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이 변해도 세 번 넘게 변한 옛날 얘기다. 민주화운동이 거셌던 80년대 대학시절, 교문 앞에는 다소 섬뜩한 플랜카드 하나가 걸려 있었다. 내용인 즉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암울한 시대상황을 함축한 표현이었다. 캠퍼스는 최루탄냄새로 가득 뱄지만 민주화 불꽃은 고귀한 젊은 희생을 바탕으로 활짝 폈다. 서울대 김세진·연세대 이한열 열사 추모열기도 뜨거웠다. 30년 넘은 묵은 얘기를 꺼낸 건 다름 아닌 우리나라 국격(國格) 때문이다. 그때와 비교해보면 이제 남부럽잖은 민주화 성공으로 국가위상이 높아졌다. 30년 전 교문 앞 섬뜩한 플랜카드의 추억 역대 선거와 마찬가지로 이번 제18대 대통령선거도 박근혜-문재인 두 후보의 건곤일척 대접전이다. 승자독식 권력게임이지만 승자엔 축하, 패자엔 위로가 주어진다. 아름다운 장면이 연출된다. 세계 8위 무역 강국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대통령의 책무는 그래서 더욱 무겁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느 누구도 대통령선거 후 선거불복이나 사회혼란을 전혀 떠올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랑스러운 민주주의 성숙의 반증이다. 숨죽이는 대선정국에 가려 빛바랬지만 의미가 있는 세 가지 통계가 있다. 첫째, 우리나라 전기품질이 세계 1위다. 12월초 글로벌 컨설팅업체 KPMG가 세계 146개국을 대상으로 평가 발표한 결과다. 겨울철 전력수급 비상상황과 원전 짝퉁 부품 논란은 논외로 하자. 그러나 통계는 엄연한 팩트다. 전기품질은 주파수와 전압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기준이다. 송배전 손실이 적을수록 높이 평가된다. 이번에 우리나라는 프랑스와 함께 공동 1위를 차지했다. 벨기에와 프랑스가 뒤를 이었다. 한전 측은 “이번에 주파수와 전압유지 분야에서 세계 최고점수를 받았다” 고 자평했다. 전기품질 세계1위는 반도체 세계1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초정밀 반도체는 고품질 전기의 덕이다. 그러기에 반도체공장의 해외이전은 불가능하다. 초일류 삼성의 반도체 경쟁력 뿌리는 바로 고품질 전기다. 중국 이전설 등 무성한 시나리오는 전후사정을 모르는 얘기다. 이번 대선 핫이슈 중 하나가 경제민주화였다. 일부 기업은 기업하기 안 좋은 환경을 탓하기도 했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그중 하나가 전기다. 두 번째, 우리나라 교육체계가 핀란드에 이어 세계 2위다. 영국 피어슨그룹이 세계 각국의 학력을 테스트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학진학률과 졸업률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조사한 결과다. 피어슨그룹은 평가보고서에서 우리나라를 교육 강국으로 치켜세웠다. 아울러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이 있고, 교육을 지원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문화에 높은 점수를 줬다. 공교육 부실, 사교육 창궐 등 여러 치명적인 요인에도 불구하고 후한 점수를 딴 건 아무래도 교육열이 아닌가 한다. 이런 열기가 우리나라 글로벌 경쟁력을 높인 셈이다. 우리나라 전기품질 세계1위, 교육체계 세계2위… 세 번째, 우리나라 국가브랜드 가치가 세계 9위다. 1조6천억 달러(1700조원) 규모다. 이는 산업정책연구원이 코리아브랜드 콘퍼런스에서 국가브랜드 가치를 평가한 결과다. 유무형가치가 종합된 국가경쟁력이 세계 최고수준이란 말이다. 국가브랜드지수를 만든 안홀트에 따르면 관광객과 외국인투자 유치, 경쟁력 있는 상품, 정치적 안전과 외교 등 모두가 국가브랜드에 영향을 끼친다. 이제 새 대통령은 우리나라 국격(國格)을 더 높일 때다. 고귀한 피를 먹고 자란 민주주의를 이제 땀과 열정으로 승화시킬 시기다. 새 대통령에게는 품격의 리더십이 요구된다. 말만 가지고는 밥을 짓지 못한다. 빈말은 나라를 망치고, 약속을 지키는 행동이 나라를 흥하게 한다. (空談誤國, 實幹興國) -김경훈 편집인 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