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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음악 에세이]‘영국 애국심’을 음악으로 만든 엘가

그의 ‘위풍당당 행진곡’으로 영국의 여름도 끝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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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17호 박현준⁄ 2011.04.11 14:54:56

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19세기 초 독일, 이태리, 프랑스 음악이 한참 꽃 피울 때 영국의 음악은 약세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엘가(Edward Elgar), 본 윌리엄스(Ralph Vaughan Williams), 구스타브 홀스트(Gustav Theodore Holst)의 등장으로 영국도 음악의 강국으로 발 디디게 되었다. 영국 시골 출신인 엘가는 ‘수수께끼 변주곡(Enigma Variation)’ ‘위풍당당 행진곡(Pomp and Circumstance March)’ ‘첼로 협주곡’ 등으로 단연 영국이 가장 자랑하는 작곡가가 되었다. 특히 1960년대에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첼리스트라는 평가를 받는 미녀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가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해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엘가와 그의 첼로 협주곡은 일약 유명해졌다. 엘가는 영국 중부의 시골 마을 우스터(Worcester)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이자 악기와 악보를 파는 상인이었다. 엘가는 악보로 음악 공부를 시작했으며 여덟 살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하였다. 열다섯 살이 되면서부터 우스터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 단원이 되었는데 드보르작(Antonin Dvorak)이 그곳에서 자신의 음악(심포니 6번과 Stabar Mater)을 지휘할 때 단원으로 참가했다. 엘가가 작곡한 ‘첼로 협주곡’은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첼로 협주곡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그들의 인연이 시작된 것 같다. 엘가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교습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는데 1882년 음악의 도시 파리와 라이프치히를 방문하면서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바그너의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주로 엘가는 성악곡을 작곡하였지만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899년에 ‘수수께끼의 변주곡(Enigma Variations - A Hidden Portrait)’이 런던에서 초연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 음악은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14명의 친구들의 초상화를 음악적으로 묘사한 것인데, 아름다운 선율과 오케스트레이션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에서도 연주되었는데 림스키-코르사코프 같은 러시아 음악가들도 높이 평가했다. 미국 뉴욕에서도 1910년 말러의 지휘로 공연되었다. 성악곡 등 작곡했지만 주목받지 못하다가 40줄 들어서면서 작곡한 ‘위풍당당 행진곡’이 영국의 정신을 대표하는 것으로 큰 인기 끌어 특히 영국인의 사랑을 많이 받은 음악은 1901년부터 1930년에 작곡된 ‘위풍당당 행진곡(Pomp and Circumstance March)’들이다. 이 행진곡의 가사와 음악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애국정신’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엘가의 전성기는 1904~1911년으로, 이 시절 최고의 인기를 얻었다. 미국에서도 자신의 음악을 지휘하면서 높은 수익을 얻었으며 버밍햄 대학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1908년 그의 ‘심포니 1번’은 첫해에 100번이나 연주되었다. 1910년에는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프리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가 바이올린 협주곡을 위촉해 함께 공연했는데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에 ‘심포니 2번’을 완성하고 엘가는 시골을 떠나 런던으로 향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영국에 크나큰 상처를 남겼으며 이러한 사회적 변화로 엘가의 인기도 하락했다. 사랑하는 부인마저 세상을 뜨자 우울증에 빠진 엘가는 1914년부터 작곡을 거의 하지 않다가 1919년부터는 다시 용기를 얻어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피아노 4중주’ ‘현악 4중주’ 등을 작곡하였다.

그리고 예전처럼 시골집에서 살면서 4~5시에 일어나 건강한 생활을 하면서 엘가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첼로 콘체르토’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이 음악은 ‘가을의 매혹적인 슬픔’이라는 평을 받았지만 한 평론가는 이 엘레지는 ‘절망의 슬픔’이 아니라 ‘동정심 가득한 슬픔’이라고 평가했다. 엘가는 그가 평생 사랑했던 아내가 죽고 음악가로서의 명성 그리고 자신의 일생도 끝나간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이 음악을 만들었을 것이다. 엘가는 자신의 음악을 많이 녹음하기도 했다. 1919년 그의 지휘로 ‘첼로 협주곡’을 녹음했을 때 열아홉 나이로 첼로를 연주했던 존 바비롤리(Sir Barbirolli)는, 66년 뒤 백발의 노인이 되어 직접 지휘봉을 잡았고, 젊은 자클린 뒤 프레가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함으로써 반세기를 건너뛰는 녹음 작업도 이뤄졌다. 엘가의 ‘위풍당당 1번’은 매년 로열 앨버트(Royal Albert) 홀을 꽉 채운 6000명이 함께 하는 프롬의 마지막 날에 공연되었다. 이 음악은 영국인의 자부심과 애국심의 상징이기도 하다. 매년 여름(7~9월) 이곳에서 열리는 BBC 프롬(Proms)은 프롬나드 콘서트(Promenade Concert)의 약자인데 1895년 이 콘서트가 시작되었을 때 관객들이 걸어 다니면서 공연을 볼 수 있었던 것에서 유래됐다. 1층 무대 주변에서는 아직도 서서 공연을 보는데, 이 입석은 지정 좌석보다 입장권이 훨씬 저렴해 금방 매진된다. 매년 7~9월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리는 BBC의 ‘프롬나드 콘서트’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행진곡은 서서 듣는 전통이 지금도 지켜져 매년 콘서트의 마지막에는 특별한 이벤트가 진행된다. 그때는 항상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1번 ‘희망과 영광의 땅’과 아르네의 ‘브리타니아여, 통치하라(Rule, Britannia)’가 연주된다. 이 두 음악에는 대영제국의 애국심이 담겨져 있어 제2의 애국가로 불리기도 한다. 영국의 대형 국기를 흔들면서 이 음악이 연주되면 영국인은 눈물을 흘린다. 그 음률은 영국인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까지도 깊은 감동을 전한다. 영국의 BBC 방송은 이러한 저력을 지닌 프롬 콘서트를 통해 영국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켜 단결심을 고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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