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한기호 (kyosoma@nate.com) 지난 여름 뜨거운 태양볕과 국지성 호우의 변덕스러움이 도시 전체를 달궜다 적셨다를 반복했던 터라, 이맘때의 선선한 기운은 ‘가을전어와 며느리’의 오랜 인연만큼이나 반가운 손님처럼 다가온다. 어느덧 10월, 구름을 벗 삼아 모처럼 광화문거리를 거닐다 보니 거리 사진전이 시야에 들어온다. 주제는 ‘10-4 남북정상선언 3주년 기념사진전’이다. 계절 탓인지, 무심코 들른 행인의 신분으로는 꽤 오래 사진들을 둘러보게 되었다. 엄마 손을 잡고 나온 걸음마 아이부터, 곁눈질로 훑어보며 길을 재촉하는 여학생들, 그리고 북에 대한 소회가 진하게 베여 있을 것 같은 노년의 신사까지. 진열된 사진들을 채 둘러보기도 전에 나는 3년 전 시공간으로 가고 있었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과 조선시대의 보헤미안 3년 전 나는 모 언론재단에서 제2차 남북정상회담과 관련된 방송-신문의 보도 동향을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남북관계’란 소재는 진보와 보수가 제 목소리를 높이기에 알맞은 소재임에 분명하다. 당시 지상파 방송을 제외한 주요 언론들은 7년 만에 재개된 남북정상 간의 만남을 바라보며 제각각 입맛에 맞는 사족을 붙이느라 분주했다. 그러나 쏟아져 나온 보도들 가운데 시선을 끈 것은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이뤄진 행위였다. 남북 각 대표단은 당시 서로의 기념품을 전달했는데, 남측 기념품 중에는 드라마, 영화, 다큐멘터리를 담은 DVD 세트가 포함돼 있었다. 청와대는 ‘세계 3대 국제영화제의 수상작 세편을 비롯해 한국 영화 10여 편을 북측에 전달됐다’고 발표했는데, 그 중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은 그 포스터로 주목을 받았다. 극 중 배우 최민식이 소화한 인물은 바로 조선시대의 화가 장승업. 처마 위에 올라타 있는 남정네의 한 손에는 술병이 쥐어져 있고, ‘세상이 뭐라 하든 나는 나, 장승업이오’를 외치는 특유의 소탕한 미소는 인터넷상에서 해학적 소재로 숱하게 패러디됐다. 그는 절지(折枝)·기완(器玩)·산수·인물화에 탁월한 재주로 유명했다. 필치가 호방하고 대담하면서도 소탈한 맛이 풍겨 안견 김홍도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거장으로 알려진 문예가다. 반면, 술을 좋아해 그림과 맞바꾸는 보헤미안을 닮은 삶의 모습이 그의 거침없는 필치와 닿아있기도 하다. 3년 전으로 돌아가 북측에 건네진 ‘취화선’과 쾌남 ‘장승업’의 기억을 더듬고 나니 다시 광화문 사진전의 현장이 눈에 들어온다. 각자의 이야기를 머금은 시민들이 늦은 시간까지 사진전에 동행했다. 존중과 수용 돌이켜보면 올 여름 변덕스런 날씨만큼이나 뜨거웠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게 식어버린 것이 남북한 관계였다. 그렇게 논의가 무성하더니 이제는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진부하게 느껴진다. 비록 남북 간 교류가 소원해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북한’은 헤드라인뉴스의 상위 랭커다. 네거티브보다 무서운 것을 무관심으로 본다면 우리는 북한 요인을 진보와 보수의 소모적 논쟁에서 한 차원 나아가 생활 속의 플러스 요인으로 삼는 연습에 호의적이어야 한다. 최근 여론조사(국회통상위 모 의원이 지난 9월30일 전국 남녀 1024명을 대상으로 전화 조사) 결과를 보면, 남북의 예민한 현안에 대해 세대 간 접근방법과 인식차는 존재했지만, 바람직한 대북정책으로 국민의 55.2%가 남북대화를 꼽았다. 대북 쌀 지원 역시 조건 없이 이뤄져야 한다는 대답이 54.5%를 차지했다. 직전 두 정부의 대북정책을 수용해야 한다는 응답은 62.3%로 나타났다. 정상 간의 약속에 부족한 부분이 있을지라도 중요한 것은 정책의 연결선상에서 이것을 존중하고 보완해 나가겠다는 공개적 의지라는 생각을 한다. ‘물을 주지 않아 자라지 못한 나무’ 남북한 문제는 결코 정치가들만의 차지가 아니다. 아련히 잊혀가지만 두 번의 남북정상회담은 적잖은 시민들에게 분명 다른 차원의 소망을 품을 기회와 감동을 제공했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대통령은 군사분계선 앞에서 ‘이 노란선이 닳아 없어지는 날’을 기약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혹자는 10·4 정상선언을 ‘버려진 나무’로 명명하며 평가절하 했다. 생각해 보건데 ‘물을 주지 않아 자라지 못한 나무’라는 표현이 어울릴 듯하다. 물을 주지 않아 성장 자체가 봉쇄된 상황에서 나무의 성격 자체를 논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척박한 환경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 환경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와, 그간 행해졌던 노력들의 성과를 계승해 나가려는 진정성이 담보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진전은 10월 11일까지 계속됐다. 2000년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로 만난 남과 북 정상의 이야기는 수십 대의 이젤에 8일 동안 안정감 있게 세워졌다. 그날의 이야기들이 아이들의 눈에 옛날 동화로 머물고 말 때 한반도는 여전히 ‘특수상황’에 놓여있을 것이다. 남측의 엔터테먼먼트 산업으로 재탄생된 ‘장승업’이 북으로 간 지 3년이 흘렀다. 그의 소탕한 미소가 모처럼의 가을을 물들이고, 다시 한반도에 사계절 가득 드리워지길 두 손 모아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