, 대입전쟁터 돼선 안 된다 한 영재학원의 관계자는 “학업 능력에 관한 문제가 집중 출제되기 때문에, 학원은 교과서에 없는 사고력과 창의력 위주의 수학·과학 문제에 집중한다”고 설명했다. 영재 선발 방식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영재 교육이 강화될수록 사교육 시장은 팽창할 수 밖에 없다. 영재교육원은 서류전형 뒤 영재성 검사를 통해 30%의 학생을 탈락시키기는 하지만, 그 다음 치러지는 학문적성검사가 사실상 당락을 좌우한다. 따라서, 학생의 잠재적인 능력을 측정하는 영재성 검사와 함께 공부에 대한 동기나 과제집착능력을 보는 인성검사의 반영 비율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정명신 함께하는교육시민모임 공동대표는 “영재의 정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없는데 선행학습으로 길들여진 학생들에게 영재교육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현재 명문대 입학의 지름길로 전락한 과학영재교육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영재를 길러내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숙 한국교육개발원 영재교육센터 소장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학업 성취된 부분이 아니라, 해당 학생이 지원을 받고 얼마나 발전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잠재성을 강조했다. 국가의 지원이 없으면 타고난 영재성이 사장될 학생으로 영재 교육 대상 자격을 구체화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한 사람의 천재가 수백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가정하에서는 국가 장래를 위해 영재를 육성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교육풍토가 영재가 길러질 수 있게끔 형성돼 있지 않다. 과학영재가 될 만한 아이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영재가 자랄 수 있는 사회·교육적 여건이 안 돼 있다. 자칫 영재를 범재(凡材)로 만들 수도 있는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높은 교육열에다 자녀들에 대하여 학부모들이 지나친 기대감과 욕심을 갖고 있다. 유년시절에는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읽고 쓰기를 다 깨우친 천재들이 많다. 하지만, 사교육에 길러지고 웃자란 이들은 중·고교로 가면서 수재·영재가 되고, 대학에 가서는 범재가 되고 만다. 문제는 영재 선발방식이다. 학생의 잠재적인 능력을 측정하는 영재성 검사와 함께 학생의 창의력과 탐구력을 집중 평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