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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17] - 남한산성 길 2

정치싸움 일삼다 패망한 인조는 ‘시체 문’으로 도망쳐 남한산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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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11호 박현준⁄ 2011.02.28 14:31:19

이한성 동국대 교수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다. 대문 격인 남문(지화문: 至和門), 북문(전승문: 全勝門), 광주나 광지원 방향의 관문인 동문(좌익문: 左翼門), 송파 삼전도 방향의 서문(우익문: 右翼門)이다. 남문에는 지화문(至和門)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단아한 해서체 글씨로서 안내판에는 정조 3년에 이 문을 개축하며 지화문이라 불렀다는 내용이 있다. 2009년 문루를 복원할 때 정조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편액을 달았다 한다. 지화문을 바라보며 375년 전 병자년에 이 문으로 허겁지겁 들어왔을 인조 임금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잠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살펴보자. 인조 14년 병자년(1636년) 12월 13일 자 기록을 보면 도원수 김자점이 적병(청나라 군)이 안주(安州: 평안북도 안주군)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치욕의 병자호란을 겪으리라는 생각은 아무도 못했고, 어떻게 막을 것인지를 논의하는 단계였다. 그러나 그 다음 날인 12월 14일 적군이 개성을 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으니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부랴부랴 종묘의 신주(神主)와 빈궁(嬪宮)을 강도(江都: 강화도)로 피난시키고 인조와 중신들도 몽진(蒙塵: 임금의 피난) 길에 나섰다. 어가(御駕: 임금의 가마)가 광통교를 건너고 송현(松峴: 한국은행, 상동교회 앞 고개)을 지나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에 이를 즈음 급한 비보가 날아 왔다. 적이 이미 양철평(良鐵坪: 녹번동, 불광1동 지역)까지 진격해 왔다는 것이다. 급보를 접한 임금 이하 중신들은 급히 어가를 돌려 구리개(銅峴 : 을지로)~수구문(水溝門: 광희문)~살곶이다리~신천~송파나루~개농(오금동)을 지나 남한산성 지화문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인조 시대의 국가 비상체제의 허술함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불과 9년 전인 1627년(인조 5년)에 후금(淸의 이전 국호)에게 침공 당하여 굴복한 정묘호란(丁卯胡亂)을 교훈삼지 못하고 또 다시 침공 당하여 피신하는 비참한 꼴을 보이게 됐고, 게다가 적의 침공 보고를 받은 날(12월 13일)인 바로 다음 날(12월 14일) 적이 도성 외각인 양철평(녹번동)에 이르도록 비상연락 체제도 가동하지 못했으니,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세력의 국가운영 능력은 참으로 허술한 것이었다.

이렇게 고립무원의 40여일을 버틴 후 결국은 항복의 예를 올려야 했는데 이 때 인조가 나선 문이 서문(우익문: 右翼門)이었다. 다시 인조가 지나간 문을 살펴보면 숭례문 ~ 수구문 ~ 지화문(남문) ~ 서문(우익문)이 된다. 수구문(水溝門, 水口門)이란 지금의 광희문(光熙門)인데 일명 시구문(屍口門: 시체가 나가는 문이란 뜻)이다. 시체나 빠져나가는 ‘시구문’ 밖에는 전염병이 돌면 수많은 시체가 내다버려졌고, 그 앞에는 점보는 집들이 즐비했다 하니… 조선시대에는 산 자가 다닐 수 있는 문과 죽은 자가 다닐 수 있는 문이 구분돼 있었다. 이 시구문은 장례 지낼 시신(屍身)이 나가는 문으로, 역질이 돌아 땅에 묻을 수 없는 시신들은 시구문 밖에 버려졌다고 한다. 지금도 이 시구문 밖 옛길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10몇 년 전만 해도 점(占)집 등 신당(神堂)이 즐비했다. 지금의 신당(新堂)동이란 지명도 사실은 신당(神堂)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문을 임금이 나섰으니 얼마나 조급했으면 그리 했겠는가? 조금만 돌면 흥인지문(동대문)을 돌아 영도교를 건너 체모는 지킬 수 있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남한산성 지화문을 통해 황급히 피신했던 인조는 서문을 통해 성을 나와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의 예를 올린다. 여기서 ‘삼배구고두’를 다시 언급하는 것은 많은 야사들이 이 부분에서 비분강개해 사실을 지나치게 각색하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살피고자 함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자. 인조 15년(1637년 정축년) 1월 30일(경오날) 기록을 보면, 인조는 시종 50여명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성을 나와(率侍從五十餘人 由西門出城) 청의 장수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를 따라 말을 달려 삼전도에 이른 뒤 항복의 예를 행한다. 그 내용은 “용골대 오랑캐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 아래에 자리를 만들어 북쪽을 바라보고 인조에게 자리로 나아가게 해서 청나라 사람이 여창(臚唱: 호명하여 불러들임)케 하여 인조가 삼배구고두의 예를 행하였다(龍胡等引入, 設席於壇下北面, 請上就席, 使淸人臚唱, 上行三拜九叩頭禮)”는 것이다. 본래 임금은 북쪽에 자리하여 남쪽을 바라보며 남면(南面)하는 게 원칙이다. 청태종은 남면하고 인조는 북면(北面)했으니 신하의 위치였고, 단 아래에서 삼배구고두를 하였으니 신하로서 예를 올린 것이다. 흔히 야사에서 말하기를 인조가 세 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찧어 그 찧는 소리가 청태종에게 들리도록 하고 피가 낭자하여 어깨를 적셨다고 과장하고 있다. 실제로 삼배구고두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실록에 이 표현이 애매하여 3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은 것이라는 오해를 가져 왔다. 사실은 한 번 무릎을 꿇고(跪 : 궤) 세 번 머리를 땅에 닿도록 조아리는(叩: 고) 예를 세 번 반복함으로써 극진한 신하의 예를 표했던 것이다. 그러니 실제 내용은 1궤 3고 X 3회(一跪三叩 X 三回)였으며, 찧는 소리를 내지도, 피도 흘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 예가 끝난 후 차도 한 잔씩 돌았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다만 우리 역사의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었음을 이제라도 다시 기억해야 한다. 무능하고 정파의 이익만을 탐하는 지도층들이 저지른 이 치욕의 역사는 언제라도 거듭될 수 있다. 흙탕물에 들어가 문제를 푸는 사람을, 숨어 있다가 입으로 비판하는 사람들. 400년 전 현실은 지금도 되풀이되니… 이야기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지도층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극명한 예가 있다. 지금도 삼전도에 가면 사적 101호 삼전도비(三田渡碑), 즉 청태종공덕비(淸太宗功德碑)가 있다. 신하의 나라가 된 조선은 항복 조건 중 하나로 정복자 청태종을 찬양하는 공덕비를 세워야 했다. 이 치욕의 비문을 쓰려고 하는 신하가 아무도 없었다. 누가 흙탕물에 손 담그려 하겠는가? 결국은 이조판서 백헌 이경석(白軒 李景奭)이 비문을 썼다. 그는 이 비문을 쓰고 글 가르쳐 준 형님께 편지를 보내 ‘글 배운 것이 천추의 한’이라 했다. 이경석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한마디로 명예도 목숨도 아끼지 않고 난세의 지도층으로서 자신의 몸을 다 바친 분이다. 소현세자가 심양으로 끌려가자 청나라로 가서 세자를 보필했으며, 효종의 북벌 계획을 돕다가 청나라에 발각되자 죽음을 각오하고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 죽음 직전 효종의 간곡한 애원에 의해 간신히 목숨을 구해 의주 백마산성에 감금되었던 분, 풀려나서도 청나라에 의해 영원히 벼슬길이 막혔던(영불서용: 永不敍用) 분이 이경석이었다. 이 분이 나이 들어 은퇴하자 기로소(耆老所: 은퇴한 상공들의 원로원)에 들어 궤장(几杖: 임금이 하사하는 의자와 지팡이로, 원로 대신에 대한 최고의 예우)을 받게 되었는데 그 연회에 우암 송시열(尤唵 宋時烈)이 쓴 축하의 글 궤장연서(几杖宴序)에 수이강(壽而康: 오래 살고 건강하소서)이란 말을 썼다.

듣기에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러나 ‘수이강’이란 말의 출처는, 송나라 흠종 때 금나라에 항복 문서를 바치고 늙도록 잘 산 손적을 비판하면서 주자가 쓴 표현이었다. 송시열이 자신을 벼슬길에 인연 맺어 준 이경석을 손적에 비유해 ‘수이강’ 하라 했으니 이경석은 어떠했겠는가? 흙탕물에 손 담그고 문제를 풀어가는 이와, 비겁하게 숨어 있다가 입으로 비판하는 사람, 우리 역사는 아직도 이들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 지화문을 바라보며 이런 일들이 현재진행형임을 새삼스레 느낀다. 이제 남한산성을 떠나 다시 산성역으로 내려온다. 내려가는 길은 지화문 나서서 차도 옆을 끼고 만든 등산로를 택하든지, 아니면 공덕비가 있는 곳으로 내려 와 버스를 이용하든지 그 날의 컨디션에 따를 일이다. 산성역 2번 출구 옆으로 나무층계가 있고 길은 영장산(靈長山)으로 이어진다. 성남에는 두 개의 영장산이 있다. 지금 오르는 경원대학 뒤 복정동과 태평동 사이의 영장산이 있고, 다른 하나는 분당구 율동과 중탑동 사이 일명 맹산(孟山)인 영장산이다. 산성역에서 영장산에 이르는 길은 편안하고 숲이 우거진 산책길이다. 중간에 신흥아파트 뒤 운동기구가 설치된 어린이 놀이터를 지나면 영장산으로 오르는 나무 층계가 설치되어 있다. 지난 여름 태풍으로 나무들이 무수히 쓰러졌다. 영장산 정상에 닿는다. 고도 200m가 되지 않는 작은 산이다. 남쪽을 향해 10m쯤 가면 우측으로 내려가는 하산길이다. 100여m 내려오면 포장길을 만나는데 이 포장길을 우향우 하여 끝까지 가면 망경암(望京庵) 마당이 된다. 이 절 마당에서 서북쪽을 바라보면 막힌 곳 하나 없이 시야가 터져 있는데 이름 그대로 서울을 바라보기에(望京) 최적의 자리이다. 망경암은 고려말이나 조선초에 세워진 사찰이라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두 개의 망경암칠성대중수비(望京庵七星臺重修碑)에 기록된 연대인 광무1년(1897년, 고종 34년)에 다시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망경암 산신각 오르는 언덕 옆으로는 암벽이 있는데 이곳에는 경기 유형문화재 102호로 지정된 여래마애불이 모셔져 있으며 14개의 옅은 감실(龕室: 불상이나 불경 등을 모시기 위해 파낸 공간)을 파내어 칠성단을 조성하고 각종 기원문을 기록하여 두었다.

이곳 망경암과 칠성단은 조선 왕실의 후손 이규승(李奎承)이란 이가 조성하였는데, 이 분은 세종의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平原大君)과 예종의 둘 째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제사를 모시는(奉祭祀) 후손이었다. 세종은 6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를 얻으셨으며 그 중 정비인 소헌왕후로부터 8남 2녀를 얻으셨다. 7째 아들 평원대군이 19세에 천연두로 세상을 떠나자 그 제사를 받들 사람이 없으므로 예종의 둘째 아들 제안대군으로 하여금 봉제사(奉祭祀)하도록 했던 것이다. 조강지처 말고는 숱한 후궁들에 손대지 않았던 별난 임금 현종은 1남3녀만 두었는데, 그 중 딸 둘이 숨졌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따라서 이규승이란 분은 서울이 바라다 보이는 이곳에 칠성대를 세우고 조상의 명복을 비는 한편 조선 왕실의 번영과 수복을 빌었던 것이다. 남아 있는 각자(刻字)에는 ‘大皇帝陛下萬萬歲’ ‘大型北斗七元星君 左輔三台南極星瑞 右弼六星前星重輝’를 비롯해 칠성님께 수(壽)와 복(福)을 빈 염원들이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이제 200여 년 된 보호수 느티나무를 돌아보며 망경암을 떠난다. 올라갔던 포장도로를 거꾸로 내려오다가 보면 살짝 능선을 지나가는 오솔길이 보인다. 이 오솔길로 접어들어 100여m 내려가면 숲 사이로 기와 지붕이 보인다. 길은 외길이니 길 잃을 염려는 없다. 이 절이 봉국사(奉國寺)다. 절 내력에는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창건했다고 한다. 그 뒤 조선조에 와서 현종의 두 공주 명선(明善), 명혜(明惠)가 요절하니 두 공주를 위로하는 원찰로 이곳을 정했다 한다. 잠시 현종을 살펴보면, 이 분은 조강지처 명성왕후 김 씨 외에는 어느 후궁도 거느리지 않은 분이니 조선 왕 중에서는 특이한 분이다. 따라서 손(孫)도 적어 1남 3녀를 두었는데 그 중 두 딸을 잃었으니 얼마나 마음 아프셨겠는가? 봉국사에는 성남 유형문화재 101호인 대광명전(大光明殿)이 있고 그 안에는 목조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모셔져 있으며, 후불탱화 또한 아미타여래가 그려져 있다. 모두 현종 15년(1674년) 무렵 조성된 것들이다. 아미타불, 이 분은 누구인가? 죽은 자들을 서방정토(西方淨土)로 인도하여 안락을 찾도록 하는 부처이다. 죽은 두 딸이 죽어서도 서방 정토에서 안락을 찾도록 한 아버지의 마음, 봉국사에 오면 두 딸을 잃고 가슴 아파했을 한 아버지의 마음이 전해져 온다. 대광명전 앞 두 추녀 끝에는 돌로 만든 작은 동물상이 대광명전을 지키고 있다. 영혼조차 지켜주려 함인가…. 봉국사 정문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모란으로 나온다. 이곳은 먹을거리가 풍부한 서민들의 장터이니 내키는 음식 마음껏 드시고 곡차도 한 잔 하시기를….

교통편 8호선 산성역 1번 출구 ~ 버스 9, 52번 환승 → 남한산성종점 하차. 또는 산성산책길 인공폭포에서 도보로 남한산성 남문. 걷기 코스 1) (걸어서 오를 경우) 산성역 1, 3번 출구 ~ 인공폭포 ~ 산성산책길 ~ 남문(재화문) ~ 산성버스종점(일명 종로) ~ 이후는 아래의 2) 참조 2) (버스로 오를 경우) 산성 버스종점 ~ 천주교 성지 ~ 신익희 선생 동상 ~ 개원사 ~ 성벽 ~ 남문 ~ 산성산책길 ~ 산성역 ~ 영장산 ~ 망경암 ~ 봉국사 ~ 전철역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본지 Art In 편집주간)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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