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공업의 모체는 1962년 9월에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의 친동생인 정인영이 설립한 주식회사 현대양행이다. 조선업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떠오르면서 선박용 중대형 엔진제작에 주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산업은 중후장대(重厚長大)형으로 초기 투자가 많은데다 자본의 회수기간이 길어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1980년 10월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정부에 귀속돼 1980년 10월에 공기업인 한국중공업주식회사로 변경됐다. 1982년 6월에는 경남 창원시 귀곡동에 시설은 물론, 규모면에서 세계 수준의 종합기계공장을 준공했다. 당시 정인영은 전두환 정권에 현대양행을 거의 강제로 빼앗기다시피 했다며 매우 애석해 했다고 전해진다. 한국중공업(현 두산엔진) 인수…10억 달러 수출탑 1984년 6월 선박용 엔진 조립공장을 준공했고, 1987년 3월 (미국)기계기술자협회로부터 에이에스엠이(ASME) 스탬프 9종, 써티피케이트(Certificate) 2종을 취득했다. 1987년 6월에 합금공구 강재제작품 KS획득했고, 1988년 1월에는 에이에스엠이(ASME) 스템프 엔에이(NA) 엔피티(NPT) 취득했다. 1993년 9월 발전용 가스터빈 전용공장을 준공하고 1996년 6월 동양전력(주)를 흡수합병했다. 당시 주요사업은 발전설비(원자력, 화력, 수력, 양수, 복합, 열병합 발전소), 산업설비(시멘트, 제철, 제강, 해수담수화, 화공, 운반하역), 선박용엔진, 주, 단조, 건설업(토목, 건축, 항만준설, 발전, 산업플랜트 건설공사) 등이었다. 주요 제품의 구성 비율은 발전 58.80%, 비 발전 41.20% 등이다. 관계회사로는 연합기계 합부금융(주), 대한화학기계 등이 있다. 총자산은 2조8441억 원, 자본금 5210억 원, 연간매출액 2조8022억 원이었으며, 종업원은 7698명이었다.
1998년에는 ‘공기업 경영구조 개선 및 민영화에 관한 법률’에 의거, 삼성중공업으로부터 엔진사업을 흡수한 뒤에 1999년 12월 30일 한국중공업의 엔진부문과 삼성중공업의 엔진부문을 합쳐 독립법인인 HSD엔진(주)로 발족했다. 삼성은 1994년부터 선박용 엔진사업을 추진했었는데 정부의 일원화 방침에 따라 한국중공업에 귀속된 것이다. 이후 2001년 4월 두산그룹 계열사로 편입돼 2005년 3월 회사명을 두산엔진으로 바꿨다. 2005년 11월 세계 최대 크기의 엔진을 생산했고, 2006년 6월 누계 생산 4000만 마력을 달성했으며, 2007년 무역의 날에는 10억 달러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주요사업은 조선산업의 핵심 기자재인 대형 선박용 중·저속 디젤엔진(700마력~11만 마력)의 생산·보급과 디젤엔진을 이용한 내연발전소의 건설·유지·보수다. 본사는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신촌동 69-3에 소재한다. 두산그룹은 기존사업에 대해 구조조정과 인수합병을 통해 안정시켰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업 분야에 대한 진출로 다각화에도 힘썼다. 첫째, 금융부문에 대한 진출이다. 두산은 1973년 6월 국내 최초의 단기금융업체인 한양투자금융을 설립했다. 1974년에 기업을 공개하고 동남증권(보람증권)을 인수했다. 1979년 동남상호신용금고(보람상호신용금고), 1988년 동남투자자문(보람투자자문)을 설립했다. 1991년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금성투자금융과 합병하고 은행업으로 전환하면서 보람은행으로 상호를 변경했다가 1999년 금융기관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하나은행에 흡수합병됐다. 또 두산은 2000년대에 할부금융업에도 진출하는데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95년 12월에 기계류의 할부금융을 목적으로 연합기계할부금융으로 설립되어 1996년 4월부터 영업을 개시했다. 1997년 5월 부산지점을 개점하고 1999년 3월에는 ㈜연합캐피탈로 사명을 변경했으며, 이후 경인, 광주, 대구, 대전, 영등포 등지로 지점망을 확대했다. 2006년 12월에 두산인프라코어에 인수되면서 2007년 3월에 두산캐피탈로 상호가 변경됐다. 이를 계기로 두산은 증권업에도 진출한다. 2000년 5월 서울 여의도동에서 자본금 40억 원으로 설립한 비엔지증권이 2008년 8월에는 두산캐피탈이 최대주주가 되면서 두산그룹의 계열사로 편입했던 것이다.
금융, 전자, 건설 등 사업다각화 힘써 둘째, 두산개발이다. 1978년 6월에 설립된 두산개발은 토목건축 및 조경업을 주사업으로 PSB공법을 개발, 국산 신기술 지정과 함께 장영실상을 수상했다. 1995년 토건사업을 두산건설로 이관하고 1997년에 두산농산과 합병했다. 두산농산의 모체는 1963년에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속사리와 도암리 호프농장을 경영할 목적으로 설립한 대관농산으로 1972년에 상호를 변경한 것이다. 1998년 9월 두산그룹의 구조조정 일환으로 (주)두산개발BG로 변경됐다. 셋째, 전자사업이다. 1974년 한국오크공업으로 설립되어 1985년에 두산전자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1980년 구미공장, 1988년 증평공장, 1996년 익산공장을 차례로 준공하고, 1998년 코오롱전자를 인수해 세계 최고의 인쇄회로용 동박적층판 제조업체로 부상했다. 1998년 9월 두산그룹의 구조조정 일환으로 9개 계열사가 통합해 탄생한 (주)두산의 전자BG가 됐다. 넷째, 두산건설이다. 1960년 동산토건(주)으로 출발하여 1975년 기업을 공개하고 한국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1976년 해외건설업 면허를 취득하고 동남아 및 중동지역에 진출했다. 1982년 두산요업을 합병하고 1993년에는 두산건설로 상호를 변경했다. 1997년 9월 춘천 두산리조트를 개장하고 2001년 4월에 두산엔지니어링을 흡수합병했으며, 2002년 3월에는 은산토건에 철강재 설치 공사업을 양도했다. 2004년 5월 현대그룹 계열사였던 고려산업개발을 인수하고 2010년 11월에 두산메카텍을 흡수합병했다. 종속회사로 골프장 운영업체인 두산큐벡스와 레미콘 제조업체인 (주)렉스콘이 있다.
다섯째, 두산기업은 1977년 풍전기업을 모체로 한 두산 계열회사로 1987년 설립됐다. 1990년 강원도 춘천시에 두산리조트 춘천컨트리클럽을, 1997년에는 두산리조트 춘천콘도미니엄을 개장했다. 춘천컨트리클럽은 46만5000평, 27홀의 국제적 규격의 골프장이며, 콘도미니엄인 두산리조트는 125개의 객실과 국제 규모의 회의시설, 수상레포츠를 위한 마리나 시설, 수영장, 18홀 규모의 미니골프장 등을 갖춘 대규모 휴양지이다. 2004년 두산산업개발과 합병했다가 2006년에 재분리해서 2007년에 라데나리조트로 변경했다. 한편 두산건설은 1994년 9월 도로 및 관련시설 운영업체인 새재개발(주)을 자회사로 설립했다. 국내 최초의 민자유치사업(BTO)으로 3번 국도의 충북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와 경북 문경시 진안리를 연결하는 쌍굴 형태의 이화령터널 축조공사를 착공해 1998년 10월 20일에 완공했다. 민간 사업자가 직접 시설을 건설해 정부, 지방자치단체 등에 기부채납하는 대신 일정기간 동안 사업을 위탁경영함으로써 투자금을 회수하는 방식이다. 민간업체의 수익이 약정한 수익률에 못 미칠 경우에는 정부 혹은 지자체가 그 차액을 보전해주는 것으로 국내에는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도입됐다. ‘형제의 난’으로 경영권 분쟁 아픔도 높이 548m의 이화령(이유릿재)을 경유하는 국도 3호선은 도로가 구불구불한 탓에 차량운행에 지장이 많다는 민원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이에 따라 새재개발은 3번 국도를 4차로로 확장하면서 이화령 터널을 뚫었던 것이다. 그러나 2001년에 강원도 홍천과 경북 안동을 연결하는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이화령 터널 옆에 고속도로 상하행선 터널이 추가로 건설됐다. 이화령 터널은 이내 무용지물 신세로 전락하게 됐고, 이로 말미암아 정부의 재정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만 갔다. 2007년 건설교통부가 이화령 터널을 인수하여 2007년 8월 1일 터널 통행료를 폐지했다. 결국 새재개발은 2007년 9월에 청산됐다. 1999년 12월에 두산콘프로덕츠코리아를 설립했다. (주)두산식품BG의 전분당 사업부문과 미국 일리노이주에 위치한 세계 3위의 옥수수 가공업체인 CPI(Corn Products International)의 한국 자회사인 콘프로덕츠코리아 간에 50대50의 합작법인 형태로 설립한 것이다. 그러나 동사는 2001년 두산그룹에서 계열분리되어 2007년에 (유)콘프로덕츠코리아로 상호가 변경됐다.
2008년 5월에는 서울 흑석동과 경기도 안성 등 2곳에 캠퍼스를 거느린 중앙대학교를 인수해서 박용성이 제9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1918년 4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위치한 중앙교회에 중앙유치원을 설립한 것이 모체였다. 중앙유치원은 이후 사범과를 설치, 유치원 교사를 양성했다. 1922년 중앙유치원 사범과는 중앙보육학교로 승격됐는데, 일종의 전문학교였다. 여성으론 국내 최초로 이승만정부의 장관을 역임한 임영신(任永信, 1899년~1977년)이 1933년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해서 서울 흑석동에 교지를 마련했으며, 5년 후인 1938년 5월 ‘영신관’을 완성해 학교를 이전했다. 한국 최고(最古)의 기업인 두산그룹은 1898년 창업 이래 제1세대(유통업)→제2세대(소비재산업, 경공업)→제3세대(자본재산업, 중공업)으로 철저하게 탈바꿈했다. 두산의 역사야말로 유통, 경공업, 중공업 단계로 업그레이드된 한국의 산업사였던 것이다. 그 결과 두산그룹은 2011년 현재 25개 계열사에 자산총액 26조9700억 원으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15위에 랭크됐다. 공기업을 제외한 순수 민간기업집단 순위는 10위였다. 두산은 그동안 기업 내, 외적으로 별다른 굴곡 없이 순탄한 성장을 지속했는데 창업 100주년에 즈음해서 큰 시련을 겪었다. 2009년 11월 4일에 박두병의 둘째 아들이자 두산그룹의 박용오 전 회장이 별안간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발단은 2005년에 셋째인 박용성을 그의 후임회장에 추대한데 대한 반발이었다. 당시 박용오는 회사 비자금조성 사건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등 이른바 ‘형제의 난’을 일으켜 가문에서 제명당했던 것이다. 검찰수사 결과 총수일가는 지난 10년간 326억 원의 비자금을 횡령해서 유용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한국전쟁 이래 최대의 국난으로 치부되었던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30대 재벌 3분의 1이 부도로 해체되는 한계상황에서 두산은 이를 기회로 삼아 사업구조를 완전히 개편했다. 한국중공업의 인수는 가장 큰 호재였으나 형제의 난으로 기업이미지가 손상되었던 것이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