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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아라뱃길, ‘만년 품을 맥’을 끊어버리다

김포 장릉 들른 정조대왕 “비단병풍 지세 지켜라”고 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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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81호 박현준⁄ 2012.07.02 20:25:48

북한산에 올라 서녘을 바라보면 한강 너머로는 큰 산 하나 보이지 않고 서해가 바라보인다. 이 평탄지에는 언덕만한 산들이 낮게 퍼져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이등변삼각형 모양으로 반듯하게 서 있는 산이 눈길을 끈다. 행여 강변북로를 타고 일산 방향이나 임진강 방향으로 갈 때, 또는 한강을 끼고 강화로 갈 때 남녘으로 반듯하게 서 있는 산이 보일 것이다. 그 이름 계양산(桂陽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부평도호부조에는 고을의 북 2리에 있는 진산으로 일명 안남산(在府北二里鎭山 一名安南山)이라고 전했다. 높이 395m로 나지막하지만 역사도 깊고 주변 산자락에 발을 뻗친 고을도 많은 녹녹치 않은 산이다. 가볼 만한 길은 정상을 오르는 길과 산둘레를 에두르는 둘레길이 있다. 더운 한여름에는 햇볕이 강하니 둘레길이 나을 듯하고, 그 밖의 계절에는 정상을 넘어 이어지는 산길을 종주해 보는 것도 권할 만하다. 이 지역은 본래 이름의 글자처럼 비운의 왕자 비류(沸流)의 땅이었을 것 같은데 비류가 죽음을 맞은 후 아우 온조에게 넘어가 백제의 땅이 되었다. 그 후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고구려에게 빼앗겨 주부토(主夫土)가 되었다. 얼마 못가서 ‘북한산 순수비’가 보여주듯이 진흥왕의 적극 진출로 한강 유역이 모두 신라의 영토가 되었는데 진흥왕은 새로 얻은 땅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金武力)을 책임자(道行軍摠管)로 임명했다. 사실 김유신 집안은 신라에게 점령당한 대가야(大伽倻) 출신이었는데 신주의 책임자는 전쟁 통에 빼앗은 땅을 지키고 개척해야 하는 위험하고 고된 자리여서 그랬을 것이다. ‘왕따’를 면하고 주류세력으로 들어가려는 할아버지 대부터의 노력이 결국은 김유신 대에 이르러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신라가 이 지역에 붙여 준 이름이 장제(長堤)였다. 장제가 무슨 뜻인가? 긴 둑 아니겠는가? 부평, 계양, 부천, 김포를 아우르는 하천이 굴포천(옛 이름 大橋川)인데 비만 오면 언제나 범람해 이 고장의 저지대는 굴포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신라 때부터 긴 둑을 쌓고 고을 이름도 아예 ‘긴둑(長堤)’이라 했던 것이다. 이 물과의 전쟁 역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아라뱃길’의 주용도 중 하나가 굴포천의 홍수 관리에 있다 하니 이제는 장제의 역사도 끝나지 않겠는가. 이 지역의 중심이던 부평 지킨 계양산 후기신라의 통치력이 상실되면서 각 지역은 사실상 유력토호(土豪)들이 통치하는 군웅할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곳은 한 때 궁예의 땅이 되었다가(905년) 고려가 태동하니 지역의 토호 이희목(李希穆: 계양산 서쪽 목상동木霜洞 출신)이 고려에 귀부해(925년) 공신으로 봉해졌고 유력세력이 되었다. 이곳 이름도 수주(樹州), 안남(安南), 계양(桂陽), 길주(吉州), 부평(富平)으로 바뀌었는데 주변 지역인 김포, 교하, 고양, 시흥, 안산이 모두 속현(屬縣)이었다. 계양산(桂陽山)의 이름도 군현의 이름이 바뀜에 따라 바뀌었는데 수주일 때는 수주악(樹州岳)이 되었다가 안남도호부가 되니 안남산(安南山, 아남산)이 되고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가 되니 계양산이 되었다. 어떤 계양산 안내 자료에는 계수(桂樹)나무와 회양목(淮陽木)이 많아 계양산이라 부른다고 했는데 아마도 아닐 것이다. 수주악과 안남산이 보여 주듯이 그 고을의 주산(主山)이기에 그렇게 불렀을 개연성이 크다. 자, 이제 계양산을 향해 출발이다. 공항철도 계양역이 출발점이다. 서울역에서 공항철도를 타면 30분이 걸리지 않는다(1호선 부평역에서 인천 지하철 1호선으로 올 수도 있다). 쾌적한 시골마을에 산뜻한 역사(驛舍)가 서 있다. 뒤로는 공항고속도로와 아라뱃길이 평행선으로 달리고 있다. 역사(驛舍)를 나서면 좌측으로 계양대교가 놓여 있다. 이 다리는 공항철도길, 공항고속도로, 아라뱃길을 넘어 인천의 오지 장기동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다리에는 전망대도 갖춰져 있다. 아라뱃길이 시원스레 내려다보인다. 아라뱃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뱃길이다. 장제(長堤)에서 이야기했듯이 굴포천은 오래 전부터 칼의 양날처럼 혜택과 재앙을 동반한 물길이었다. 예부터 어떻게 치수(治水)할까 하는 고민과 어떻게 물길을 이용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양립(兩立)한 하천이었다. 때는 고려 시대로 넘어 간다. 고려의 경제 기반은 삼남(三南: 경상, 전라, 충청)에서 조운선을 이용해 예성강 물길로 올라오는 조세와 공물이었다. 그런데 뱃길 중간에 마(魔)의 구간이 있어 조운선이 침몰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영광의 칠산 앞바다(七山梁), 태안의 안흥 앞바다(安興梁), 임천의 남당진(南唐津), 강화의 손돌목(孫乭項), 황해도 장산곶 등이었다. 요즈음 보물선이 발견됐다는 지역과 대체로 일치한다. 이 중에서도 가장 골칫거리가 손돌목이었다. 강화 용두돈대와 통진(김포) 덕포진 사이 강물처럼 좁은 그 물길이 귀신도 겁내는 물길이었으니 한 해에 수십 척의 배가 수장됐다. 물살도 빠른데다가 바다 밑에 오목하게 패인 날카로운 바위길이 물길이어서 아차하면 그대로 배가 수장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태종 14년(1414년) 한 해에만 66척의 전라도 조운선이 난파되었으니 알 만한 뱃길 아니겠는가? 고려 이어 조선까지 굴포천 물길 이으려 했으나 이에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우(崔禹)가 고민을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손돌목을 피해 조운선을 운항할 것인가? 당연히 안남도호부의 물길을 이용해 조운선이 한강을 통해 빠져 나오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었다. 그 때 물길과 지형을 살피게 했던 곳이 굴포천과 계양산 줄기의 고갯길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국력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도 큰 역사였다. 이제 계양대교에서 아라뱃길을 내려다보면서 최우의 영혼이 아직도 이승에 있다면 자신의 꿈을 이뤄준 800년 뒤 이 땅의 후배들과 축배라도 한 잔 나누고 싶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길을 뚫으려 했던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조선 중종 때 김안로였다. 중종 때 기록은 알 수가 없으나 정조실록에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남아 있다. 정조가 계양산 뒷줄기 지금의 김포시청 뒷산에 있는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의 능을 참배하고 황어면(黃魚面)을 거쳐 부평도호부, 안산을 행행(行幸)했는데 귀경 후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한 말이 정조 21년(1797년) 8월 30일 자 기록에 실려 있다. “장릉(章陵)은 계양산을 안산(案山)으로 하고 비단 병풍처럼 둘러싸여 지세가 매우 좋다. … 중략 … 옛날에 듣건대 김안로(金安老)는 조수(潮水)를 40리까지 통하게 해 원통현(圓通峴)에 이르러 그쳤다 하는데, 이곳은 만년토록 감싸 호위할 땅이니 어찌 인력으로 파고 깨뜨릴 여지가 있겠는가.” (章陵以桂陽山爲案, 環如錦繡障子, 地理甚好。 … 중략 … 昔聞金安老通潮四十里, 至圓通峴而止, 此爲萬年拱護之地, 則豈容人力鑿破乎?)

실제로 김안로는 수로공사를 많이 진척시킨 것 같다. 본래 대교천(大橋川)이 굴포천(掘浦川)으로 이름이 바뀐 것을 보면 누군가 나루터를 파냈던지 개천을 파냈던 것이 분명하다. 바닷가였던 주안에서 원통현(인천 간석동과 부평구 경계. 계양산에서 이어지는 남쪽 줄기) 앞까지 물길을 내고 부평 시내 굴포천을 굴착해 직선화시켰던 것 같다. 그러나 원통현 고갯길을 뚫지 못해 결국은 굴포천을 통해 한강과 바다를 잇는 역사(役事)는 이뤄지지 못했다. 이 일은 500년 뒤 우리 시대에 와서 계양산 북쪽 줄기 고갯길을 뚫어 한강과 바다가 연결됐다. 정조가 원하시던 ‘만년토록 감싸 호위해야 할 땅’(萬年拱護之地)은 아라뱃길이 그 맥을 끊었다. 계양산이라는 안산(案山)의 맥(脈)은 이제 끊겨 장릉으로 지력이 뻗지 못한다. 계양산의 남북쪽 산줄기는 모두 한남정맥(漢南正脈) 길이다. 계양산 북녘 봉우리 꽃뫼산에 봄꽃이 진다. 다리를 건너온다. 뱃길을 따라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가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다. 2년 전 뱃길을 부리나케 뚫고 연 마라톤대회에 참가했던 날이 생각난다. 그때의 을씨년스러움에 비해서는 많이 다듬어져 있다.

필자는 새 길이 뚫리고 개최하는 마라톤대회나 걷기행사가 있으면 많이 참가하는 편이다. 인천대교가 뚫리던 날도 그 길을 뛰어 영종도를 다녀온 일이 있었다. 웬만한 길은 두 번 다시 그 길을 발로 딛을 기회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미신적(迷信的)으로는 예전 지신(地神)밟기처럼 나쁜 기운을 눌러 준다는 생각도 해 본다. 사실 여암 신경준(申景濬) 선생은 도로고(道路攷)에서 ‘길은 그 위를 걷는 이가 주인’이라 했으니 새 길은 그 위에 먼저 오르는 이가 주인 아니겠는가. 다리 아래로는 커다란 황금잉어가 솟아오르는 형상의 조각을 세워 놓았다. 안내판에 이곳이 ‘황어장터’였음을 알리고 있다. 어르신들이 아니고서는 이 지역 주민조차 잊은 황어장터. 이 지역의 이름은 계양구 장기동(場基洞)이다. 장터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조선 초부터 20여 년 전까지 이 일대에서 가장 큰 장(場)이었다 한다. 3일, 8일 열리는 3, 8장이었다는데 특히 우(牛)시장 규모는 하루에 500~600두나 거래되던 장이었다고 한다. 1987년 우시장이 철폐됨으로써 시장의 기능을 잃고 이제는 고도(孤島)와 같은 동네가 됐다. 아라뱃길로 맥 끊긴 3.1만세의 현장 ‘장터동’ 아라뱃길이 된 굴포천의 한 줄기가 이곳까지 닿았는데 황금빛을 띈 커다란 잉어가 많아 고려 때부터 황어향(黃魚鄕)으로 불렸다. 향(鄕)이란 토호들의 자치권이 상당히 보장되는 지방자치기구였다. 부평 이씨(계양 이씨)의 시조가 되는 이희목이 향어향 목상동 사람이었다. 얼마 전 TV에 울산 태화강 황어를 방영하였는데 황금빛 잉어와는 달리 별종의 어류인 듯하다.

한편 서울 외곽고속도로 일산에서 김포대교를 건너 잠시 내려오면 오오지 분기점이 있다. 한자 이름을 살펴보면 老吾地(늙은 나의 땅)가 되는데 지명(地名)치고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본래 이름은 노어지(老魚地)였다. 아마도 물날 때 굴포천을 따라 올라와 못에 갇힌 커다란 잉어(鯉魚)를 이 동네에서는 황어(黃魚)라 부르지 않고 노어(老魚)라 불렀으리라. 그런데, 1919년 기미년 3월에 이 황어장터에서 큰 일이 일어났다. 24일 오후 2시경 천도교도 심혁성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3.1독립만세의 열기가 전국으로 뻗어나가던 때였는데 특히 천도교도들이 중심이 된 결속력은 이 어두운 시대에 가장 파워풀한 응집력을 갖고 있었다. 불교는 쇠퇴하고 기독교는 초창기 발붙이기 시작한 시절이었기에 자금력으로나 응집력으로나 3.1운동에 끼친 천도교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기미독립선언 33인 중 천도교 인사가 15인이나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런 상황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했기에 이후 일제 치하에서 천도교는 심한 압박을 면치 못하였고 교세는 축소하게 되었다.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는 어두운 시절 세상에 힘을 주는 것 아니겠는가. 이야기를 제 자리로 돌려, 황어장터는 많은 군중이 모이는 곳이라서 심혁성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나눠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모였던 많은 군중들이 따라 만세를 불렀는데 순사들이 나타나 심혁성을 포박하고 끌고 가려 하였다. 심혁성을 구해내려고 한 이은선(李殷先)은 칼에 맞아 숨지고 윤혜영은 머리에 자상을 입는 등 평화로운 만세운동이 피로 얼룩지게 되었다.

다음날까지 여러 사람들이 나서 통문을 돌리고 만세운동을 선도하였는데 100여 명이 체포되고 32명이 인천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이 중 6명이 실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였다. 출소 후 심혁성은 가산을 정리하고 고향을 떠나 방랑하면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고 한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독립만세를 외쳤던 이들이 후손들이 많이 계시다 하니 의로운 지역이구나. 황어장터에서 장기동으로 가는 길 우측에는 이은선 지사가 순국한 자리를 알리는 표석을 세워 놓았고 동네 안으로 작은 공원에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탑’을 조성해 놓았다. 기념관은 있는데 찾는 이가 없어서인지 지키는 젊은이(아마도 공익요원)가 길게 하품을 한다. 메모도 하고 사진도 찍는 필자를 보는 젊은이의 눈빛이 ‘참 한가한 사람도 있네’, 이런 듯 하다. 내려오는 길에 추어탕집이 있다. 먹을 만하다. 실명을 브랜드로 한우를 파는 집도 있는데 손님이 많이 들기에 먹어 보았더니 돼지는 그만한데 한우는 X다. 이제 계양산으로 간다. 30, 81, 81-1번 등 쉴 새 없이 버스가 온다. 모두 산행 들목 계산역으로 가는 버스 편이다(아니면 다시 계양역에서 지하철로 계산역으로.)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공항철도 계양역(인천 지하철 계양역) ~ 계산역(지하철, 버스 30, 81, 81-1번) 5번 출구 걷기 코스 계양역 ~ 게양대교 ~ 황어장터 ~ 독립운동 기념탑 ~ (버스)계산역 5번 출구 ~ 봉일사지(현 백룡사) ~ 연무정 ~ 계양산성 ~ 하느재 ~ 계양산 정상 ~ 덕고개 ~ 만일사지 ~ 징맹이고개(중심성) ~ 일명사지 ~ 계양산림욕장 ~ 버스정류장(경명로)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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